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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통증의 간격이 일정해?”
거칠어진 호흡을 애써 가다듬으며 소희가 유정에게 거듭 물었다. 그동안 유정이 임신과 출산에 대해 여러 정보를 알려줘서 소희도 이제 꽤 관련 지식이 생긴 상태였다.
- 응 그런 것 같아. 의사 선생님 말씀대로야. 진짜 진통인가 봐.
이 와중에도 상황을 모르는 남자는 자꾸만 그녀의 허리에 입술을 지분거렸다. 소희가 어쩔 수 없이 그를 계속 팔꿈치로 밀어냈다.
“알겠어. 내가 지금 당장 갈게, 조금만 기다려!”
지겸도 소희의 목소리가 심각해지자 상황을 눈치채고 바로 애무를 멈췄다.
“유정, 씨야…?”
소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바닥 여기저기 흩어진 옷을 주워 그에게 던졌다. 자신의 블라우스도 얼른 입고 단추를 잠갔다. 맘이 급해 자꾸만 손이 미끄러지는 그녀를 지겸이 도왔다.
“당신도 옷 어서 입어요! 유정이 데리러 가야 해요. 진통 온 것 같아.”
다행히 유정이 새로 얻은 집은 지겸의 집에서 더 가까웠다. 그와 몸을 부딪느라 허리까지 끌어올려진 치마를 내려 주름을 펴는데, 괜히 소희의 손이 다 떨렸다. 유정의 어머니께 전화할까 고민하다가 같이 계실 아버님 생각이 나서 우선은 문자만 남기기로 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짐승처럼 그녀의 몸을 물고 빨던 모습은 어디 간 건지, 다시 옷을 멀끔하게 차려입은 지겸이 소희의 어깨를 감싸 안고 다독였다. 당황하는 그녀의 마음을 알아챈 것 같았다. 고마웠다.
“유정 씨 잘 해낼 거야. 유현이한테도 내가 따로 연락해 둘게.”
무엇보다 이런 상황에 그가 제 곁에 있다는 게 든든하고 마음이 놓였다. 혼자가 아니라 둘이 오롯이 함께한다는 건 이런 기분이구나. 지겸이 한국에 돌아온 게 진심으로 기뻤다.
***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유정은 태동 검사와 당직 선생님의 내진을 받았다. 진통의 주기는 5분 간격. 바로 입원하라는 소리에 유정은 물론 소희도 잔뜩 긴장했다. 유정이 분만실로 들어가기 직전, 소희가 그녀를 꼭 안아줬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혹시나 필요하면 언제든 불러줘. 알겠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긴장해서 어쩔 줄 모르던 유정이었는데 다행히 이젠 진정된 건지 표정이 제법 결의에 차 있다.
분만실 밖에서 기다리던 소희는 피곤한데도 한숨도 자지 못하고 마음만 졸였다. 가끔 간호사를 통해 소식을 전해 들었다. 생각보다 진통이 길어지고 있었다. 그런 소희를 챙긴 건 지겸이었다. 어디서 가져온 건지 따뜻한 차와 담요가 시린 몸과 마음을 덥혔다.
한 자세로 오래 앉아 있어서였을까. 순간 다리에 쥐가 났다. 소희가 인상을 찌푸리자 지겸이 그녀 앞에 바로 무릎을 꿇고 발과 종아리를 정성스레 주물렀다.
“와… 형. 누가 보면 내 동생이 아니라 소희가 애 낳는 줄 알겠네.”
“어, 오빠?”
유현이었다. 언제부터 지켜보고 있었던 건지 뒤에서 잔뜩 미간을 찌푸리며 나타났다.
소희가 당황하며 지겸의 손에 잡힌 제 발을 빼내려 했지만, 그가 더 힘주어 쥐는 바람에 뿌리칠 수 없었다.
