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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겸은 기억한다. 그날은 밤새도록 많은 비가 내렸다.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는 날이었다. 아니 사실 그맘때쯤 지겸은 제대로 잔 기억이 거의 없다. 개에 물린 상처는 아물었지만, 병원에서 얻은 트라우마로 침대에서는 아예 잠들지도 못했다. 그나마 소파나 바닥에서라도 웅크리고 있을라치면 자꾸 싸늘하던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랐다. 어려서 몰랐지만, 그때의 지겸은 착실히 병들어 가고 있었다. 아무도 모르게.
아버지는 귀가가 주로 늦는 편이었고, 지겸은 잠들기를 애쓰다 실패하면 책상 위의 램프를 약하게 틀어 놓고 책을 읽곤 했다. 보통 펼쳐 놓은 책의 반쯤 읽었을 즈음이면 퇴근하는 아버지의 인기척을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날은 아니었다. 고요한 거실엔 이따금 물을 마시러 나오는 비서 실장님의 소리만 간간이 들렸을 뿐. 창문을 거듭 때리는 빗소리가 잦아들기는커녕 어느새 천둥과 번개까지 소란스럽게 울려댔을 때였다.
“네 사장님. 지금요? 어디로 모시러 가면…. 양평 별장으로. 네, 알겠습니다.”
비서 실장님이 다급히 뛰어나가는 소리를 들었던 것 같기도 하고, 지겸은 읽던 책 위에 엎드려 빗소리를 배경으로 가물대다 잠들어버렸다.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깼을 때도 아버지는 집에 없었다.
그리고 저녁때쯤 작은아버지의 부고 소식을 전해 들었다. 놀란 지겸과 지훈이 장례식장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서야 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다. 겨우 하루 만에 무척 초췌해진 얼굴로.
“작은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날 밤. 아버진 어디… 계셨습니까?”
그건 지겸을 오래도록 괴롭혀 온 질문이었다. 말도 안 되는 추측이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멈추려고 해도 그 밤의 모든 것이 오싹하게 남아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천둥소리조차 어떤 신호였던 것만 같아서.
“그게 대체… 왜 궁금하냐.”
이제 와서. 20년이나 지난 일을.
눈에 띌 정도로 굳어진 제 아버지의 표정을 살피며 지겸이 말을 이었다.
“모두가 의아해했죠. 부검도 하지 않고 자살로 단정 지어 버리셨으니. 그것도 유일한 혈육인 그 형이 직접.”
그때야 지겸도 어려서 잘 몰랐지만, 지나고 성인이 되어 살펴보니 정황상 다른 여러 사인을 의심해 볼 만한데도 아버지는 서둘러 상황을 정리한 것처럼 보였다.
“그 녀석이 남긴 유서가 있었어. 너도 들어서 알지 않느냐.”
“아, 유서…요.”
양평 별장에 작은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메모를 남긴 것은 사실이다. 비관적이고 죽음을 연상시킬 수 있을 정도로 우울한 내용이 담겨 있었던 것도. 하지만 여러 가지로 해석의 여지가 충분한 추상적인 내용에 불과했을 뿐, 자살로 확정 짓기 어려웠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날 그곳엔 그놈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경찰 조사도 다 끝난 내용이야. 나는….”
구 회장은 무엇을 떠올리는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래, 전날 밤늦게까지 그곳에 함께 있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다야. 당최 내가 이걸 왜 너한테 설명하고 있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아버지가 직접 죽인 것까진 아닐지라도, 과연 그가 작은아버지의 죽음과 전혀 무관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다 해도 그 밤, 양평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신은 평생 알 길이 없겠지.
지겸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후회하지 않으십니까.”
고개를 들어 제 아들을 쳐다보는 아버지의 눈빛은 여전히 차갑고, 오만하다. 그러나 아주 조금 불안한 기색이 그의 눈동자 안에 엿보이는 것 같았다면 자신의 착각일까.
“…뭐?”
어머니 일. 작은아버지, 저희 형제에 대한 것까지. 당신이 해 온 모든 선택을.
“아니, 후회하지 않는다. 뭘 묻는 건지 모르겠지만, 과거로 되돌아간다고 해도 난 그렇게 할 거야. 내가 베논을 여기까지 키운 거다. 누구도 나만큼 할 수 없었어. 앞으로도.”
그 말은 마치 지겸에게 하는 소리가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다짐으로 들렸다.
피식, 지겸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잠시 머물렀다.
“다행이네요. 그 생각, 변치 마십시오.”
절대로.
끝까지.
***
지겸이 나가고 난 뒤 구 회장은 창밖을 바라보며 한참을 서 있었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죽은 동생에 대한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때 책상 위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지훈이었다.
“그래. 잘 정리됐냐.”
- 네. 휴대폰이랑 소지품도 제가 다 갖고 있고요. 아버지가 보내신 사람들이 교대로 지킬 겁니다.
“혹시 지겸이한테서는 따로 연락 없고?”
- 지겸…이요? 없는데…. 왜요?
