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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강탈-94화 (94/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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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검찰에서 압수수색을 왜….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구 회장이 그제야 방 안에 있는 지겸을 떠올렸다. 당했다. 그놈 짓이구나. 손을 부들부들 떨며 구 회장은 우선 회사 법무팀에 연락해 대응할 것을 지시했다.

회사 내부 자료야 중요한 것들은 대부분 정리해서 아무리 수색해 봐도 검찰에서도 크게 건질 게 없을 것이다. 하지만 미처 폐기하지 못하고 남아 있는 것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지겸이 가지고 있는 자료가 넘어간다면…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지훈이 잡았다고 한순간 소희 그년을 가지고 협박하고 더 밀어붙여야 했는데. 후회가 막심하다. 그래도 아직은 기회가 있을 거다. 그녀가 제 손아귀에 있는 한.

그나저나 구지훈 이 자식은 왜 아까부터 전화가 안 돼.

구 회장이 신경질을 내며 거듭 전화를 걸었다. 통화 연결음이 계속될수록 초조해졌다. 소희를 감시하고 있던 놈 중 한 명도 연락이 되질 않았다. 불안했다. 순간 조금 전 봤던, 지겸의 터져 있던 입가가 뇌리를 스쳤다. 설마….

“어디 그렇게 급하게 전화를 거십니까.”

낮은 울림에 구 회장이 고개를 돌렸다. 지겸이었다. 통화내용이 혹시라도 방 안에 들릴까 봐 아예 가게 앞 정원에 나와 있던 참인데, 언제부터 제 뒤에 있던 것일까. 그는 차마 대답조차 하지 못했다. 손에 든 휴대폰에서는 여전히 받는 이 없는 신호음만 계속됐다.

피식, 그는 제 아들의 입가가 묘하게 휘어지는 걸 보았다.

“담배, 태우실래요?”

“…뭐?”

“초조할 땐 꼭 담배 피우시잖아요.”

구 회장이 지겸의 시선을 따라 제 손을 봤다. 전화기를 든 손은 물론 안 든 손도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낭패다.

지겸이 담뱃갑을 내밀었다.

자신이 그랬던가. 구 회장의 눈이 지겸의 얼굴과 그가 내민 담배 사이를 오가며 흔들렸다. 제 여자가 잡혀 있는데 저리 여유로운 표정일 리가 없다. 지겸은 어느 때보다 평온해 보였다. 구 회장은 이미 자신의 완벽한 패배를 직감하면서도, 차마 믿기가 어려웠다. 고민하던 그가 지겸이 내민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너야말로 담배를 태웠더냐….”

아버지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지겸이 느긋하게 답했다.

“아버지가 가르쳐주셨는데, 기억 안 나십니까.”

“…내가?”

지겸이 15살 때였나, 8학년이었으니까. 아버지가 미국 법인 일로 출장 오신 김에 그에게 들렀었다. 당시 그는 홀로 유학 중이었고, 지겸이 살던 동네에서 20분 정도 차로 달리면 자그마한 한국식당이 나왔다. 고기부터 찌개류, 분식까지. 없는 메뉴가 없는 곳이었다.

돌솥비빔밥. 몇 달 만에 먹어보는 한국 음식이었다. 지겸의 학교는 미국 대통령 여럿이 다녔을 정도로 유서 깊은 보딩 스쿨이어서, 모든 학생이 반드시 기숙사 생활을 해야 했고 외출도 제한적이었다. 카페테리아에서 거의 호텔 수준의 음식이 나왔지만 전부 양식이었다. 가끔 중식이나 일식 종류는 나왔지만, 한식은 구경해 본 적도 없었다.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가게라지만 모든 미국 식당들이 그렇듯 고추장 양념은 맵기보다 단맛이 강했다. 밥을 섞어 맛을 본 아버지는 고추장 양념을 한 종지 더 시켰다. 그걸 보고 얼른 지겸도 따라 시켰다. 아버지와 아들은 말없이 뜨겁게 달궈진 돌판 위에 밥과 채소, 고기, 양념장을 잘 섞어가며 짓눌렀다. 치직, 하고 밥이 구워지는 소리와 함께 고소하고 달직한 참기름 냄새가 지겸의 코끝을 휘감았다. 오랜만에 입 안 가득 군침이 돌았다. 자신도 모르게 정신없이 떠먹고 있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아버지가 자신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안 맵냐.”

