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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한 침대에서 잠들고 일어나지 않아도, 소희와 지겸은 하루의 시작과 끝을 함께했다. 어젯밤엔 3시간도 넘게 통화했던가. 그저 좋아했던 영화 이야기, 학창 시절 추억과 같은 별것도 아닌 소소한 화제에도 두 사람은 서로 몰랐던 시간을 전부 채워가기라도 할 것처럼 열심히 묻고 답했다. 통화가 길어져도 지겸은 지친 기색이 없는데, 소희는 졸려서 비몽사몽한 상태로 겨우겨우 대답을 했던 것 같다.
스르륵 눈을 떴는데 귓가에 아직도 지겸의 목소리가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 기지개를 켜고 몸을 일으키는데 휴대폰이 울린다. 역시나 그 남자였다.
“나 일어났는지 어떻게 알고 전화했어요? 설마 방 어디 CCTV까지 설치해 둔 건 아니죠?”
아직 잠이 완전히 깨지 않아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를 듣고 지겸이 낮게 웃는다. 그 웃음에 소희의 가슴께가 간질거린다.
- 어제도 엊그제도 이 시간에 일어나던걸. 기계처럼 정확해서 놀랐어.
소희는 워낙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편인데, 요즘은 지겸 때문에 밤늦게 자느라 오히려 기상 시간이 늦어진 거다. 이제 곧 개강이니 이렇게 편안히 침대에 뭉개고 있을 수도 없겠지.
- 참. 아까 운동하고 오는 길에 현관문에 아침 걸어두고 왔어.
“응?”
놀란 소희가 비적비적 몸을 일으켜 나가 보니 정말이었다. 그래놀라와 과일, 자신이 좋아하는 크루아상. 빵은 아직도 따끈했다. 부지런도 하다. 대체 언제 이걸 다….
“온 김에 전화해서 깨우지 그랬어요.”
얼굴이나 보여주지.
튀어나오려던 속마음은 애써 숨겼다. 괜스레 부끄러워져서. 이런 밥보다 그 남자가 더 보고 싶었다고 하면, 당장이라도 달려올 걸 아니까.
- 고민했는데. 소희 네 얼굴 보게 되면, 일하러 가기 싫어질까 봐.
자세히는 얘기하지 못하지만, 베논 제약과 재림의료원 관련 일로 바쁜 걸 알고 있어서 소희는 더 묻지 못했다. 지겸도 그래서 더 조심하는 게 느껴졌다.
“오늘도 퇴근 늦어요?”
- 아마 그럴 것 같은데. 왜?
“아니… 그냥….”
서운함에 약간 불퉁한 목소리가 나왔다. 조용하던 지겸이 피식 웃는 소리가 들린다.
- 갈게, 밤에.
겨우 그 소리에 심장이 대책 없이 뛰기 시작한다. 제 감정을 들키기 싫어 호흡을 가다듬으며 대답을 고르는데 그에게서 먼저 낮은 한숨이 흘러나온다.
- 진짜 보고 싶다.
우리 소희.
소희도 같은 마음이었다. 너무 그래서 안달이 날 정도로. 생각해 보면 못 본 지 며칠 지난 것 같지도 않은데 왜 이러지. 그의 목소리로 듣는 제 이름이 너무 달아서 낯설다.
“…나도요. 안 자고 기다릴게….”
아무리 늦어도 꼭 보러 오라고, 소희는 그렇게 얘기하는 대신 조금 돌려 말해 본다. 어떻게 말해도 진심을 제대로 알아듣는 남자는 기분 좋은 웃음과 함께 한 번 더 약속하고 전화를 끊었다.
소희는 그가 사다 준 아침을 펼쳐 놓고 자신을 위해 새벽부터 서둘렀을 지겸의 모습을 떠올려 봤다. 풍겨오는 버터 향만큼이나 몽글몽글한 공기가 자신을 감싼다.
이거 먹고 속옷이나 새로 사러 갈까. 검은색, 좋아하는 것 같던….
혼자 생각의 나래를 펼치던 소희가 얼굴을 붉힌다.
지이이잉. 보나 마나 또 그 사람이겠지. 혼자 귀까지 빨개진 소희가 발신자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얼른 전화를 받았다.
“또 왜요. 나 아침 잘 먹는지 확인하려고 그러는 거죠? 안 그래도 지금 딱 먹으려던….”
- …임소희?
