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신부강탈-87화 (87/104)

-87-

삼청동 소재의 한 한정식 전문점. 약속 시각보다 30분 먼저 도착한 지겸이 김 실장의 문자 메시지를 확인한다.

[ㅇㅇ백화점 6층 아동매장]

[ㅇㅇ백화점 3층 커피숍]

[ㅇㅇ백화점 9층 이탈리안 레스토랑]

자신의 부탁대로 김 실장은 소희의 동선이 바뀔 때마다 착실하게 문자를 보내주고 있었다. 친구와 함께 조잘거리며 웃고 있을 소희를 떠올리니 지겸의 입가에도 흐뭇한 미소가 어린다. 보고 싶다. 사진이라도 좀 찍어달라고 할 걸 그랬나. 생각했다가 질색할 소희를 떠올리며 혼자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 본다.

지잉. 이번엔 전화다. 저장되어 있지 않은 번호. 지겸은 뒷자리 숫자를 확인하고 바로 받았다.

- 보고 드립니다. 5시 30분 현재 ㅇㅇ백화점 9층 레스토랑에 또래 여성분과 함께 있습니다. 김 실장은 조금 떨어진 테이블에서 식사 중입니다. 다른 미행은 없습니다. 이상입니다.

“네, 귀가할 때까지 계속 30분 단위로 보고 주세요. 이후로는 전화 말고, 문자로.”

- 네, 알겠습니다.

유현이 소개해 준 사설 경호 업체 사람이다. 국가 정상회담과 같은 VIP 의전이나 개인 경호만 주로 전담하는 팀의 일원으로 일 처리가 확실했다. 예민한 김 실장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니까. 마음 같아선 자신이 일일이 따라다니거나 아버지가 붙인 미행을 죽기 직전까지 만들어야 속이 편할 것이다. 하지만 큰일을 앞두고 지겸이 모든 것을 눈치채고 있다고 광고할 수는 없었다.

물론 김 실장을 못 믿는 건 아니다. 그동안 지겸의 수족이 되어 누구보다 큰 역할을 해 준 사람이니까. 그가 없었다면 아버지의 비리를 밝혀내는 데 아마 2배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을 거다.

김 실장과는 5년 전, 지겸이 선영원 출신 사람들을 찾아다니다가 처음 만났다. 어린 시절 그는 사업이 망하고 목숨을 끊은 부모 때문에 여동생과 함께 선영원에 가게 됐다고 했다. 다행히 아들을 원했던 한 중산층 가정에 입양되었고 인품 좋은 양부모를 설득해 여동생까지 함께 데려갈 수 있게 됐다고. 그런데 여동생을 데리러 선영원에 갔을 때, 이유 모를 고열에 시달렸다는 동생은 이미 싸늘한 주검이 되어 있었다.

그는 동생의 죽음이 석연치 않다고 생각했다. 어른이 된 뒤로는 틈만 나면 관련해서 캐 보았지만 이미 시간이 많이 흘러버렸을뿐더러, 개인이 상대하기에 선영원 뒤에 자리한 베논 제약은 너무 큰 벽이었다. 그렇게 속절없이 시간이 흐르고 모든 걸 포기하려 할 때쯤, 지겸을 만나게 된 것이다.

후. 아무래도 목소리라도 들어야겠어. 겨우 반나절 못 봤을 뿐인데 견디기 쉽지 않다. 신호가 몇 번 가지 않았는데 전화가 연결됐다.

- 여보세요?

반가움이 묻어 있는 목소리가 다정하다.

“식사 중인데 방해한 거 아니야?”

- 아니. 아직 음식 기다리는 중이요. 안 그래도 유정이랑 당신 얘기하고 있었는데.

“무슨?”

- 비-밀.

피식, 입꼬리가 절로 치솟는다.

“어차피 다 들려. 네 시계에 도청 장치도 달았어.”

- 뭐…라고요?

웃음기가 가시는 목소리. 당황했을 표정을 떠올리니 또 웃음이 난다.

“그걸 믿기는.”

- 당신 진짜!

“김 실장님이 계산하실 거야. 그러니까 파스타만 시키지 말고 스테이크나 샐러드도 시켜. 디저트도 먹고.”

- 파스타…만 시킨 건 어떻게 알았는데요? 설마 정말… 그거 달았어요?

“응. 얘기했잖아.”

당황한 소희가 숨을 크게 들이마신다.

“하하. 설마, 소희야. 너 원래 잘 그러잖아. 적게 시키고, 시킨 것도 다 안 먹고.”

지훈 대신으로 함께 휴가를 보냈던 때 너무 적게 먹고 수저를 놓던 그녀 때문에 자꾸 애가 탔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래도 그 시절과 비교하면 요즘의 그녀는 장족의 발전이다. 자기가 그럴 수밖에 없도록 계속 먹이는 탓도 있지만.

