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신부강탈-89화 (89/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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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훈의 차 안에서 소희는 내내 불안하여 차라리 눈을 감고 자는 척을 했다. 어차피 유정을 위한 계약서도 이젠 제 가방에 들어 있으니 굳이 그를 상대하는 수고를 할 필요는 없을 거다. 지훈은 몇 번 소희에게 말을 걸었다가 대답도 미동도 하지 않자 더 이상 귀찮게 굴지 않았다.

그렇게 한 시간 가까이 달렸을까. 슬쩍 눈을 뜬 소희는 자신이 인천대교 위를 달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둑해진 하늘 아래 무지갯빛 조명이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 Y자를 거꾸로 세워 놓은 듯한 큰 구조물 아래를 지나며 겨우 몇 달 전 싱가포르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지겸과 이곳을 지났던 게 떠올랐다.

그날 이후 참 많은 게 달라졌다. 만약 지겸이 아니었다면 지금 제 옆의 남자와 결혼했겠지. 굳이 따져보지 않아도 얼마나 불행했을지 빤히 그려진다.

시야 아래 낮게 깔린 바다에는 드문드문 작은 배의 조명만 눈에 띄고 이 새까만 허공을 가로지르는 건 이 거대한 다리 하나뿐이다. 소희는 어쩐지 심장이 철렁했다. 건너지 말아야 할 곳을 건너가고 있는 묘한 기분. 자신이 너무 무모한 선택을 한 건 아닐까. 하지만….

지겸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 단단한 그의 품에 안긴 채 손끝으로 그의 등을 더듬어 온기를 느끼고 싶다. 그녀의 얼굴이나 몸 어디든 부드럽게 내려앉던 키스가 그립다. 원래대로였으면 오늘 만날 수 있었을 텐데. 여전히 불쾌한 지훈의 페로몬을 의식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소희는 이제는 퍽 익숙해진 지겸의 체향을 떠올리려 애썼다.

“여기야.”

인천의 한 호텔. 주말이라 그런지 가족 단위 손님이나 중국 관광객이 많이 눈에 띄었다. 지훈이 대신 체크인하는 걸 기다린 소희가 손을 내밀었다.

“이제 주세요.”

“뭘.”

“호텔 방 카드키. 여기서부터는 혼자 올라가도 되잖아요.”

지훈이 미간을 찌푸린다.

“너 설마, 나 의심해? 내가 너 따라가서 뭔 짓이라도 할까 봐?”

소희는 부정하지 않고 그저 시선을 외면했다. 눈도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이다. 대답이 없는 소희에게서 긍정을 읽어낸 지훈이 혀를 찼다.

“어이가 없네. 나야말로 널 뭘 믿고. 들어가는 척만 하고 다른 데 갈 수도 있는 건데. 지갑까지 뺏기 전에 얌전히 따라와.”

마지못해 그의 뒤를 따라 걸으며 소희는 제 왼쪽 손목의 시계를 톡, 톡 쳤다. 불안감을 조금이라도 덜어보려는 듯이.

엘리베이터를 타는 순간, 검은색 정장을 입은 키 큰 남자들이 함께 올랐다. 단순히 여행을 온 사람들 같지는 않고…. 그러고 보니 이 호텔에 국내에서 제일 큰 카지노가 있다고 들었던 것 같다.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인 걸까.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자신도 모르게 몸이 움츠러들었다. 게다가 그들이 소희와 같은 층에서 내리자 불안한 마음이 더욱 불어났다. 설마.

어두운 조도의 복도에는 옅은 녹색 카펫이 깔려 있었다. 지훈을 따라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는데 뒤따르는 남자들의 구둣발 소리가 신경 쓰였다. 그들의 목적지는 어디일까.

틱. 그때 전자음과 함께 등 뒤로 방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후. 소희가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괜한 걱정을 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잠시 멈췄던 걸음을 이어가자 다시 발소리가 따라온다. 여러 명이 내는 소리. 조금 전 그 남자들이 맞는 건지 확인해 보고 싶었다. 돌아볼까 고민했지만 겁이 나서 망설여졌다. 심장이 불안하게 쿵쾅거렸다. 그러는 중에 복도 끝에 다다랐다. 일정한 간격으로 보이던 방문들은 더 이상 보이지 않고, 복도 끝 투명한 문 너머, 새로운 통로가 이어져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네 뒤에, 그 사람들이 안내할 거야.”