그러고 보니 지훈은 이제야 소희를 인천에 데려다 놓고 왔다고 했다. 그런데 지겸이 진작에 자신을 찾아온 걸 보면 생각보다 꽤 빨리 알아챈 것 같은데….
“아니다. 집이냐.”
- 방금 주차했어요.
“그래, 내일 저녁 약속 중요한 거 알지. 잘 준비해.”
애초에 정 의원을 만나는 일에 잡음이 없게 하려고 벌인 짓이었다. 얼마나 오래 공들인 일인데. 지겸이 녀석 때문에 이제 와 모든 걸 망칠 수는 없다.
구 회장은 현재 불법인 알파/오메가 형질 판단 혈액 검사를 멈추긴커녕 그 법적 허용 범위를 오히려 늘릴 계획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베논 제약의 위상은 물론, 회사 가치도 더 올라가겠지. 인권단체 등에서 들고일어날 수도 있지만 이미 국내에 힘 좀 쓴다는 사람치고 자신의 도움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니 별일 없겠지.
베논 제약의 선대 회장, 구 회장의 아버지이자 지겸, 지훈 형제의 할아버지는 그가 열성에 가까운 알파라는 게 밝혀지자마자 모든 태도를 바꿨다. 베논 제약을 이끌어갈 차기 후계자로서, 집안의 첫째 아들로서 대우하고 치켜세웠던 건 모두 그가 로열 알파로 발현할 거라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로열 알파가 아닌 자신은 그에게 별 효용이 없어졌던 것이고. 그때 자신이 겪어야 했던 박탈감은 아마 죽을 때까지 잊히지 않을 거다.
제 아비가 이젠 이 세상에 없다는 게 아쉽다. 이 모든 걸 직접 봤어야 했는데. 난다 긴다 하는 사람들이 베논 제약과 로열 알파도 아닌 자신에게 굽신대는 모습을.
지겸이 대체 뭘 계획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전부 멈추게 할 수 있는 손쉬운 방법을 알고 있다. 이미 제 손아귀에 들어온 그 아이, 임소희. 필요하다면 그 여자애의 목숨이라도 걸고넘어질 생각이다. 죽이겠다고 하면 지겸이 뭘 더 어쩌겠는가. 제 뜻을 따를 수밖에. 언제나처럼 고분고분하게.
힘이라는 건 별게 아니다. 그저 원하는 때 원하는 사람을 마음껏 컨트롤할 수 있다는 것. 지금의 자신처럼.
여전히 모든 것은 구 회장이 손에 쥔 실 끝에서 그가 바라는 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한 편의 만족스러운 인형극이 따로 없다.
그가 사무실 한편의 와인 셀러로 가서 레드와인을 한 병 꺼냈다. 아내와 동생이 좋아하던 그 와인. 제 잔을 가득 채우는 선연한 붉은 빛이 불쾌하고 동시에 기껍다. 20년 만인가. 이 와인을 입에 대는 게.
원래는 내일 정 의원과의 만남이 성공적으로 돌아가면 따려던 계획이었지만 모든 게 완벽하게 진행될 게 뻔한데 굳이 지체할 필요는 없을 거다.
호륵. 구 회장이 혀끝에 감기는 꽃 향 가득한 산미를 천천히 음미하다 목구멍으로 넘긴다. 어쩐지 자꾸만 웃음이 튀어나왔다. 그가 한바탕 웃어 재낀 후에 책상 위에 놓아둔 다른 잔 두 개에 똑같이 와인을 따랐다. 챙, 챙. 부러 더 소리를 내어 제 잔과 부딪혀 축배를 든다.
“거봐, 내가 말했었지. 결국, 둘 다… 틀렸어.”
주인 없는 잔에 담긴 새빨간 액체는 조금 전 잔끼리 부딪혔던 진동이 남아 아주 미세하게 출렁였다.
***
완벽한 봄날이었다. 며칠 봄비가 계속 추적추적 내리다 말다 하더니 오늘은 무척 맑고 구름도 거의 없는 하늘은 제법 맑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시간대면 벌써 사위가 어둑해졌을 텐데 여전히 밝은 게 해도 꽤 길어진 것 같았다.
“오늘 표정이 좋으십니다.”
구 회장의 기사가 여느 때보다 입가에 짙은 미소를 띤 제 상사에게 안부를 건넸다.
“그런가?”
평소 같으면 쓸데없는 소리 말라고 한마디 했을 그였지만 오늘은 달랐다. 지겸, 그놈의 아들 녀석 때문에 조마조마하게 지냈던 몇 달이 우스워질 정도로. 이렇게 간단할 줄 알았으면 진작 그 여자애를 걸고넘어질 걸 그랬지. 사실 지겸이 이렇게 끝까지 집요하게 물고 늘어질 줄은 몰랐던 탓도 있다. 임 재단장을 생각하면 맘에 조금 걸리긴 하지만 자신이 지금껏 쌓아온 모든 게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는 것보다야 훨씬 낫다.