지겸은 제법 빨간 자신의 밥을 쳐다보다가 다시 한 입 더 떠 입에 넣으며 답했다.

“네.”

아버지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휘어 올라갔다. 지겸이 기억하는 한 그가 지금껏 본 중 가장 인자한 미소였다.

“넌 매운 거 좋아하는구나. 지훈이는 아예 못 먹던데.”

그건 날 닮았나 보군.

들릴 듯 안 들릴 듯 작게 흘린 말이었다. 그러고 아버지는 식사를 다 마칠 때까지 한마디도 더 하지 않았다. 하지만 배 속을 훈훈하게 덥히는 돌솥밥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그날따라 양념장을 너무 많이 넣은 탓이었는지. 지겸은 이상할 정도로 전신이 뜨끈해지더니 코끝이 찡했다.

배가 오랜만에 든든하니 벌써 나른해졌다. 밥을 먹고 나와서 기지개를 크게 켜는데, 아버지가 담배를 피우다가 그를 돌아봤다.

“너도 한 모금 줘볼까?”

“네? …네!”

아버지는 그냥 농담으로 한 말 같았지만, 괜스레 거절하기 싫었다. 지겸이 호기롭게 담배를 건네받아 입에 물었다. 깊숙이 빨아들였다가 어른들이 하듯 후, 하고 연기를 내뱉으려는데.

콜록콜록! 콜록, 윽.

메케한 냄새가 너무 독해서 눈이 시뻘게지고 목이 따가웠다. 기침을 몇 번 더 거듭하니 눈가에 눈물까지 맺혔다.

하하하. 그래, 독하지.

그런 지겸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아버지는 낮게 웃으며 그의 손에서 담배를 다시 가져갔다.

“어른이 돼도, 담배 같은 거 피우지 마라.”

그렇게 말하면서도 다시 담배를 한 모금 빨아들이는 그를 지겸은 멍하니 쳐다봤었다.

중독성 있는 건, 애초에 시작조차 안 하는 게 좋아.

덧붙인 아버지의 말은 지겸이 아닌 마치 그 자신을 향하는 혼잣말인 것만 같았다.

그 식사가 단둘이 하는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는 걸 그는 알까. 그런 날이 또 있기를 간절히 바랐던 적이 지겸에게도 있었다. 아버지는 줄곧 자신에게 매정했는데도.

지겸은 그 후로 몇 번 더 담배를 피워 보다가 말았다. 그리고 어른이 될 때까지도 더는 피우지 않았다.

부모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아이들은 제 어린 시절을 잘 기억한다. 기쁜 추억이건 슬픈 일이건 어린 시절 부모가 미친 영향은 그 자식의 삶에 평생토록 짙은 그림자를 드리운다.

지금 담배를 쥔 구 회장의 손은 그때보다 훨씬 더 주름이 자글자글했다. 아버지가 담배를 빨아들이다 내뱉자 옅은 연기가 공기 중에 흩어졌다.

“그 아이는, 이미 데리고 나온 거냐.”

“그럼 거기 그렇게 혼자 둘 줄 알았습니까.”

허어. 그에게서 자조감 섞인 한숨이 씁쓸한 미소와 함께 비어져 나왔다.

아들에게 완전히 당했구나. 인정하기 힘겨웠지만 구 회장은 지훈과 달리 상황 파악과 인정은 빠른 편이었다.

“설마 알파/오메가 판별 검사 허용범위 넓히는 법안… 추진하실 생각이셨어요?”

“…그랬지.”

지겸이 말도 안 되는 꿈을 꾸고 있던 아버지를 무감하게 쳐다봤다. 사람의 욕심은 왜 이리 끝이 없을까. 자신이 고삐를 당겨 쥐지 않았으면, 구 회장이 멈추지 않고 어디까지 갔을지 차마 상상도 되지 않는다.

“들어가시죠. 손님을 혼자 오래 계시게 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래, 그, 그러자.”

돌아서는 지겸을 따라 구 회장은 천천히 걸었다. 자신보다 한 뼘은 더 큰 아들의 뒷모습이 어색했다. 많이 봤던 뒷모습이었는데도 큰 나무 혹은 산을 올려다보는 기분. 깊은 허무함과 함께 오기가 밀려 올라왔다. 그렇게 아등바등 살았는데, 겨우 아들에게, 결국 저놈의 로열 알파에게. 저 벽이 그리도 높은 것이었던가.

