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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교도소 접견일. 어머니는 그녀에게 가지 않아도 괜찮다고 거듭 말했지만, 그래도 소희는 따라나섰다.
“구 교수는 언제 귀국이야? 보고 싶겠다…. 넌 괜찮니?”
“이번 주요. 응, 뭐 매일… 통화도 하니까.”
요 며칠 밤 내내 그와 통화할 때마다 전화기에 대고 했던 행동들을 떠올리며 소희가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지겸의 요청은 점점 더 집요해지고 짓궂어졌지만, 소희도 싫지 않았다. 처음엔 어색했던 행동도 계속 하다 보니 익숙해졌다. 심지어 스스로 어디를 어떻게 만지면 기분이 좋아지는지도 쉽게 터득했다.
지겸은 갈수록 신음도 커지고 자연스럽게 스스로를 애무하는 그녀를 보며 흥분하면서도 무척 힘겨워했다. 그렇게 자신을 안고 싶어 안달하는 남자를 느끼는 건 소희에게도 묘한 충족감을 줬다.
“그런데 이렇게 오래, 멀리 떨어져 있어도 두 사람은 정말 문제없는 거니?”
얼마 전에도 물어보시더니, 지겸 혼자 각인을 지키고 있는 데다 그 때문에 죽을 지경까지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엄마는 계속 걱정스러우신 모양이다. 아무래도 아버지 때문에 평생 답답하리만치 자리를 지키고 살았던 분이니까.
“응, 사람마다 다르다잖아. 우리는 괜찮아요.”
사실 소희도 지겸이 미국 출장을 간다길래 처음에는 염려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아무렇지 않았다. 일전에 지겸이 말한 대로 ‘서로의 마음에 대한 신뢰’가 역시 영향이 있는 걸까. 그만큼 여러 일을 함께 거치며 두 사람의 마음이 단단해졌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김 실장은 바쁜 일정에도 소희의 모든 외출에 동행했다. 장기출장을 떠나며 지겸이 얼마나 당부하고 갔는지. 집 앞 마트에 갈 때도 김 실장을 부르라고 해서 소희가 노려봤더니 그제야 말을 바꾸기도 했다. 하여튼 과보호는.
김 실장님이 운전하는 차 뒷좌석에서 소희는 바깥 풍경을 보고 있는 엄마의 옆모습을 슬쩍 봤다. 요즘 부쩍 마른 엄마의 여린 어깨선이 마음에 걸렸다.
“엄마야말로. 내 걱정은 그만하고, 이젠 제발 엄마 자신을 좀 더 신경 써요. 네?”
소희가 엄마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어느덧 주름이 자글자글한 손에 불거진 뼈마디가 잡혔다. 오늘 접견 끝나고 엄마 좋아하시는 거, 잘 드시는 거 사 드려야지. 그런 결심을 하고 있는 차에 두 사람은 목적지에 도착했다.
접견 시간은 겨우 30분 남짓. 소희는 아버지와 대화하는 어머니를 뒤에서 지켜보기만 했다. 파란색 죄수복에 하얀색 번호표를 매단 아버지의 모습이 어색하고 너무 불편하다. 당당했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한껏 수척해지셨다. 접견이 끝나갈 때쯤, 아버지가 소희 쪽을 쳐다봤다. 뭔가 하고 싶은 얘기가 있는 것 같았다.
어머니는 소희를 향해 고개를 살살 내저었다. 원치 않으면 굳이 그와 대화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내쉬고, 소희는 아버지 맞은편 접견석으로 가 앉았다.
“소희야.”
아버지는 얼굴도 많이 상하고 죄수복을 입고 있어도 여전히 단정한 모습이었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그가 응당 받아야 할 처벌을 받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소희의 마음속 한구석에는 어쩐지 일말의 불편함이 남아 있었다.
“네.”
“…미안, 미안하다.”
고개를 깊이 숙인 그는 차마 소희의 눈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
“네가 로열 오메가로서 사는 것. 그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소희는 차마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 맞잡은 제 손끝만 바라봤다. 하지만 불끈 화가 치밀었다. 말은 미안하다고 하면서 결국 그 자신을 망하게 한 그 고집은 여전히 버리지 못한 모습이.
“그게 뭔데요.”
“…뭐?”
“로열 알파니 오메가니. 결국 사람이 만든 개념에 불가하잖아요. 지훈 오빠, 그러니까 구 전무… 좀 보세요. 그 사람도 잘못했지만, 아버지와 구 회장님 같은 사람들이… 제일 나빠요.”