- 진짜 못 말려, 믿을 뻔했잖아요. 좀 무서울 뻔했다구…. 아, 그럼 나 와인도 한잔해도 돼요?

“안 돼.”

피. 지겸의 완고한 대답에 들려오는 볼멘소리조차 귀엽다.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애써 참고 그가 짐짓 심각하게 덧붙였다.

“술은 네 개새끼가 옆에 있을 때나 해야지.”

- 와… 하여튼 이제 무슨 말을 못 하겠어요, 정말!

결국, 웃음이 터져 버렸다.

“농담이야. 원하는 대로 해. 대신 정말 한 잔만.”

- 몰라요! 어, 음식 나왔다.

“그래, 맛있게 먹어 소희야. 유정 씨에게도 안부 전해 주고.”

유정을 떠올리니 제 형의 잘못이 생각 나 마음이 무거워진다. 그녀가 지훈의 아이를 낳을 결심을 했다는 건 소희를 통해 들었다. 지겸은 곧 국내 법인을 정리할 때 유정의 몫도 따로 챙겨둘 계획이었다.

- 응, 잘 다녀와요! 이따 연락할게.

전화가 끊긴 후에도 지겸은 한참 동안 제 액정을 쳐다봤다. 그녀가 분명 ‘잘 다녀와요’라고 인사했다. 마치 지겸이 어디든 외출했다가도 돌아갈 곳은 그녀의 곁이라는 듯이 자연스럽게. 무의식중에 건넨 인사일지 몰라도, 아니 그렇다면 더. 소희의 안에 조금씩 제 자리가 커져가는 것 같아서 그의 가슴 한쪽이 뻐근하게 차올랐다.

똑똑. 그때 밖에서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미닫이문이 스르륵 열렸다. 지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셨습니까.”

“어, 그래. 일찍 와 있었네?”

오늘 만나기로 약속한 식약처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작달막한 키에 벗어진 이마, 가늘고 길쭉한 눈매. 어린 시절 몇 번 만난 적 있는 그는 구 회장과 꽤 친한 사이였다.

“그나저나 무슨 일이야, 구 전무. 둘만 같이 식사하자고 연락 와서 놀랐네?”

식약처장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그는 지훈인 척 약속을 잡았다. 당연히 지겸의 얼굴을 보고도 자연스럽고 편안해 보인다.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 모셨습니다. 약주, 하시겠습니까?”

때맞춰 나온 냉채 요리를 급히 먹으며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집 육회가 괜찮을 텐데?”

좁은 방 안에 식약처장이 게걸스럽게 음식을 쩝쩝 씹어대는 소리가 울렸다. 누군가 음식을 먹는 모습을 지켜보면 그 사람의 성격이나 욕망 같은 게 그대로 드러나는 기분이다.

“이미 시켜두었습니다.”

“그래?”

웬일인가 싶어 그가 지겸을 위아래로 슬쩍 훑어봤다. 구지훈 전무가 맞는데 묘하게 단정하고 평소보다 무게감이 있다. 원래 이렇게 눈치가 빠릿빠릿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아드님은 잘 지내시죠?”

지겸이 식약처장의 술잔에 술을 따라주며 물었다.

“요즘 뭐, 신났지. 확실히 성적이 늘더군. 재림중에 난다 긴다 하는 애들투성인데, 축구부 주장 완장까지 차게 생겼어. 다 구 회장 덕분이지.”

자백과도 같은 대답에 지겸의 한쪽 입꼬리가 살짝 들리는 것을, 제 이야기하는 데 빠진 남자는 눈치채지도 못했다.

“3번째 시술이 마지막인데, 날짜는 정하셨습니까? 그 후론 꾸준히 약만 복용하시면 됩니다.”

“어, 다 들었지 않는가, 지난번에. 마지막 차수 시술은 내년에 하기로 하지 않았었나?”

빈 술잔을 지겸 쪽으로 까닥하며 처장이 심상하게 반문했다. 피식, 지겸이 그에게 다시 술을 따르기 시작했다. 쪼르륵, 어느덧 투명한 액체가 잔을 가득 채웠는데도 지겸은 멈추지 않았다. 술이 잔을 넘치며 테이블 위에 흥건히 흐르고 식약처장이 먹던 육회 접시를 엉망으로 만들었다.

“어… 어? 어! 자네 지금 이게 무슨!”

술병을 전부 비울 때까지 계속되던 지겸의 행위가 멈췄다.

“처장님의 두 아드님 다, 우성 형질 강화 불법 시술받은 것, 그동안 베논 제약 측으로부터 얼마나 받아 챙기셨는지. 그리고 방금 스스로 말씀하신 내용 녹취까지, 전부 확보했습니다.”

