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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녀석이 소희와 다시 만나는 것 같던데. 알고 있었냐.”
지훈은 오전에 있었던 임원 회의가 끝나고도 회장실에 남아 있어야 했다. 워낙 제 아버지와 단둘이 있는 시간을 고역으로 여기는지라 그는 자꾸만 딴생각하며 한쪽 다리를 달달 떨었다.
“저는 모르죠. 솔직히 둘이 다시 만나든 말든 이젠 관심도 없고요.”
지겸과 소희 커플에게 조금이라도 타격을 입히려고 냈던 기사는 생각보다 더 빨리 수습돼 재미 볼 새도 없었다. 게다가 그에게 아이돌이나 신인 여배우 스폰 자리를 연결해 주던 기획사 사장은 이후로 연락이 끊긴 상태. 오히려 자신 쪽의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지훈은 이제 지겸의 이름만 들어도 울화가 치밀 정도였다.
무엇보다 아버지를 이해하기 어렵다. 이미 물 건너간 일인데, 왜 아직도 두 사람에게 저리 예민한지 모를 일이다.
“민주영 아나운서던가, 걔 좀 반반하던데. 로열에 가까운 우성 오메가라고 들었는데 그런 애는 어떨까요? 어디 집안인지 안 알려진 것 보면 개천에서 용 난 케이스일 거 같아요. 그럼 괜히 처가 신경 쓸 필요 없어 더 편하지 않겠어요?”
“민… 누, 누구?”
탕. 구 회장이 책상을 내려치는 소리에 지훈이 흠칫 놀랐다. 아버지가 그 이름을 듣자 평소보다 더 예민하게 반응한다는 것은 눈치채지 못한 지훈이 그저 몸을 움츠렸다.
“멍청하기는. 넌 애초에 내가 왜 임 재단장과 사돈을 맺으려 하는지 몰라서 이러는 거냐?”
지훈이 당황해 눈을 껌뻑였다.
“아빠, 아니 회장님께 유리하니까 그랬던 거겠죠. 우리가 같이 해 온 짓들 혹시 걸려도 임 재단장님 혼자 못 빠져나가게 하려고 하신 거 아니에요?”
지훈도 완전히 멍청이는 아니었나 보다. 정곡을 찔린 구 회장이 순간 당황한 나머지 거칠어진 호흡만 내뱉었다.
“제가 아버지 뒤를 이을 거지만 구지겸도 일단 베논 사람인데. 임 재단장님은 신경 안 쓰셔도 되지 않겠어요?”
그렇게 애를 써서 키웠더니만 어쩜 저러는지. 구 회장이 눈살을 찌푸렸다. 타고난 부족함은 어쩔 수 없다 해도, 지겸처럼 두뇌 회전이나 판단력이 빠르지 않을 거면 눈치나 센스라도 있어야지. 매사 태평하고 한 치 앞을 내다볼 줄 모르는 지훈이 답답했다.
구 회장은 자신의 선택과 결정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 더욱 아등바등 살았다. 아내가 세상을 그렇게 떠난 후에도, 두 아들 중 하나는 없는 취급을 하며 살면서도 이게 옳은 거라고. 이제는 세상에도 없는 제 아버지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당신이 버리려던 카드가 실은 정답이었다고. 로열 알파가 아니어도 자신이 누구보다 완벽하게 베논 제약을 운영할 수 있다고.
“너는 정말, 네 동생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후유. 피로감이 몰려들었다. 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구 회장이 말했다.
“지겸이를 제가 왜 몰라요. 여자에 미친놈이지.”
“그러니까. 그걸 알면, 네가 가봐라.”
“네?”
“머리 쓸 줄 모르냐? 너 입으로 지금 그러지 않았어, 여자에 미친놈이라고?”
그랬다. 그런데 이제 관심도 없는 전 약혼녀한테 자신이 가서 뭘 어쩌란 말인가.
“임소희, 그 아이가 지겸의 유일한 약점이라는 뜻이야.”
아…. 지훈이 그제야 아버지의 의도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주말, 정 의원과 약속이 잡혔어. 몇 년을 공들인 기회인지 알거다.”