정 의원을 만나러 가는 길, 구 회장은 소희를 감시하고 있는 수하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베논을 운영하며 제 손이 직접 닿을 수 없는 일들이 생길 때마다 대신 처리해 주고 있는 조직의 일원이다.
“네, 네 회장님.”
“몇 시간 전에 보고한 대로 여전히 이상 없지?”
“예에…. 물, 물론입니다.”
“여자는 뭐 하고.”
그의 연락이 또 올 줄 몰라 늘어져 쉬던 중인지 갑작스레 분주한 소리가 들린다.
“아, 자기 방에 있어서. 지금 바로 확인해 볼까요?”
“됐어. 그보다 내가 별도로 지시하기 전까지 문제없게 잘해. 여차하면, 그때 말한 장소로 바로 이동시키고. 알겠나?”
“넵,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이번엔 지훈에게 전화를 거는데 받지 않는다. 또 어디서 쓸데없이 여자랑 뒹굴다가 늦어서 혼비백산하며 오고 있겠지. 한심한 자식.
그러는 사이 구 회장의 차가 한 일식집 앞에 도착했다. 오늘 같은 날을 위해 그가 아예 사들인 프라이빗한 요정이다. 일본의 고급 온천을 연상케 하는 고즈넉한 구조와 인테리어가 처음부터 그의 마음에 들었다.
작은 정원과 연못을 지나 느긋하게 안으로 들어서는데 머리를 한쪽으로 곱게 틀어 올리고 유카타를 차려입은 가게 주인이 잰걸음으로 마중을 나온다.
“그래, 말한 대로 준비는 빈틈없이 했지?”
“네, 회장님. 그리고 말씀하신 손님께서 방금 도착하셔서 안내해 드렸습니다. 아드님도 오셨고요.”
당황한 구 회장의 눈썹 끝이 치켜 올라갔다.
“벌써?”
이런, 낭패다. 약속 시각보다 20분이나 일찍 왔는데 이게 무슨 일인지. 그래도 이 일의 중요성은 파악한 모양인지 웬일로 지훈이 놈이 서둘러 와서 다행히 제 면목이 살았다.
구 회장은 놀라서 가장 안쪽 방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거의 뛰다시피 하는 그의 뒤를 급하게 뒤따르는 주인의 나막신이 바닥에 탁탁 부딪히는 소리가 거슬렸다. 정 의원에게 처음부터 좋은 인상을 줘야 하는데, 혹시 늦게 도착한 게 어색한 분위기를 만들까 봐 걱정이었다. 특히 지훈은 자기보다 윗사람을 대하는 센스가 워낙 부족하니 불안했다.
그를 보고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점원이 천천히 미닫이문을 열었다.
스르륵. 문이 열림과 동시에 안쪽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의외였다. 도란도란 나누는 대화 소리가 기대보다 정다웠다. 마음이 좀 놓였다.
구 회장은 구두를 대충 벗고 옷깃을 다듬은 후 일단 고개를 푹 숙이며 들어갔다.
“아이고 의원님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이렇게 일찍 오실 줄 알았으면 저도 더 서두를….”
“오셨습니까.”
순간 구 회장의 귓가에 퍽 익숙한 음성이 꽂혔다. 분명 제 아들의 목소리는 맞는데. 자신을 향한 말투나 느껴지는 평소 지훈이 갖던 무게감과 다르다. 불길한 예감에 순간적으로 전신이 빳빳하게 굳었다.
“허허. 괜찮아요, 어서 앉으시죠. 우리 먼저 한잔하고 있었습니다.”
구 회장이 고개를 드니 만면에 미소를 띤 정 의원이 먼저 보였다. 그는 제 옆에 앉은 젊은 남자의 이야기를 꽤 인자한 표정으로 듣고 있었다. 딱 봐도, 호감이 가득한 시선이었다.
“어서 앉으시죠, 아버지.”
자신을 마주한 남자의 곧은 눈매가 선뜩하다. 여유로운 입가 한쪽이 호선을 그리며 휘어진다. 그걸 바라보는 구 회장은 소름이 돋아 몸을 움찔했다.
어떻게 이럴 수가.
구 회장이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를 들키지 않으려고 서둘러 자리에 주저앉았다. 제멋대로 뛰는 심장이 쥐어짜이듯 아프고 갑갑하다. 그는 상황파악이 잘되지 않아 멍한 표정으로 제 앞의 두 사람을 다시 응시했다. 방 안은 시원한데도 이마에 벌써 식은땀이 맺혔다.
“아드님을 잘 두셨습니다, 구 회장님. 진중해 보이는데 은근 유쾌한 데가 있는 젊은이구먼.”
“아, 네. 네, 그, 그렇지요. 가, 감사합니다 의원님.”
정 의원은 심히 말을 더듬는 구 회장을 조금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봤다가 시선을 다시 옆으로 돌렸다.
그래, 지금 정 의원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은 제 아들이 맞았다.
지훈이 아니라, 지겸이었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