임 재단장은 아무 답이 없었다.
“아버지는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 있어요? 엄마와 제가, 어떻게 하면 더 행복할지. 견고한 재림 왕국을 만들면, 로열 알파/오메가에게 더 편한 세상이 되면 전부 해결되는 줄 아셨어요?”
잔뜩 충혈된 아버지의 눈에 물기가 고였다. 저 감정은 후회일까, 아니면 딸 앞에서 자신의 죄를 낱낱이 듣는 게 부끄러워서일까.
“그리고 제 동의도 없이, 어떻게 그런 짓을 하실 수 있어요?”
“그건…. 너랑 구 전무의 우수한 것만 골라서… 그, 그렇게 하면 구 회장이 로열보다도 더 대단한 알파가 태어날 수 있다고 했어. 그런 손자에게 재림재단을 맡기고 싶다고 생각한 게 이상한 거냐? 그래? 어차피 아이를 가질 거면 가장 완벽한 방법으로…!”
오늘 접견을 오기 전, 소희는 결국 어머니에게 아버지가 동의 없이 제 난자를 채취해 냉동했었다는 사실을 차근히 말씀드렸다. 지겸이 확인해 모두 폐기했고, 다행히 아직 어떠한 연구에도 쓰인 적 없다고 하니 그나마 알려드릴 수 있었다.
“여보!”
갑작스레 격양되는 아버지를 보고 소희 뒤에 서 있던 어머니가 단호하게 그를 불렀다.
“다시는, 우리 딸에게 그런 짓 할 생각하지 말아요. 로열 알파면 뭐 해요. 뭐가 정말 중요한지, 어떤 게 부끄러운 건지도 모른다면.”
후. 아내의 눈치를 본 그의 입에서 짙은 한숨이 뱉어졌다.
“솔직히 말하면 소희야. 아비도 모르겠구나. 이젠 뭐가 맞는지, 틀린 지. 평생을 맞다고 믿어온 것들을 전부 다 틀렸다고 하니. 하지만.”
조금 달라진 목소리에 소희가 아버지와 눈을 맞췄다.
“구 교수. 그래, 구지겸. 그 사람을 보니 조금… 알 것도 같더구나.”
어쩌면 그동안 잘못 살았다는 걸.
그의 입에서 지겸의 이름이 나올 줄 몰랐던 소희가 조금 흠칫했다.
“미안, 하다… 딸.”
괜스레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소희는 고개를 돌렸다. 뒤에 서 있던 엄마가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쌌다. 조금 고민하던 소희가 입술을 꽉 깨물고 말했다.
“건강, 챙기세요.”
그 말을 끝으로 소희가 일어섰다. 교도관의 안내로 접견실을 벗어나며, 임 재단장은 거듭 제 아내와 딸을 돌아봤다.
아마 오랫동안 아버지를 용서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자신보다 심하겠지만 지겸도 구 회장을 볼 때 비슷한 감정을 느끼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들이 소희와 지겸의 아버지인 것은 어떤 것으로도 바꿀 수 없는 사실이었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인 혈연은 단단하고 끈끈한 결속이 되기도 하지만 끊고 싶어도 끊을 수 없는 족쇄가 되기도 하니까.
부디 그들이 스스로의 죄를 처절하게 후회하고 가슴 깊이 속죄하기를, 그게 소희와 지겸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용서의 방법이었다.
***
“도련님께 둘 다 한마디 들을 것 같습니다만….”
드디어 귀국하는 지겸을 데리러 인천공항으로 가는 길, 뒷좌석에 탄 소희를 김 실장이 거듭 난처한 얼굴로 쳐다봤다.
“그 사람 놀라게 해 주고 싶어서 그래요, 실장님. 딱 한 번만 봐주세요.”
자정이 다 되어 도착하는 비행기라서 지겸이 소희에게 절대 나오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한 터였다. 김 실장이 그런 지겸의 성정을 모를 리가 없다.
하지만 한 달을 넘게 떨어져 지냈는걸. 지겸이 상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그를 그리워해 온 소희였다.
만나면 무슨 얘기부터 할까. 자신이 마중 나올 줄도 모르고 있을 텐데, 제 얼굴을 보면 지겸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소희는 마치 태어나 처음 비행기를 타러 가는 아이처럼 공항을 가는 길 내내 심장이 두근댔다.