비슷하지만 다르다. 지겸에 대해서 잘 몰랐을 때야 헷갈렸던 적도 있지만, 이제는 아니다. 그제야 귀를 떼고 액정에 뜬 이름을 확인한 소희가 놀랐다.
“갑자기 무슨 일이에요?”
구지훈이었다. 지겸인 줄 알고 말랑해졌던 마음이 차갑게 식어 딱딱해진다.
- 오랜만인데 뭘 그렇게 뾰족해.
“전 별로 할 얘기도 들을 얘기도 없어요. 오빠 전화인 줄 알았으면 받지도 않았을 거고요.”
바로 끊으려던 소희를 지훈의 질문이 붙잡았다.
- 유정이는, 잘 지내?
감히 그 입에서 심드렁하게 친구의 이름이 나오는 게 못 견디게 화가 났다.
“궁금하면 저한테 이럴 게 아니고 직접 연락하셔야죠.”
- 그래서 말인데, 잠깐 볼 수 있을까?
“아니요.”
무슨 속셈인지는 몰라도 구지훈이 뭐라고 말하든 이제 고려할 대상도 아니었다. 무조건 피해야 할 사람이면 몰라도.
- 너무 이러니까 섭섭하네. 아무리 그래도 오랫동안 약혼자였던 사람한테.
또 그놈의 약혼자 소리. 정말 뻔뻔하기 그지없다.
“이만 끊을게요.”
쓸데없는 말을 더는 듣고 있기 싫었다. 그런데.
- 신유정 말이지, 회사에서도 아나?
“뭘…요?”
그의 입에서 친구의 이름이 나오자 소희는 차마 전화를 끊지 못했다.
- 임신한 거 말이야. 걔 여전히 낳을 생각인 거지?”
미련하게.
쉽지 않은 선택을 가볍게 매도하는 말이 욕설보다 더 거슬리고 화가 났다. 소희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뭐? 그건 왜요.”
- 아니, 언론계가 좀 좁아? 그래도, 거기는 자유로운 분위기니까. 싱글맘이라면 더 응원해 주겠지?
“지금 뭐 하는 짓이에요?”
- 내가 뭘. 사실대로 말하겠다는 건데.
“그걸 대체 왜. 무슨 자격으로요? 설마 지금 유정이 회사에 그런 얘길 퍼트리겠다는 거예요?”
소희의 목소리가 점차 격양되어갔다. 아무리 사람이 치사하고 못됐다고 해도 이 정도일 수 있을까. 대체 이런 비상식적인 소리를 얼마나 더 들어야 되는 거지. 너무 화가 나니 어이가 없었다.
- 아니 내가 유정이 생각해서, 아이 아버지 노릇도 좀 해 볼까 싶고. 그래서 친구인 네가 제일 상황 잘 알 테니 얘기라도 좀 나눠보고 싶은데 너무 단칼에 자르니까. 그럼 회사라도 찾아가서 사정 설명 좀 해야 하나 싶어서 그러지.
대체 또 왜 이러는지 몰라도 아무래도 지훈에겐 자신을 만나야 하는 이유가 있는 모양이었다. 정말로 더는 통화하기도 얘기를 들어주기도 싫었지만, 그의 입에서 유정이 거론되는 건 더 괴로웠다.
“아, 알겠어요! 만나면 되잖아요. 대신, 밖에서 만나요.”
- 집이 더 좋기는 한데… 뭐, 그래. 알겠어.
만나준다고 하지 않으면 계속 이렇게 나오겠지. 어쩔 수 없이 약속을 잡으면서도 소희는 계속 머리를 굴렸다. 섣불리 집과 같은 실내에서 만났다가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되도록 사람 많은 곳에서 만나자고 하는 게 나을 거다. 다른 이의 이목을 지나치게 신경 쓰는 사람이니, 외부에서 만나면 크게 걱정할 일도 일어나지 않을 테고. 무엇보다 김 실장님이 대기하고 계실 테니 여차하면 도움을 요청할 수 있다.
이런저런 생각을 정리한 후 소희는 집에서 크게 멀지 않은 카페에서 만나자고 답했다. 애초에 질 낮은 협박도 소희를 나오게 하기 위한 것에 불과했는지 지훈은 순순히 알겠다고 했다.
- 아, 설마 지겸이에게 쪼르르 얘기하고 나올 생각은 아니겠지? 그러면 재미없어.
네 친구를 위한 게 뭔지 잘 생각해 봐.
끔찍한 소리를 덧붙이는 건 잊지 않았지만.
