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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회장과의 전화를 끊은 지훈이 주차한 차에서 내렸다. 그는 방금 소희를 인천 호텔에 데려다 두고 집에 돌아오는 참이었다. 분명 아버지가 시킨 대로 처리했고, 자신이 제안한 대로 그녀는 고분고분히 따랐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어딘가 찝찝한 기분이 남았다. 빌딩이나 주식 등 꽤 큰 재산을 유정에게 넘기게 됐지만,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차피 베논 제약 자체가 자신의 것이 될 테니까.
그럼 묘하게 달라진 소희의 표정과 태도 때문인가. 그동안 그녀에게서 가장 맘에 들었던 부분은 제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원래 성격인지 아니면 일부러 참는 것인지, 자신이 뭘 물어보기 전에는 굳이 먼저 화젯거리를 꺼내지도 않았다.
몇 번 같이 자고 나면 대단한 애인이라도 된 듯 직장이나 가족 관련된 하소연에, 온종일 지가 먹은 메뉴까지 조잘대는 여자들이 제일 피곤하다. 그들과 달리 날 세우지 않고 약혼자인데도 깔끔하게 선을 지키는 소희의 태도는 제법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오늘 그녀는 대놓고 자신을 무시했다. 정말 아무런 관심도,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 무감하게 행동하고 말하는 모습이 거슬렸다. 자존심도 상했지만, 기분이 더 더러운 건, 자신에게 그랬던 소희가 지겸 앞에서는 다를 거라는 부분이었다. 인천으로 가는 차 안에서 내내 두 사람 사이의 일을 상상하다 보니 제 기분은 점점 더 꼬여갔다. 질투심이 들끓었다. 아버지의 당부만 아니었으면 당장 그 호텔 방에서 어떻게라도 했을 게 뻔하다.
로열 알파로 발현한 이후 자신은 늘 이런 식이었다. 제 안에 쌓여만 가는 어두운 욕망이 주체가 잘되지 않았다. 여자들을 만나 풀어도 잠깐일 뿐, 해갈되지 않는 무언가가 늘 속에 묵직하게 남아 내장을 휘젓고 다니는 것만 같았다.
어느 순간부터는 관계를 가질 때 가학적으로 하지 않으면 제대로 발기조차 되지 않았다. 말로든 행동으로든 상대방을 깔고 뭉개기 시작하면 그제야 조금씩 몸에 쾌감이 돌았다. 수치스러움에 떨며 빨개지는 여자들의 얼굴, 눈가에 맺히는 눈물. 앙앙 울면서도 좋다고, 제발 더해 달라고 빌며 자신을 끌어안을 때, 지훈은 말 못 할 희열에 떨고는 했다.
누군가는 그에게 BDSM적인 성향인 것 같다며 파트너를 구해 보라고 조언하기도 했다. 몇 번 시도해 봤으나 꾸며진 연출 안에서의 안정적인 플레이는 시시하고 제 입맛에 별로 맞지 않았다. 지훈이 즐기는 건 정제되지 않은 욕망을 분출하며 그 속에서 누군가가 철저히 무너지는 모습을 보는 것이었다. 상대방을 보호해 줄 세이프 워드라니. 그딴 건 재미없지. 그러니까 이건 단순한 성적 취향의 문제는 아니다.
지훈은 아쉬운 마음에 입맛을 다시며 머리를 굴려봤다. 그래도 임소희, 걔를 한 번쯤은 먹어보고 싶은데. 그러려면 지금 이 상황이 그나마 기회 아닌…. 어. 어어?
엘리베이터에서 나와 현관문 앞에 선 지훈이 당황한 눈으로 복도에 기대 서 있던 남자를 쳐다본다. 복도 불이 나간 것인지 평소보다 더 어두운 듯한 조명 속에서 미동조차 않는 지겸을 마주한 지훈의 심장이 거세게 뛴다.
“이 시간에 여, 여긴 무슨 일이야?”
제 발 저린 지훈이 지겸의 눈은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한 채 물었다. 목소리는 여유 있는 척 꾸며댔지만 이런 분위기를 풍기는 동생은 처음인지라 긴장됐다. 마치 조금 전의 음습한 속마음까지 전부 들키기라도 한 것 같다.