현재 야당 총수인 정 의원은 가장 유력한 차기 대권 후보로 지명되는 인물이다. 검찰총장 출신으로 대쪽 같은 인품과 리더십으로 유명했다. 그렇기 때문에 더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이런 시기에 우리 일 관련해서 기사 한 줄이라도 잘못 나가는 날에는 모든 게 끝이야.”
구 회장은 모든 불법적인 의료시술 및 관련 약 판매를 중단하겠다고 지겸에게 약속했지만 애초에 순순히 그럴 생각이 없었다. 물론 자신을 천진하게 믿고만 있을 아들놈이 아님을 안다. 분명 지겸 나름대로 자신에게 대적할 차선책을 대비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도 다행이지 않은가, 그토록 한 여자에게 애틋하다고 하니. 임 재단장의 딸은 여러모로 쓸모가 많은 카드였다.
“당장 만나. 어떻게 할지는 내가 가르쳐주마.”
지훈은 그제야 제대로 힘을 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구 회장은 여전히 스스로를 믿고 있다. 베논 제약을 이렇게까지 키워낸 것은 로열 알파인 그의 아버지도, 죽은 동생도 아니라 열성에 가까운 자신이었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계속 증명해 낼 거다. 자신의 선택이 단 한 번도 틀리지 않았음을. 그러니까 불필요한 방해물은 모두 제거되어야 한다. 설사 그게 제 가족을 또다시 희생시키는 일이 될지라도.
창밖을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가 묘한 살기로 번뜩였다.
봄은 늘 그렇듯, 코앞까지 다가와 온기를 전했다가 싸늘한 바람과 함께 돌아선다. 마치 다시는 오지 않을 것처럼.
***
“이 브랜드의 디럭스 유모차는 베시넷이 별도로 나와서 신생아 때도 태우실 수 있어요. 안전성 검사에서도 우수한 결과가 나와서 요즘 산모님들께서 많이 찾으세요.”
“아, 네….”
직원의 복잡한 설명을 멍한 표정으로 듣고 있던 유정과 소희가 서로 눈을 마주치고 피식 웃어버렸다.
오늘 두 사람은 오랜만에 함께 쇼핑을 나왔다. 화장품이나 옷이 아니라 아이 용품을 사러 나왔다는 게 이전과 많이 달라진 점이지만.
배냇저고리, 속싸개, 힙시트, 유모차 등등. 아이를 위해 준비해야 할 게 한두 개가 아니었다. 결국 그들은 1시간도 안 되어 지친 몸을 이끌고 백화점 3층의 카페로 향했다.
“아 피곤해. 무슨 외계어 듣는 거 같아. 소희야 너 그거 알아? 서울 시내 웬만큼 좋다고 소문난 조리원은 1년 치 예약이 다 차 있더라. 다들 임신 확정되자마자 조리원부터 예약한대. 진짜 우리나라 엄마들 대단하지 않니?”
유정이 앉아 벌써 부은 종아리를 주무르며 말했다. 아직 눈에 띌 정도로 배가 많이 나오진 않았지만, 몸이 쉽게 피로함을 느끼고 다리가 자주 저린다며 한숨을 쉰다.
소희가 그런 유정에게 과일 주스를 건넸다.
“와 시원하다. 이제야 살 것 같아. 어, 근데 왜 한 잔 더 샀어? 아….”
유정이 그제야 깨달은 듯 자신을 스쳐 멀리 앉아 있는 김 실장에게 주스를 권하고 돌아오는 소희를 바라봤다.
“근데 저분, 실장님이랬나? 하여튼 이렇게 널 온종일 쫓아다니는 거야?”
“으응….”
소희가 조금 민망한 표정으로 소곤거리는 유정에게 답했다.
지겸이 며칠 동안 바쁜 일이 있어서 잘 만나지 못할 것 같다며 속상해하더니 김 실장을 대신 보냈다.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 외출할 땐 꼭 김 실장과 동행하라고 거듭 강조했다.
“근데 이런 스타일이셨구나….”
생각보다 다정하고 은근 집…착….
“뭐가?”
“응? 아니 나 그때 밥 한번 같이 먹었잖아. 내가 봤을 땐 사람이 뭐랄까 되게… 빈틈없어 보이더라고. 잘 웃지도 않고.”
물론 그래도 좋은 사람 같아 보였지만.