유현의 양손엔 이런저런 짐들이 가득했다. 유정을 데리고 급히 오느라 미처 준비하지 못했던 물건들을 지겸이 가져와 달라 부탁했었다.
“늦었네.”
지겸은 유현을 돌아보지도 않고 소희의 다리를 마저 주물렀다.
“유정이 집에서 형이 얘기한 것들 마저 챙기느라. 근데 언제 귀국했어요? 한국 온 줄도 몰랐는데.”
“좀 전에.”
허.
눈을 가늘게 뜨고 계속 둘을 훑는 유현의 시선에 오히려 소희가 눈치를 봤다.
“콜록.”
뭔가 민망해서 소희의 입술 새로 기침이 뱉어지자, 지겸이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본다.
“괜찮아? 물 줄게.”
“아니, 아까 준 거 아직 남았을 텐….”
하지만 소희가 제 옆에 둔 생수병이 빈 것을 확인하기도 전에 지겸이 벌떡 일어섰다.
“얼른 지하 편의점 다녀와야겠다. 혹시 뭐 다른 거 먹고 싶어?”
소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 지겸 형! 가는 김에 나도 목마른….”
유현이 말을 더 보태기도 전에, 지겸은 지체하는 기색도 없이 이미 사라진 뒤였다.
“와… 적응 안 돼. 소희야, 형 너한테는 매일 이래?”
유현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물었다.
“네?”
이렇다는 게 뭘 뜻하는지 몰라서 소희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니 저 형이, 원래 어디 앉으면 일단 일어나는 법이 없거든. 공부하든 뭐 책을 읽든 무슨 석고상같이 반나절도 한자리에 앉아 있는 스타일인데.”
그랬던가. 자신과 있을 때는 늘 뭐라도 하나 더 챙겨주느라 은근 부산스럽고 바빴던 것 같은데.
“그리고 그 표정. 내가 저 형을 몇 년을 봐왔는데, 이건 너무 낯설다. 워낙 평소엔 아무 감정도 안 드러내고, 별로 웃지도 않고 전부 한심하다는 듯 보잖아.”
봐봐, 일자 눈썹 사이에 이렇게 딱 힘주고.
뭔가 근엄하고 차가운 표정을 따라 지어보려고 애쓰는 유현을 소희가 물끄러미 쳐다봤다.
“풉. 지겸… 씨가요?”
소희가 정말 의외라는 듯 되물었다. 이쯤 되면 다른 사람 얘기를 하고 있다 해도 믿을 지경이다. 그러고 보니 유정도 같은 말을 했었지. 같이 밥 먹는 내내 한번을 웃지 않더라고.
자신을 향해서는 입가에 미소가 떠나질 않는 다정하고 따스한 사람인데. 그의 표정이나 성격이 무감하다고 느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짓궂고 어떨 때는 곤란할 정도로 지나치게 열정적…이라면 모를까.
“유정인… 괜찮겠지?”
지겸에 대한 얘기를 실컷 하다가도 유현은 분만실 쪽을 쳐다보며 자꾸 한숨을 쉬었다. 동생의 출산 때문에 긴장되어서 뭐든 다른 이야기로 주변을 환기해 보려는 노력을 소희도 알았다.
“걱정하지 마세요, 오빠. 다른 사람도 아니고 유정이잖아요.”
“하긴 그 녀석이 어떤 앤데.”
뭔가 생각에 잠긴 듯 오랫동안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유현이 소희를 돌아봤다.
“……고맙다, 소희야.”
그는 임신 기간 내내 외로웠을 제 동생 곁에 소희가 있어 줘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두 사람이 서로 마주 보고 웃었다.
순간 커다란 손이 불쑥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신유현, 다른 데 봐.”
“형 진짜!”
지겸이 유현에게 옆으로 비키라며 턱짓하자, 그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재빨리 몸을 옮겨 멀찍이 떨어져 앉았다.
“아니, 내가 아는 그 구지겸 형 맞죠?”