***
소희는 김 실장님께는 일단 대학교 동창을 만난다고 했다. 오래 걸리지 않을 거라고 하자,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하셨다. 그 정도는 괜찮겠지. 너무 걱정할 테니 지겸에게는 끝나고 연락하자. 약속장소에 먼저 도착한 소희가 제 왼쪽 손목의 시계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딱 30분. 그 이상은 끌지 말자. 다행히 카페에는 손님이 거의 없었다.
“진짜 반갑네?”
털썩. 도착한 지훈이 그녀의 앞에 앉았다. 순간 놀란 소희가 눈앞의 남자를 바라봤다. 며칠을 보지 못해 그리운 사람과 지극히 닮은 얼굴. 예전처럼 거짓으로 안경도 쓰지 않으니 더더욱 지겸이 떠올랐다. 물론 이제는 자신이 두 사람을 헷갈릴 리가 없지만. 오히려 좋아하는 사람의 얼굴을 하고 비릿한 미소를 띤 지훈을 마주하자니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시간이 별로 없어서요. 유정이에 대해 무슨 얘기를 하자고 부른 거죠?”
소희가 일부러 그의 눈을 마주치지 않고 물었다.
“내가 너한테 무슨 짓이라도 해? 왜 이렇게 경계해. 커피라도 시키고 말하자고.”
“오빠랑 제가 마주 보고 차 마시며 서로 안부 나눌 사이는 아닌 것 같아서요.”
“허어. 너… 뭔가 좀 달라졌다?”
지훈이 소희를 위아래로 훑었다. 그동안 제 앞에선 얌전하고 조용하기만 했던 여자다. 그런데 지금은 자신을 노려보는 표정이나, 하고 싶은 말을 숨기지 않고 바로바로 탁탁 내뱉는 모양새가 맘에 들지 않았다. 믿는 구석이 있는 사람처럼 당당하고 여유로운 표정도 거슬렸다. 지훈의 속에 똬리를 튼 가학심이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소희가 이러는 게 다 지겸과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더 더러웠다.
“그냥 본론부터 말해요.”
소희는 지훈의 말은 잘 들리지도 않는 것인지 자꾸 시계를 보며 시간만 확인했다. 자존심이 상했다. 더 강하게 짓눌러 주고 싶었으나 그건 나중에 해야겠지. 지금은 아버지의 말씀대로 잘 꼬여내는 게 중요했다.
툭. 소희의 앞에 서류 봉투가 놓였다.
“이게 뭐예요?”
“신유정에게 내 몫의 베논 제약 주식 일부와 현재 내 명의로 되어 있는 빌딩과 아파트를 증여한다는 내용의 계약서. 변호사 검토도 마쳤고, 증여받은 후 증여세도 전부 낼 수 있도록 아파트는 하나 더 줄 거야. 그거 팔아서 세금 낼 수 있도록.”
소희가 놀란 표정으로 눈앞의 서류를 훑어봤다. 이미 그의 사인이 되어 있고 변호사 공증을 받은 공정증서까지 첨부돼 있었다. 유정이 사인만 하면 되는 계약서였다.
“이, 이걸 왜 나한테…. 유정이에게 직접 보여주고 사인 받으면 되는 일 아닌가요?”
그래도 인간으로서 일말의 책임감은 느낀 것일까. 아니 그렇게 양심적인 사람일 리가 없다. 그럼 향후 문제의 소지로 번질 수 있는 걸 미리 해결해 두려는 용도인가. 머릿속이 복잡했다.
“단, 조건이 있어.”
아니나 다를까, 구지훈이 이런 상식적인 행동을 그냥 할 리가 없긴 했다. 소희는 당장 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으나 계약서의 내용까지 확인하고 나니 쉽지 않았다. 뭔가 자신에게 불리한 얘기겠지. 고민하며 입술을 달싹이던 소희가 마침내 결심하고 되물었다.
“그게 뭔데요?”
“별건 아니야. 그냥 이번 주말에 잠시 어디 좀 가 있으면 돼. 혼자서 호캉스라도 즐기는 게 어때. 그 외에는 아무것도 더 요구하지 않을게.”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이건 자신도, 유정이에 대한 문제도 아니었다. 설마.
“지겸 씨에겐… 말하지 않고 말인가요?”
“오, 맞아. 생각보다 이해가 빨라서 다행이네. 간단하지?”