“그래…?”
잘 웃지 않는 지겸이라. 소희로서는 상상이 가지 않았다. 늘 심각한 표정에 남자 어-른 같은 얼굴이 미소 지을 땐 꼭 말간 소년 같아지는데.
“야야. 무슨 생각해! 입꼬리 내려. 어디 임산부 앞에서, 질투 나게.”
소희도 모르게 그를 떠올리며 웃어버렸나 보다. 유정의 지적에 소희가 입을 합 다물었다. 결국, 다시 웃음이 터져버린 두 사람이 한참을 깔깔대며 웃었다. 오렌지 주스가 평소보다 더 새콤하게 느껴졌다.
“나 말했어.”
소희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부모님께?”
“응.”
유정이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라셔…?”
“당장 나가라지 뭐. 왜 나 지금 집, 아빠 명의잖아. 회사 근처로 월세 새로 구했어. 이따 계약하러 갈 거야.”
유정의 부모님, 특히 아버지는 당장 병원에 같이 가서 지우자고 성화였다. 충격을 받은 어머니도 의견이 다르진 않았다. 그런데도 굳이 아이를 낳아서 키우겠다면 혼자서 알아서 하라며 어떠한 지원도 끊겠다고 선언하셨다. 어머니가 몰래 챙겨주시려다 아버지께 들켜 난리가 나기도 했다. 기실 회사에서 자르지만 않은 것도 유정에겐 다행이었다. 다른 언론사 경력 채용을 알아봐야 하나 고민 중이었는데.
그리고 오빠인 유현은 혼자 나가 사는데다, 요즘 바쁜 일이 있는지 통 얼굴도 보기 힘들어서 유정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아직은 모르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아버지가 그러시더라. 오히려 애를 낳으려고 생각하는 게 전근대적인 발상이라고. 요즘이 어떤 시대인지 아냐고.”
솔직히 소희도 유정 부모님의 생각을 이해 못 하는 게 아니었다. 자신만 해도 친구를 생각하면 여러 가지로 걱정에 한숨부터 나오는데, 부모님 마음은 오죽할까. 자신도 솔직히 얘기를 들었을 때부터 계속 말리고 싶었는데 그녀의 선택을 존중하기 때문에 참았을 뿐이다. 하지만 여전히 후회하기도 한다. 그때, 처음 유정에게 이 사실을 들었을 때 적극적으로 말렸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그런데 넌 정말… 괜찮아?”
후회하지 않겠냐고, 직접 물어보기 어려워서 소희가 돌려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응. 내가 원해서 그 인간이랑 잔 거였으니까.”
유정은 그런 소희에게 고민하지도 않고 답한다.
“구지훈, 그 자식은 그냥 즐긴 거겠지만, 난 아니었어. 그리고 그 인간이랑은 별개야. 얜 내 아이거든. 그냥 내 아이. 난 내 선택을 후회하지 않고, 결과도 제대로 책임지고 싶어. 그러니까 소희야, 너라도 박수 쳐 줘. 응?”
“…그래. 평생 이모 역할 제대로 할게. 진짜로.”
소희가 유정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아마 소희조차도 유정의 선택을 평생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많은 사람이 만용이라고 하거나, 철없다고 할 거고. 유정이 후회할 정도로 힘든 순간들도 오겠지.
하지만 우리는 어차피 다른 사람의 마음과 행동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너무나 서로 다르게 태어났으니까.
소희가 지겸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해서, 그의 모든 행동을 이해하고 용서하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그가 어렵고, 낯선 순간들이 있다.
하지만 모든 걸 다 떠나서, 그래도 그 사람이 좋고 그 곁에 있고 싶다.
유정이 아이를 낳기로 했듯이 소희도 구지겸이라는 남자와 함께하기로 선택했다.
대상은 다르지만, 유정과 자신은 어쩌면 같은 종류의 사랑을 하는 거라고 소희는 생각했다.
그러니 부디 소중한 친구가 선택한 길에 행복이 놓여 있었으면. 소희는 아침에 헤어지며 아쉬운 듯, 손등에 몇 번이나 입맞춤하던 제 남자를 떠올리며 미소 지었다. 그 마음을 담아 친구의 손등을 쓰다듬는다.
그러니까 사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