“그래서 물었던 거냐, 어젯밤에.”

“뭘 말씀입니까.”

“후회하냐고, 물었던 것 말이다.”

구 회장은 이제야 어제 지겸이 와서 했던 이야기들이 단순히 소희 때문에 화가 나서가 아님을 알았다. 그동안 자신의 앞에서 무조건 참고 복종한다고 여겼던 모든 순간도 어쩌면 전부 착각이었을 수도 있다. 지겸은 훨씬 더 많은 것을 알고, 준비하고 있었던 거다. 그런 줄도 모르고 아들 앞에서 꼭두각시놀음했구나.

“글쎄요.”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어제 그 순간 지겸은 오롯이 아버지와 아들 사이로 돌아가고 싶었던 것 같다. 물론 그가 제 잘못을 인정하거나 그의 입에서 갑자기 아버지다운 발언이 나오리라 기대했던 건 아니다.

“그 생각은 여전하다. 난 최선을 다했어.”

구 회장이 그렇게 덧붙이자, 지겸이 뒤로 홱 돌아 쳐다봤다. 속을 꿰뚫는 것 같은 짙은 눈이 선득하다.

“압니다. 아버지의 최선이 다른 모두에게 최악이었을 뿐이겠죠.”

아버지와 아들의 그림자가 조그만 정원 위를 뒤따르다 곧 사라졌다. 아무것도 남지 않아 텅 빈 공간에는 작은 호수의 물소리만 남아 잔잔하게 흘렀다.

끝은 늘 그렇게, 아무도 모르는 사이 고요하고 잔잔하게 스며든다.

***

베논 제약과 재림의료원에 대한 검찰수사가 대대적으로 진행됐다. 언론은 연일 앞다투어 이들의 기사를 다뤘다. 구 회장이 예상했듯 검찰 압수수색에선 특별히 그들의 범죄사실을 입증할 증거를 찾지 못했지만, 지겸이 그동안 모아온 증거와 선영원 전 원장, 관련 연구원들과 직접 우성 형질 강화 시술을 받았던 사람들의 증언으로 구 회장과 구지훈 전무, 임 재단장과 관련 의료팀 등이 줄줄이 구속됐다.

무엇보다 자신이 선영원 출신임을 밝히고 모든 걸 솔직하게 털어놓은 민주영 아나운서의 공개 인터뷰는 사회적으로 큰 이슈를 불러일으켰다. 어린 시절 그녀와 선영원 친구들이 우성 강화 시술을 받았고, 그로 인해 여러 부작용을 겪었다는 이야기는 모두에게 충격을 줬다. 시민단체들의 시위와 항의도 연일 계속됐다.

이러한 심각한 분위기 속에서 법원에서는 구속적부심이 진행됐으나 혐의가 과중한 데다 도주 및 증거 인멸의 우려가 크다고 판단돼 기각됐다.

자신의 죄를 일찍이 자백한 임 재단장과 다르게 구 회장은 일관되게 무죄를 주장했다. 법정 공판을 앞두고 검찰은 치열하게 기소 사실을 거듭 확인했다. 보강 증거의 확보를 위한 전방위적인 수사력의 투입도 이뤄졌다. 물론 이 과정에서 지겸의 역할이 컸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베논 제약과 재림의료원이 법적으로 금지된 의료 시술을 했다는 사실보다도 더 주요한 쟁점은 선영원 아이들의 죽음과 불법 임상 시험 간의 연관성이었다. 이 둘 사이의 연관성이 입증되면 구 회장의 죄목에 살인죄가 추가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1차 공판을 앞둔 어느 날, 베논 제약 국내 법인 정리 문제로 바쁘던 지겸에게 전화가 왔다. 검찰과 법원의 상황을 파악하러 갔던 김 실장이었다.

“네, 김 실장님. 아버지는 여전히 묵묵부답입니까? 혹시나 뭐든 새로운….”

- 도련님, 구 전무님이….

“형은 왜요?”

- 변호인 접견 중에 정신을 잃고 쓰러져서 지금 병원으로 이송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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