축축하게 젖은 손을 물수건으로 황급히 닦던 식약처장의 불콰하게 빨갰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게 바뀌었다.

“지금 나 협박하는 건가? 갑자기 잘만 해 오다 이게 무슨 일인가. 구 회장도 아나?”

손까지 부들부들 떠는 남자를 지겸은 느른하고 여유로운 시선으로 마주했다.

“구지훈 전무로 착각하고 계시는 것 같은데 전, 구지겸입니다.”

“…뭐?”

그전까지만 해도 어이없다는 듯 분노로 들어찼던 그의 눈동자에 이제 정체 모를 두려움이 조금씩 자리 잡기 시작했다.

“곧 베논 제약에 대한 검찰 조사가 시작될 겁니다. 그동안 불법적으로 진행되어 온 우성 강화 시술과 형질 판단 혈액 검사도 그렇고 리베이트도 한두 건이 아니라서.”

눈앞의 인물은 기실 구 회장의 입김과 도움으로 식약처장의 자리까지 오른 사람이다. 이 사람이 현재 사는 집도 구 회장이 마련해 준 거나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을 정도.

“누구보다 잘 아시겠지만, 징계로 최소 5년간은 신약 연구가 제한될 테고. 베논의 스테디셀러인 알파/오메가 억제제 아니면 바로 문 닫을 상황이 되겠지요.”

중간에 끼어 그처럼 곤란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자신이 공조하고 그동안 얻은 것들, 아들 둘에게 받게 한 우성 형질 강화 시술까지. 참고인 조사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밝혀지면 처장 자신도 절대 처벌을 피하지 못할 사안이었다.

“이후 우리 법인이 관련해서 행정법원에 행정소송을 내는 일은 결코 없을 겁니다. 식약처 징계도 그대로 받아들일 거고요. 얼마 전부터 국내 법인은 미국 본사의 자회사 형태로 유지되고 있었으니…. 징계 처분이 나오면 곧 완전히 정리할 겁니다.”

세금 문제 때문에 할아버지 대에서부터 천천히 해 둔 분리 작업이 도움이 될 줄이야. 지겸은 내내 입에도 대지 않았던 술잔을 들었다. 독한 술을 입 안에 살짝 머금었다 목구멍으로 넘기니 평소보다 더 쓰고 역겨운 맛이 난다.

처장은 여전히 새파랗게 질려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다. 제 아버지에게 붙어서 온갖 것을 다 받아먹었으면서, 그동안의 치부가 세상에 드러나기라도 할까 봐 입술 한 번 달싹 못하는 꼴이 소름이 돋았다.

“이건 어떨까요. 처장님 관련 자료는 폐기해 드리죠. 다만 검찰 조사가 시작될 시 어떤 식으로도 저희 아버지가 빠져나갈 수 없도록, 그동안 베논 제약 한국 법인이 저지른 불법에 대해 철저한 진상 규명이 이뤄지도록 도움 주시리라 기대 하겠습니다.”

“저, 정말 내겐 아무 문제… 어, 없겠지?”

“그거야 제 아버지께 이 일을 얼마나 제대로 함구하시는지에 달려 있겠죠.”

그가 넘치고 남은 술잔의 술을 한숨에 들이켰다. 짧은 시간이지만 무엇이 자신에게 유리할지 계산해 보는 기색이 역력했다.

“자, 자네 말대로 하지. 혹여나 구 회장에게 연락이 와도 당분간은 피해 보겠네.”

“처장님께서 애써주신다니 든든합니다. 그럼, 그렇게 믿고 진행하죠.”

지겸은 제 할 말을 끝마치자 스스럼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참, 올해도 식약처 바이오생약국에서 바이오 콘퍼런스 개최하실 겁니까?”

“그… 그렇지?”

‘바이오 콘퍼런스’는 식약처에서 몇 년 전부터 가장 신경 쓰고 있는 중요한 행사로, 첨단바이오 의약품 성장 기반 마련 정책과 관련돼 있다. 그런 내부적인 사안까지 구체적으로 알고 있는 지겸에 대한 놀라움이 처장의 얼굴에 드러났다.

“첨단바이오 의약품 포럼에 저희 측 연구원을 지원하죠. 필요 기술 자문 있으시면 언제든 추가로 요청하시고요.”

“…고, 고맙네.”

얼떨떨해하는 처장을 그대로 두고, 가벼운 묵례를 끝으로 지겸은 돌아섰다. 그가 나간 자리에는 한 번도 손댄 적 없는 음식이 그대로 정갈하게 담겨 남았다.

식약처장은 차마 바로 자리를 뜨지 못하고 혼자 술만 몇 병을 더 시켜 잔뜩 취한 뒤에야 비틀거리며 집으로 돌아갔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