“진심으로 몰라서, 묻는 거야?”
낮게 깔린 지겸의 목소리가 욕을 짓씹듯 억눌려 나왔다. 지훈이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알았으면 무, 물어봤겠냐. 우리 일단 들어가서 얘기하…. 흐억.”
“입 닥치고 문이나 열어.”
지훈의 멱살을 잡은 지겸의 손이 바륵 떨렸다. 지훈도 큭, 소리를 내더니 입을 다물었다.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르는 손이 형편없이 떨린다. 두세 번의 실패 끝에 겨우 성공. 현관문이 열리자마자 지겸이 멱살을 잡은 손에 더 힘을 줘 그를 현관 안쪽으로 패대기쳤다.
“야 왜, 왜 이래. 너답지 않게, 마, 말로….”
바닥에 내쳐진 곳을 손으로 문지르며 지훈이 몸을 슬쩍 일으키려 하는데 순식간에 지겸의 주먹이 날아왔다.
퍽.
“나다운 게 뭔데.”
갑작스러운 충격에 지훈이 다시 균형을 잃고 쓰러졌다. 둔탁한 소리가 집 안에 울렸다.
“억.”
퍽. 시야가 흐릿해져 눈을 껌뻑이는데 또 한 대가 날아온다. 지훈은 쿨럭대며 몸을 꿈틀거렸다. 귀를 같이 맞았는지 주변의 소리가 웅웅댄다.
“아버지랑 형이 무슨 짓을 하든 병신같이 보고만 있는 거? 어?”
지겸이 한 대 더 치기 위해 주먹을 치켜드는 순간 지훈이 제 얼굴을 감싸며 외쳤다.
“소희! 너 지금 임소희 때문에 온 거 아, 아냐?”
그의 입에서 나온 소희의 이름에 지겸이 잠깐 흠칫한다. 그 모습을 보고 지훈이 낄낄 웃었다. 어깨를 불규칙하게 들썩이다 터진 입술에서 난 피를 팔로 쓰윽 닦았다.
“어디 있는지 들으려면 빌어도 시원치 않을 판에 주먹질부터 해 대고. 돌았네, 씨발새끼가… 컥!”
하지만 지훈이 미처 일어나기도 전에 다시 지겸의 주먹이 날아왔다. 이번엔 지훈도 팔을 들어 막으려 했으나 순식간에 몸을 숙인 지겸이 더 안쪽으로 파고들어 단숨에 팔을 뻗어 쳤다. 제대로 대항도 하지 못한 채, 겨우 주먹질 몇 번에 지훈의 얼굴 여기저기가 까지고 부었다. 입 안도 터졌는지 비릿한 피 맛이 감돌았다.
“퉤! 아 씨… 미쳤어? 어디 뒀는지 얘기해 줄 생각도 없었지만 니가 이런 식으로 나오면 걔한테 무슨 일 생길지 걱정도 안 돼? 어?”
그런 지훈을 한심하단 듯 노려보던 지겸이 한숨을 내쉬며 마른세수를 거듭한다. 그의 손등도 까져 군데군데 피가 묻어 있다.
“인천 ㅇㅇ호텔 별관 디럭스 풀빌라 B동.”
“…뭐?”
소희가 머무는 곳을 정확하게 짚어낸 지겸에게 당황한 지훈이 더 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지 입만 달싹거렸다.
“왜. 언제까지 우리가 너랑 아버지 손에 놀아날 줄만 알았어? 이미 주변에 경찰들 대기 중이야. 호텔 별관과 이어지는 8층엔 내 사람들 깔아놨고.”
덧붙인 지겸의 말에 지훈의 얼굴이 굳었다.
“그럼 내가 그 정도 대비도 없이 소희가 잡혀 있는데 너한테 먼저 왔을 것 같아?”
지훈은 절망적이었다. 제대로 덫을 쳤다고 좋아했는데 오히려 함정에 빠진 건 자신과 아버지였다.
“구지훈. 네가 소희한테 한 짓, 그거 감금죄야.”
