소설리스트

신부강탈-100화 (10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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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겸 할아버지의 생가였다는 평창동 저택은 정원이 워낙 큰 데다 입구부터 유명한 조각품이 여러 개 놓여 있어서 집이라기보다는 꼭 미술관 같았다. 정원은 웬만한 초등학교의 운동장만 했고, 정중앙에 있는 분수엔 정교한 꽃과 새가 조각되어 있었다. 여유롭게 뿜어져 나오는 분수의 물줄기를 보며 소희가 잠시 걸음을 멈춰 감탄했다.

“그럼 지금은 여기 아무도 안 살고 있는 거예요?”

아깝다. 정말 멋진 곳인데.

제 손을 감싼 지겸의 온기와 함께 정원을 걸으며 소희가 물었다. 돌아가신 작은아버지가 그에게 남긴 편지와 열쇠가 얼마 전에 발견됐다고 했다. 오늘 이곳에 온 것도 그가 남긴 걸 확인하기 위해서다.

“응, 이 집을 그대로 두라는 게 할아버지 유언이었다는데. 애초에 아버지가 들어와 사시길 바란 것 같지만.”

아버지는 이 집을 깨끗하게 관리할 뿐, 주인 없이 오래 버려두었다. 아마 그에겐 트라우마를 떠올리게 하는 끔찍한 곳일 테니까.

지겸에게도 아버지가 지내는 본가는 그런 장소였다. 어머니에 대한 기억과 끔찍할 정도로 외로웠던 어린 시절이 절로 떠올라 최대한 방문할 일을 피해 왔다. 보통은 아내를 그런 식으로 사별하면 이사를 갈 만도 한데, 아버지는 여전히 같은 집을 고집하셨다. 심지어, 어머니가 쓰시던 방은 가구도 전부 예전 그대로다.

그런 면에선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놀라울 정도로 닮았다. 당신 사후에도 집을 그대로 유지하고 잘 관리하기를 바란 할아버지나, 스스로 목숨을 끊은 아내의 흔적까지 끌어안고 평생을 살아온 아버지나.

작은아버지가 자신 앞으로 열쇠를 남겼다고 했을 때 지겸이 가장 먼저 떠올린 건 이 평창동 저택 지하에 있는 와인 까브(지하 와인 저장고)였다. 생전에 작은아버지가 공들여 관리했던 장소다.

“조심해.”

검은색 현무암으로 만들어진 계단을 조금씩 앞서 내려가며 지겸의 손이 소희를 단단히 붙든다. 여전히 이럴 때면 막 걸음마를 뗀 아이를 대하듯 조심스럽게 군다. 처음엔 유난인 그의 과한 배려가 불편했는데 이것도 어느새 익숙해졌다. 이러다 차에서 혼자 내리는 방법을 아예 잊어버리는 건 아니겠지.

“괜찮…아요?”

오늘 그는 평소보다 말수가 더 적다. 긴장하고 있는 게 느껴져서 소희도 같이 떨렸다.

“그럼. 옆에 이렇게 네가 있는데.”

이제 그거면 난 다 괜찮아.

지겸이 소희의 손을 가볍게 당겨 하얀 손등에 입을 맞췄다.

그러더니 티셔츠 위에 입고 있던 셔츠를 벗어 소희의 어깨에 걸쳐준다.

“안에 조금 쌀쌀해.”

소희가 고개를 돌려 그와 눈을 맞췄다. 서로 같은 모양으로 부드럽게 휘어지는 눈매가 미소를 머금는다.

“우와….”

안으로 들어서자 마치 동굴을 연상하게 하는 내부의 양쪽 벽면엔 와인이 가득했다. 그리 큰 공간은 아닌데도 불구하고 천장까지 꽉 들어차 있는 걸 보니 최소 몇백 병은 되어 보였다.

“당신 작은아버님, 정말 와인을 좋아하셨나 봐요.”

“와인 자격증도 있으셨어. 무슨… 마스터오브와인(MW)이라는 건데 아시아계 최초였다고 알고 있어.”

작은아버지는 매해 봄이면 두 달가량을 프랑스 보르도 지역에 머물곤 했는데, 그해 새 와인을 미리 전문가에게 소개하는 자리인 ‘보르도 엉 프리뫼르’라는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그러고 돌아올 때마다 그의 손에 가득 들려 있던 건 지겸과 지훈을 위한 선물들.