지겸이 유현의 물음엔 대답조차 하지 않고 자세를 틀어 앉았다. 뚜껑을 열어 물을 건네고, 소희가 좋아할 만한 주전부리 몇 개를 주섬주섬 꺼냈다. 그의 큰 등에 시야가 막혀 옆에 있는 유현 쪽에서 소희는 보이지도 않았다.
“이 정도면 중증인데? 나중에 소희가 임신하면 형이 애 대신 낳는다고 하겠….”
유현이 혀를 끌끌 차며 자리에서 일어섰다가, 자신을 노려보는 지겸과 소희의 붉어진 볼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자기도 모르게 뱉어진 실언이었다.
“신유정 산모님, 예쁜 공주님 출산하셨습니다!”
다행히도 그때 오랜 기다림을 깨고 간호사가 기쁜 소식을 전했다. 유정의 몸 상태에 별로 큰 문제도 없어서, 곧 입원실로 이동하면 얼굴도 볼 수 있다고 했다.
“아이는요?”
지겸이었다. 소희가 물어보려던 참이었는데, 자신도 유현도 아닌 그의 입에서 먼저 뱉어진 질문에 조금 놀랐다.
“네, 아주 건강해요! 검사 몇 개 진행하고, 잠시 후 신생아실로 오시면 보실 수 있으세요.”
세상에, 유정의 아기라니.
소희가 긴장되어 주먹에 힘을 꽉 쥐었더니, 지겸이 금세 그 손을 감싸주었다.
신생아실의 투명한 유리창 너머 유정의 아기가 보였다. 눈을 꼭 감고 간호사의 품에 안긴 아기는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 작았다. 까만 머리카락이 벌써 제법 나 있고 앙다문 입매가 유정을 쏙 빼닮았다.
<신유정 아기>
모: 신유정
번호: 15320755 F
몸무게: 3300 gm
분만: NSVD
아기와 함께 간호사가 들고 있던 카드를 훑어보던 소희의 눈길이 멈췄다. 옆에 있는 다른 아기를 보니 엄마의 이름 아래 아빠의 이름도 적혀있던데. 한 줄이 비어 있는 카드가 유독 허전해 보여서 가슴 한켠이 먹먹해졌다.
하지만 그게 뭐 어때. 겨우 저 한 줄 비어서 태어났을 뿐이다. 앞으로 자신과 이곳에 모인 사람들이 유정과 함께 저 아기의 하루하루를 더 꽉 채워주리라.
괜스레 눈물이 날 것 같아서 고개를 돌리는데, 유리창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 지겸이 보였다. 부드럽게 휘어진 눈매와 입가. 아기를 향해 따스한 미소를 짓는 남자의 모습이 묘하게 뭉클했다.
“아기… 좋아했었어요?”
“응. 원래 소아외과 펠로우 하고 싶었거든. 애기 유정 씨 많이 닮았다. 너무 예쁘네….”
소희가 그와 맞잡은 제 손으로 시선을 잠시 내렸다가 다시 지겸을 바라봤다.
따지고 보면 친삼촌이라고 해도, 잘 알지도 못하는 소희 친구의 아기다. 그런 애기도 저런 눈으로 보는데, 언젠가 진짜 자신의 아기가 태어나면 저 남자는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꾸만 뻗어 나가는 상상의 가지를 잘라내기 쉽지 않아서, 소희는 지겸의 팔에 가만히 기댔다. 수상할 정도로 붉어진 제 두 뺨을 애써 감추기 위해.
지독히도 뜨거웠던 이 여름이 자신과 지겸에게 떠올리기도 싫을 정도로 힘겨웠던 계절이 아닌, 어여쁜 유정의 딸이 건강하게 태어난 기쁜 순간으로만 기억될 수 있기를.
상실의 끝에 신기하게도 새 생명이 찾아왔다. 그게 너무 감사해서 세 사람은 할 수 있는 한 크게, 마음껏 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