“감금? 야, 임소희 그년이 친구 생각한다고 오지랖 부리면서 저 발로 직접 내 차 타고 호텔까지 갔는데. 그게 어떻게 감금이지?”
무슨 문제가 있겠냐며 자신만만한 표정인 지훈의 얼굴 앞으로 지겸이 제 휴대폰을 들이밀고 녹음된 음성 파일을 틀었다.
[대신 조건이 있어.]
[지금… 결국 협박하는 거예요?]
[네가 너무 망설이니까. 분명한 답이 눈앞에 있는데도 말이지.]
[휴대폰은 내가 가지고 있을게.]
[아, 그 사람들은 풀빌라 안에 다른 방에 상주할 거야. 네 가방은 내가 며칠만 갖고 있을게? 나도 네가 무슨 짓 할지 몰라서.]
[자, 잠깐! 이건 애초에 말했던 거랑 다르잖아. 분명 나한테 혼자 있으면 된다고 하지 않았어요?]
카페에서부터 호텔까지 오는 동안 소희와 지훈이 나눴던 대화 전부가 녹음되어 있었다.
“어, 어떻게 이런…. 그년 그거 다 녹음하고 있었던 거야? 아니, 근데 전화기는 내가 뺏었는데 대체 무슨 수로?”
툭, 툭. 지겸이 제 왼쪽 손목에 찬 시계를 손가락으로 몇 번 치며 가리켰다.
그러고 보니 지훈은 카페에서나 차 안에서 소희가 자주 제 시계를 만지작거리는 걸 스치듯 본 것 같았다. 딱히 스마트 워치처럼 생기지도 않았길래 신경 안 썼더니…. 이렇게 뒤통수를 맞을 줄이야. 지훈의 낯빛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지만 애써 숨기며 발끈했다.
“그렇다 해도 겨우 이걸로는 나한테 아무것도 걸고넘어질 수 없을걸? 우리나라 법이 그렇게 허술한 줄 아냐?”
“그러게. 생각보다 허술하지 않더라, 다행히도. 게다가 소희가… 다른 것도 보내줬거든.”
지겸이 다음 녹음 파일을 연이어 틀었다.
[그럼 저는… 2박 3일 동안 나가고 싶어도 못 나가고 여기만 갇혀 있어야 하는 건가요?]
[그렇지. 다 알면서 서로 피곤한 짓 하지 말죠, 아가씨도. 아, 먹고 싶은 거 있음 뭐든 시키라고 하던데. 우리 거 시키는 김에 뭐 좀 시켜주리?]
[아니요, 생각 없어요. 그보다 좀 전에 그, 구지훈 전무. 그 사람이 시킨 건가요? 절 여기 가두고 못 나가게 하라고?]
[아 그렇다니까. 몇 번을 말해. 서로 피차 조용히 있죠. 난 시끄러운 건 질색이라.]
소희의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으나 꽤 분명했다. 대화를 녹음해 증거로 남기기 위해 부러 묻고 대답을 들은 거라 한마디 한마디가 조심스럽다. 들키면 안 될 테니 더욱 긴장했겠지. 그런 그녀의 대화 내용을 듣는 것만으로도 지겸의 미간이 구겨졌다. 소희가 아직 저런 놈들이랑 한 공간에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사실 견디기 힘겹다.
“아무리 그, 그래도 호텔에서 편안히 있고, 저 사람들도 옆방에서 그냥 지키고만 있을 뿐 걔한테 아무 짓도 안 했는데. 그걸로 뭐!”
목소리가 마구 떨리는 지훈에 비해 지겸은 몹시 안정적이다. 이 모든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이.
“아니, 좀 알아봤는데. 사람이 일정한 범위 안에서 행동의 자유가 있더라도 다른 사람의 지배와 감시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경우, 본인의 신체적 활동의 자유를 침해당한 게 확실하면 감금죄가 맞아. 소희가 녹음한 대화 파일만으로도 증거 충분해. 향후 진술로 보충하면 되고.”
“지, 지겸아- 알잖아. 솔직히 난 아,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야.”