“이건 나랑 형이 태어나던 해에 생산된 포도로 만든 와인.”

지겸이 딱 보기에도 오래된 레드 와인을 한 병 꺼내 소희에게 보여줬다. 구조가 단단한 그랑 크뤼의 와인이라도 사실 20년 이상 보관하는 건 좋지 않다고 한다. 그런데도 지겸은 이 와인을 차마 딸 수 없었다. 자신의 거의 유일한 어린 시절의 추억을 단숨에 마셔버릴 수는 없으니까. 그래서 지금 이곳엔 지겸이 새로 구매해서 채워 넣은 것도 있지만 여전히 작은아버지가 관리하던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 댁에 놀러 올 때마다 지겸은 작은아버지와 이 지하 와인 까브에 오래 머물곤 했다. 작은아버지가 찍은 사진이나 스케치한 그림의 프랑스 전경은 그 어떤 동화 속 세상보다도 지겸에게 더 낭만적이었다. 그의 이야기에 가만히 귀 기울이다 보면 끝없이 펼쳐진 포도밭의 정경이나 풍미가 가득한 치즈 향을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와인 까브 가장 안쪽에는 커다란 액자가 걸려 있었다. 작은 성의 첨탑을 둘러싼 포도밭이 눈에 띄는 고즈넉한 프랑스 시골 마을의 풍경이었다.

“작은아버지가 찍으신 사진. 보르도 근교의 ‘생테밀리옹’이라는 곳이래.”

그가 꽤나 애정했던 작은 시골 마을은 전체가 포도밭이라, 어디를 지나가든 포도 향이 가득하다고 했다. 나중에 꼭, 소희와 함께 가보고 싶다고 생각할 때 즈음.

“우리, 다음에 같이 가봐요. 저기.”

와인 저장소에 들어온 다음부터 어딘지 모르게 가라앉은 남자를 느끼며, 소희는 부러 더 밝게 말하려고 애를 썼다. 그의 팔에 슥 팔짱을 끼고 웃으며 말하자, 지겸의 새까만 눈동자가 조금 촉촉해지는 것 같다.

“그래, 같이.”

동그란 이마에 그가 고개를 숙여 입을 맞췄다. 처음엔 꽃향기와 베리 향이 은은하게 풍기다가 입에 머금을수록 혀가 얼얼할 정도로 달콤해지는 화이트 와인. 제 옆의 여자를 와인에 비교한다면 그렇지 않을까.

지겸은 한 번 더 키스한 뒤 벽에 걸린 액자를 들어냈다.

“어!”

그러자 액자에 가려져 있던 벽의 손잡이와 열쇠 구멍이 드러났다.

“이런 데 문이 있었네요?”

소희가 놀라며 물었다. 김 실장님이 열쇠 얘기를 했을 때부터 지겸은 이곳을 떠올렸다. 성인이 되어 직접 저장소를 관리하며 우연히 이 문을 발견했지만, 어디에도 열쇠가 없어 그냥 장식인가 생각하고 넘어갔었기 때문이다.

열쇠는 예상대로 꼭 맞았다.

지겸이 손잡이를 쥐고 힘을 줘 돌리자, 오래 열리지 않았던 문이 끼익하는 소리와 함께 천천히 열렸다.

작은 골방엔 책상 하나와 책장이 전부였다. 몇십 년 동안 주인을 잃은 곳엔 뿌연 먼지가 가득했다. 책장으로 다가가 꽂힌 책을 한 권, 한 권 확인하던 지겸이 책상 위 의자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낯익은… 책들이에요?”

어두워진 지겸의 표정을 보고 소희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책장엔 약리학, 약제학, 약물 치료학 등 약학을 전공한 작은아버지의 전공 서적과 경영 관련 서적, 생명공학 관련 서적들이 빼곡하다. 무엇보다 책장의 한 칸 전체를 차지한 파일첩과 노트에는 베논 제약의 당시 재무제표 분석부터 신약 연구 계획과 관련 메모가 가득했다.

“응… 아무래도 나. 후…. 그동안 작은아버지에 대해서 잘못 알고 있었나 봐.”