“네…? 지금 뭐…!”

어떻게 된 건지 채 파악하지도 못한 사이 소희의 양쪽과 앞뒤로 남자들이 둘러쌌다. 탁. 당황한 소희가 핸드백을 떨어뜨렸다. 분명 방금 엘리베이터를 함께 탔던 사람들이 맞았다. 그녀의 몸에 손을 대거나 억지로 잡아끌지도 않았지만, 존재만으로도 압박감이 심했다.

“걱정하지 마. 워-낙 전문가들이셔서. 그냥 널 가장 안전하게 보호하려는 것뿐이니까.”

“그, 그게 무슨 소리예요?”

지훈이 입 한쪽을 당겨 비릿한 미소를 짓더니 바닥에 떨어진 소희의 가방을 주웠다.

“그래도 명색이 동생의 애인인데, 아무 호텔 방에서 재울 수 있나. 여기서 이어진 프라이빗 통로로 나가면 바로 별관이야. 디럭스 풀빌라로 예약했으니 편히 즐겨.”

당황한 소희의 두 눈이 커졌다. 별관은 또 뭐고 이 남자들은 뭐지. 그녀는 자신을 에스코트하는 건지 억지로 끌고 가려는 건지 모호한 태도의 남자들을 훑어봤다. 모두 네 명. 누가 봐도 깡패처럼 보일 정도로 인상이 험악하다.

“아, 그 사람들은 풀빌라 안의 다른 방에 상주할 테니 뭐든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하고. 가방은 내가 며칠만 갖고 있을게? 나도 네가 무슨 짓 할지 몰라서.”

“자, 잠깐! 이건 애초에 말했던 거랑 다르잖아. 분명 나한테 혼자 있으면 된다고 하지 않았어요?”

이 사람들이 같이 있으면 그게 무슨 호캉스인가. 감시, 아니 감금에 가깝지. 게다가 소지품까지 전부 가져가다니.

“그래, 혼자. 근데 네가 정말 가만히 있어 줄지 어떻게 알아. 그러니까 도움이 좀 필요한 거지. 오케이? 그럼 난 좀 바빠서. 내일모레 올게?”

소희의 가방을 달랑달랑 흔들더니 그가 홱 몸을 돌렸다.

“오빠! 지훈 오빠! 구지훈!”

그녀가 거듭 불렀지만, 지훈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졌다. 소희의 얼굴에 억울함과 후회가 동시에 떠올랐다. 예상했던 대로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정말 이럴 줄이야.

“가시죠.”

정중함을 가장한 남자들에게 이끌려 풀빌라로 가면서, 소희는 어쩔 수 없어 제 입술을 짓씹었다. 마구 짓눌린 입술 한 쪽이 터져 결국 피가 났는데도 그녀는 눈치채지 못했다.

***

조금 전까지만 해도 고요했던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생각보다 더 빠르긴 하지만 충분히 예상했던 방문. 구 회장은 의자에 더 편히 기대어 앉은 뒤 문 쪽을 느른하게 쳐다봤다.

“회장님께서 퇴근하실 때까지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하셔서요.”

죄송합니다. 막아서는 비서들의 다급한 목소리와 상관없이 무조건 들어가야 한다고 우기는 낮고 단호한 음성이 겹쳐 들렸다. 많이 흥분한 모양인지 어울리지 않게 욕설 같은 것도 섞여 있었다. 자식, 급하긴 급한가 보지. 구 회장의 입가에 미소라고 표현하기도 애매한 표정이 떠올랐다.

벌컥, 그때 문이 열리고 지겸이 성큼성큼 들어와 그의 앞에 섰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격양된 감정을 꾹꾹 눌러 애써 진정하고 말하려는 노력이 가상했다. 쉽게 흥분하지 않는 진중한 성격이 죽은 아내를 많이 닮았다. 그게 괜스레 거슬려 구 회장은 더 기분이 나빠졌다.