지겸에게 맞아 눈은 붓고 얼굴이 피떡이 됐는데도 바닥에 쭈그린 지훈은 어떻게든 자기라도 빠져나가려 애쓰는 기색이었다. 겨우 감금죄 가지고. 이제 시작일 뿐인데. 지겸의 입가에 조소가 어렸다.
“그런 얘긴, 경찰서에 가서 하고. 옷 벗어.”
“오, 옷…?”
지훈의 눈빛이 하염없이 흔들렸다.
“너 지금 그러고 인천 다녀온 거 아니야?”
지훈이 자신이 뭘 입었나 위아래로 훑어봤다. 정장 바지에 옅은 파란색의 드레스 셔츠. 그렇기야 한데….
“너랑 얘기하느라 시간 더 지체하기 싫으니까 당장 벗어.”
아. 그제야 지훈도 머리가 돌았다. 지겸은 소희를 데리러 가면서 자신인 척하려는 거다. 호텔의 감시자들이 오늘 이미 지훈을 본 터라, 같은 옷을 입고 가면 의심을 덜 살 것이다.
지훈은 셔츠와 바지를 천천히 벗는 척 뒤돌았다가 주머니 속에서 제 휴대폰을 꺼내 얼른 전화를 걸었다. 지금 호텔에 있는 감시자 중 한 명에게. 띠리링 띠리링, 신호가 가는 소리가 울리고 긴장한 지훈이 슬쩍 뒤를 보는 순간, 지겸과 눈이 마주쳤다. 놀란 지훈은 휴대폰을 떨어뜨릴 뻔했다.
“어디다 걸어?”
지겸의 느른한 시선이 지훈에게 명확하게 꽂혀 든다. 당장이라도 휴대폰을 빼앗을 줄 알았는데, 지겸은 가만히 서 있다.
“어… 그, 그게.”
오히려 당황한 지훈이 전화기를 든 손을 마구 떨었다.
하아. 그 모습을 보는 지겸에게서 깊은 한숨이 뱉어졌다. 그가 주머니에서 약통을 꺼내 지훈 쪽으로 던진다. 그걸 얼떨결에 받아든 지훈의 눈동자에 당황과 의문이 동시에 비친다. 뚜껑을 여니 연두색 알약이 가득 들어있다. 지훈에게 무척 낯익은 약이었다. 10년 정도 꾸준히 복용해 온 러트 사이클 억제제. 아버지가 매번 특별히 챙겨줬던 것. 이걸 왜 저 자식이 가지고 있지.
“그동안 네가 먹어온 약. 이게 뭔지 알아?”
- 여보세요?
질문과 동시에 전화가 연결됐다. 지훈은 순간 어찌할 줄 몰라 주춤거렸다.
지겸이 그런 지훈을 향해 고개를 가볍게 몇 번 내저었다. 제 얘기를 더 듣고 싶으면 어서 전화를 끊으라는 뜻.
“아, 아닙니다. 여, 여자는 잘 있습니까?”
- 네 뭐, 자기 방에서 안 나옵니다. 뭐 하실 말씀이라도?
“없습니다. 그, 그럼 끊어요.”
틱. 지훈이 싱겁게 전화를 끊고 제 손에 쥔 약을 빤히 보다가 다시 지겸을 응시했다. 머릿속이 복잡하다. 소희와 아버지 일로 정신없는 이 시점에 지겸은 왜 자신의 억제제를 들고 와서 이러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수없이 시술을 해 놓고선 정작 상상도 안 가나 봐?”
무슨 소리지. 지훈은 여전히 혼란스럽기만 하다.
피식, 지겸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어린다. 웃고 있지만, 어딘가 씁쓸한 표정.
“우성 형질 강화제야. 형이 10년 넘게 먹은 약.”
탕, 놀란 지훈이 떨어뜨린 약병이 마룻바닥에 떨어졌다. 데구르르…. 약병은 다시 지겸의 발 앞에까지 굴러갔다. 비틀거리던 지훈이 옆의 벽을 짚고 겨우 섰다. 상상도 못한 이야기에 충격을 받은 듯 얼굴은 이미 사색이 되어있었다.
“그 무슨…! 그러니까 이 야, 약이…. 그 말은 내가. 그게, 그….”
“맞아. 너, 로열 알파 아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