소희의 표정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지겸 씨 때문에 이러는 거예요? 혹시 내 행동으로 그 사람에게 문제가 생기거나 피해가 간다면 난 못해요.”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이 계약서를 챙긴다면, 유정은 평생 돈 걱정하지 않고 아이를 키우게 될 수도 있다. 본가에서 지원을 끊어 더 작은 월세방으로 이사한다던 이야기가 자꾸만 그녀의 귓가에 맴돌았다. 물론 유정의 부모님도 언젠가는 고집을 꺾고 딸을 이해하고 도와주실 날이 올지도 모르지만, 그와 별개로 오롯이 유정 혼자 독립할 힘이 생길 기회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런 건 아니야. 맹세할 수 있어. 그 녀석한테 직접 피해 가는 건 없어.”
지훈의 입가가 미세하게 떨렸다. 지겸을 감싸고 도는 소희를 보니 자존심이 상하고 기분이 진창이었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소희를 설득해 오라던 아버지의 말을 떠올리며 참았다.
“그럼 대체 왜 저한테 이런 요구를 하는 거죠?”
“구지겸과 나, 형제끼리 단둘이 할 긴밀한 얘기가 있어서 그래.”
소희는 차마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고심했다. 지겸에게 말하지 못하게 하는 게 석연치 않다. 하지만 그냥 무시하고 가기엔 유정이 얻게 될 이득이 너무 크다.
“뭐, 결정은 네 몫이야. 내 제안을 거절하면 눈앞에서 이 계약서는 찢어 버릴 거고. 다시는 신유정에게 이런 기회는 주어지지 않을 거야. 아, 너의 대답에 따라 오늘 유정이 회사에도 찾아갈지 말지 결정할까 해. 인맥도 좀 동원하지 뭐.”
소희가 고개를 들어 지훈을 노려봤다. 승리를 예감하는 지훈의 눈빛이 야비하게 반짝인다.
“지금… 협박하는 거예요?”
“네가 너무 망설이니까. 분명한 답이 눈앞에 있는데도 말이지. 지겸이한테 아무 짓도 안 해. 아니, 못해. 이유는 이제 너도 알지 않나?”
하긴 베논 제약의 비리를 전부 알고 있는 지겸에게 구회장과 지훈이 함부로 할 수 있을 리는 없었다.
“겨우 2박 3일이야. 주말 동안만.”
소희가 제 입술을 잘근잘근 짓씹었다. 유정을 위한 거라고 재차 다짐해 봐도 마음 한구석에 불안함을 지울 수는 없었다. 그래도 결심을 해야 할 때였다. 자신이 3일만 눈 딱 감으면 유정이 평생 여유 있게 지낼 수 있을 뿐 아니라 구지훈에게 일말의 책임이라도 제대로 지울 수 있다.
“…알겠어요. 그렇게 할게요.”
지훈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떠올랐다. 소희는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렸다.
“김 실장님 차 타고 온 거지? 따로 연락하지 말고, 바로 내 차 타고 가. 호텔 예약해 뒀어.”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요? 그냥 알아서 조용히 혼자 어디든 있으면 되는 거 아니에요?”
“임소희. 뭔가 착각하는 거 같은데…. 네 친구 생각한다면 빨리 결정해. 자꾸 이러면 내가 언제 마음 바꿀지 모르는….”
“아, 알겠어요! 알겠다구요.”
소희가 마지못해 답하자 지훈이 그제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정말이지?”
“그래요. 나, 화장실만 잠깐 다녀올게요.”
“지금?”
소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후…. 알겠어. 대신 휴대폰 전원 끄고 나한테 줘. 혹시 구지겸 그 자식한테 연락하려고 하면 곤란해지니까.”
조금 망설이던 소희가 지훈의 말대로 휴대폰을 넘겼다.
화장실 거울 앞에서 소희는 불안한 생각을 갈무리하려고 노력했다. 괜찮을 거다. 이렇게 하면 모두에게 좋은 결과가 올 수 있다. 겨우 2박 3일이라고 했으니까. 그것만 견디면. 소희가 차가운 물을 틀어 거듭 세수했다. 정신이 바짝 들었다. 긴장으로 몸이 살짝 떨리는 것 같았다. 소희가 시계를 찬 왼쪽 손목을 지그시 눌러 스스로를 진정시켰다.
비가 내리고 갑작스레 날씨가 추워져도,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굴어도 봄이 우리를 피해 가는 일은 없다. 반드시 날은 따뜻해지고 결국 봄이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