비행기 현황판엔 이미 시애틀-인천행 비행기가 도착했다고 떠 있었다. 출국장 문 앞에서 소희는 앉지도 못하고 서성였다. 밤늦은 시각이라 사람이 많지는 않았다. 하나 재밌는 건 모두 다 소희처럼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 다들 저와 같은 기대감을 품고 있겠지. 커다란 자동문이 스르륵 열렸다 닫힐 때마다 서 있는 사람들이 움찔, 하며 목을 빼고 집중했다. 그러다 자신이 기다리던 얼굴이 나타나면 그들의 면면에 반가움과 설렘, 약간의 희열이 들이찼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소희의 마음도 같이 조금씩 차곡차곡 달아올랐다.
아. 그때 문이 열리고 짙은 회색 맨투맨에 편한 면바지를 입은 차림의 지겸이 나타났다. 앞머리가 살짝 길었는지 평소보다 이마를 더 덮은 게 어색하면서도 자연스러워 보기 좋았다. 소희는 깜짝 놀래켜 주려고 일부러 김 실장님께 문과 가까운 곳에서 기다리고 계시라 하고, 자신은 조금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그가 나온 것을 확인하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려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지겸의 시선은 놀랍게도 바로 소희를 향해 있었다.
“임소희.”
조금 떨어져 있어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그의 입 모양은 분명하게 소희를 부르고 있었다. 자신을 향해 부드럽게 휘어진 그 눈매가 너무 다정해서, 바보 같이 울컥했다. 지겸이 다가오는 그녀를 향해 두 팔을 벌렸다. 소희도 지체없이 그 가슴에 안겼다. 따뜻해. 이 남자의 품은 늘 이렇다.
“나 있는 거 어떻게 알았어요?”
“나오자마자 너밖에 안 보이던걸. 그걸 어떻게 몰라.”
지겸이 소희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그나저나 오지 말라고 했더니 꼭 이렇게 말을 안 듣지, 응?”
“보고 싶은데 어떻게 해….”
“뭐…?”
지겸이 제 품에 안긴 소희의 턱을 부드럽게 감싸 올렸다. 빈틈없이 마주한 두 사람의 눈동자가 서로를 보듬었다.
쪽.
눈가에 내려앉은 그의 입맞춤이 간지러워서, 소희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하여튼 거짓말도 잘하지, 우리 소희는.”
지겸은 사실 아직도 별로 믿기지 않는다. 소희가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의 고백에 대답해 주고, 먼저 기대어 주고, 꽤 많은 밤을 함께했는데도. 자신의 품에 이렇게 거리낌 없이 안기는 여자가 너무 벅차서 가슴이 뻐근해질 때가 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행복해서 꿈이라면, 아니 차라리 모든 게 거짓말이었으면 하는 이 불안하고 모순적인 마음을 아마 이 여자는 평생 모르겠지.
“그게 왜 거짓말이에요.”
피. 뾰로통한 표정을 짓자, 지겸이 그녀의 손에 제 손을 깍지껴 잡으며 낮은 웃음소리를 흘린다.
“그냥. 아직도 난 그래.”
사람은 누군가가 너무 좋으면 두려움이 앞선다. 잃어버릴까 겁부터 나는 거다. 대상에 대한 집착은 바로 거기서 온다. 하지만 지겸은 이제 그 결핍조차 끌어안을 수 있을 것 같다. 옆에 이 여자가 있든 없든, 제 마음이 변할 리는 없으니까.
그러니까 소희는 이제 소희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된다. 자신의 애정이 그녀에게 속박이 되지 않기를 바랐다.
“가자, 집에 데려다줄게.”
김 실장에게 키를 건네받은 지겸이 보조석에 앉은 소희의 안전띠를 단단히 매어주며 말했다.
“우리 집요?”
소희가 짐짓 당황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그럼. 열두 시가 훨씬 넘은 시각에 어딜 가게. 다 큰 아가씨가.”
지겸이 소희의 뺨을 손등으로 살살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상하게 코끝이 찡했다. 앉아서 맞붙인 무릎 주변이 간지럽다. 소희가 일부러 어미를 끌며 은근하게 답했다.
“으음… 좋아하는 남자 집에?”
다 큰 아가씨니까, 이 늦은 시간에 갈 수 있는 거죠.
하. 남자의 짙은 눈매가 가느다랗게 좁혀든다.
소희가 제일 좋아하는 지겸의 표정. 두근. 심장께가 간지럽다. 순간 그녀가 지겸의 팔뚝을 잡아 자기 쪽으로 홱 끌어당겼다. 그리고 그의 입술에 제 입술을 살며시 부딪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