아니 애초에 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던 것 같다. 지겸은 작은아버지가 베논 제약의 경영에 일말의 관심도 욕심도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자신은 물론 모든 가족이 그에 대해 보고 싶은 대로만 봤던 건 아닐까.

“편지… 이제 읽어볼래요?”

소희가 지겸이 차마 열지 못했던 편지봉투를 조심스레 건네며 말했다. 고개를 끄덕이는 그의 눈동자에 미묘한 이채가 깃들었다. 혼란스러움, 어쩌면 더 일찍 눈치채지 못했던 것에 대한 후회.

지겸에게.

이 편지를 읽을 때쯤 너는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까.

부디, 너무 어린 나이가 아니길 바란다.

무엇보다 이 편지를 차마 발견할 수 없는 일 같은 건 생기지 않기를.

너를 볼 때마다 나는 나 자신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어.

평생 사랑하는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살아왔는데, 어린 너도 벌써 그러고 있더구나.

내가 좋아하는 게 뭔지 알아차리기도 전에, 뭘 좋아하면 안 될지를 생각하며 전전긍긍했지.

사실 살면서 하고 싶은 게 아주 많았단다.

하지만 어떤 것도 내게 허락되지 않은 기분이었어.

내가 뭔가를 좋아하면, 형이 불행해졌으니까.

네 아버지가 너와 지훈을 우리 형제처럼 만들지 않기를 바라지만,

아마 쉽지 않겠지. 우리가 자라며 보고 배운 게 겨우 그런 것뿐이니까.

형은, 네 아버지는…. 불쌍한 사람이다.

그렇다고 용서하라는 건 아니야.

다만 뒤집어씌우고 원망만 하지는 않았으면 한단다.

억지스러운 용서와 한이 가득 찬 원망 모두 사람의 영혼을 갉아먹으니까.

너를 구원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너뿐이다.

그저 나는 네가 찾았으면 좋겠다.

정말 너만의 길을, 너를 오롯이 기대어 안길 수 있는 사람을.

내가 찾지 못한 그 열쇠를,

우리 지겸이는 꼭 찾을 수 있기를 빈다.

끝까지 함께해 주지 못해 미안하구나.

사랑한다.

편지를 다 읽은 지겸의 손이 어느새 떨리고 있었다. 소희가 다가가 그의 머리를 조심스레 감싸 안았다. 지겸이 앉아 있으니 그나마 두 사람의 눈높이가 얼추 맞는다. 소희의 품에 지겸이 얼굴을 깊이 묻었다. 그에게서 뜨거운 숨이 흩어져 나온다.

제 팔로 제대로 감싸지도 못하는 큰 어깨를 가만히 다독여줬다. 이 남자의 품에 안길 때면 언제나 그녀의 온몸에 빠듯한 안온감이 차오른다. 그에 비해 턱없이 작고 부족하지만, 제 품 안에서 지겸도 조금이나마 위로를 얻기를 바랐다.

그의 뒷머리를 살살 쓰다듬으며 책상 위를 살피던 소희에게 구석에 놓여 있던 약통 하나가 눈에 띄었다. 아티반. 분명 신경 안정제의 일종이다. 그녀는 슬그머니 팔을 뻗어 책과 시계 뒤에 약통을 숨겼다. 다행히 지겸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언젠가 그의 작은아버지가 좋아했다던 프랑스의 작은 시골 마을에 꼭 한번 가보고 싶다. 이 앞에 걸려 있던 사진 속 장소도 궁금하다. 둘이서 대단한 샤또가 아닌 소박한 와이너리를 찾아서, 맛있는 프랑스 가정요리와 레드 와인에 실컷 취해 별이 총총한 밤길을 함께 거닐면 좋겠다. 걸음마다 짙고 달큼한 포도 향이 묻어나오려나.

자신에게 아프고 서글픈 기억으로만 가득했던 남자의 과거를 없애거나 바꾸는 힘은 없지만, 노력하면 더 좋은 추억으로 미래를 덧씌우는 건 도울 수 있지 않을까.

그리하여 어느 날 문득 지겸의 처절했던 외로움과 상처가 아스라한 기억 저편으로 조금씩 사라질 수 있었으면. 소희는 그런 진심을 담아 할 수 있는 한 더욱 세게, 자신의 소중한 남자를 꼬옥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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