“원 참, 제 아비를 보러 와서는 용건부터 찾는 꼴이 뭐냐. 내가 널 그렇게 버릇없이 키우진 않았던 것 같은데.”

구 회장이 의자에 몸을 더 깊숙이 기대며 천천히 다리를 꼬았다. 과장된 여유로운 몸집에 지겸의 눈썹이 움찔했다. 책상을 짚은 그의 두 팔이 조금 떨리고 있었다.

“어떻게 소희한테…. 할 얘기가 있거나 필요한 게 있으시면 저한테 직접 하셨어야죠.”

“그럼 네가 들었겠냐? 요즘 내 말은 물론 그냥 존재 자체를 개똥으로 생각하는 네가 퍽이나 그랬겠어.”

구 회장이 우습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지겸이 눈을 질끈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 뭔가를 참는 기색이 역력하다.

“왜, 인제 보니 한 대 치겠구나?”

“안 그래도, 힘껏, 참는… 중, 입니다.”

하하하. 부들부들 떨리는 지겸의 주먹 쥔 손을 본 구 회장이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생각보다 재밌어. 네 놈이 어릴 때부터 궁금하긴 했다. 뭐 어린 녀석이 감정이 있긴 한 것인지. 착한 건지 아님 멍청한 건지. 지훈에게 다 뺏겨도, 내가 뭐라 해도 화 한번 안 내니 속을 알 수 없어 늘 꺼림칙했는데. 이러기도 하는구나.”

“그래서 저한테 바라시는 게 뭡니까.”

구 회장은 견고하던 아들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진 모습을 찬찬히 감상했다. 이 세상에 욕망에서 완벽히 자유로운 인간은 없다. 대상이 무엇이든, 그 욕망은 결국 약점이 된다. 자신이 지금껏 성공할 수 있었던 건 그런 다른 사람의 욕망을 적절히 이용하고 또 요리해 왔기 때문이다.

“아들에게 아비가 뭘 바라는 게 있겠냐. 그냥….”

“아버지. 다 뒤집어 엎어버리고 싶은데 참고 있는 것, 모르십니까.”

돌려 말하지 마시죠.

“그래서.”

구 회장의 입가에 비소가 어린다.

“네 놈이 안 참으면 어쩔 거냐.”

군데군데 핏줄이 터진 지겸의 눈가가 빨갛다.

“원하는 것 따위 없다. 그냥 얌전히 좀 있어라. 고분고분하던 놈이 요즘 너무 설치니 아비로서 거슬리는구나.”

“그게… 그게 답니까. 겨우 그런 것 때문에 지금…!”

쾅. 지겸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구 회장이 책상을 세게 내리쳤다.

“며칠만 좀 조용히 있어. 이렇게 찾아오지도 말고. 내 비위 상하면 너한테나 그 아이한테나 좋을 거 하나 없는 거. 알지?”

뭔가를 더 따지려던 지겸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나 표정 모두 분노로 여전히 부들부들 떨리는데, 속으로 삭이는 것 같았다.

억울하면서도 저렇게 속으로만 파고들지. 미련한 놈. 어릴 때와 차이 없는 아들의 모습을 구 회장이 감정이 결여된 눈으로 지켜봤다.

더는 말이 통하지 않을 걸 알고 회장실을 나가려던 지겸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화가 치솟지만, 최대한 억눌렀다.

“하나, 궁금한 게 있습니다.”

“뭐냐.”

아들의 진지한 목소리를 구 회장은 심드렁하게 받아쳤다.

“그날, 작은아버지 돌아가시기 전날 밤. 그때 대체 어디… 계셨어요?”

내내 여유롭던 제 아버지의 얼굴에 서서히 퍼지는 균열을, 지겸은 찬찬히 관찰했다.

구 회장은 착각하고 있다. 자신은 더 이상 어린 날의 구지겸이 아니다. 아버지와 형이 어떻게 하든, 그저 참고 기다리던 그 아이는 이미 오래전에 죽었다. 그러니까 그들은 지겸에 대해, 이제 아무것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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