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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희의 침실 창문에 흐르는 빗물이 하얀 린넨 커튼 뒤로 드문드문 그림자를 만들었다. 밤은 깊었지만 공기는 포근했고 이따금 들리는 빗소리도 은은했다. 무엇보다 그녀를 뒤에서 깊숙이 감싸 안은 남자의 품이 너무나 안온했다.
“안 자…?”
지겸이 소희의 뒷머리에 입술을 비볐다.
피곤할 텐데.
솔직히 그건 그렇다. 그게 다 누구 때문인데. 조금 전까지 샤워부스 안에서, 또 욕조에서 이 남자한테 시달렸던 걸 생각하면…. 휴. 소희가 일부러 들리게끔 한숨을 내쉬었다. 뒤에서 그가 나지막이 웃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래도 지금의 솔직한 기분을 한마디로 표현하라고 한다면.
“…좋아서요.”
“뭐가?”
음.
“빗소리가.”
아니, 실은 지금 이 순간이.
“나도.”
쪽. 소희의 진심은 말하지 않아도 이미 들킨 듯. 남자의 입술이 그녀의 뒷덜미에 와 간질인다.
소희가 제 허리를 끌어안은 그의 큰 손을 손끝으로 가만히 매만져 봤다. 거칠거칠한 감촉이지만 이젠 그의 피부가 제게 닿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진다.
후. 지겸의 낮게 가라앉은 숨결이 귓가에 와닿았다.
“함부로 만지면, 안 돼.”
“왜 당신은 되고 난 안….”
아.
따로 입을 게 없어 가운만 걸친 남자의 아래가 순식간에 딱딱해져 그녀의 엉덩이와 등허리를 쿡쿡 친다. 신체 변화가 일어난 건 그인데 얼굴이 빨개지는 건 그녀다.
놀란 소희가 고개를 뒤로 돌리자 지겸이 기다렸다는 듯 입술을 겹쳐온다.
이미 조금 부은 소희의 입술을 그가 부드럽게 머금고 혀를 천천히 비집어 넣는다. 뭉근하게 입 안을 쓰다듬는 감촉에 진정됐던 감각들이 아슬아슬 살아난다. 순식간에 부족해진 호흡이 그로 인해 다시 채워진다. 지겸이 그녀의 혀를 진득하게 빨아주더니 곧 쪽, 소리와 함께 담백하게 입술을 떨어뜨린다.
“난 신경 쓰지 말고. 어서 자, 소희야.”
지겸이 정말 산뜻하게 말하며 잘 자라는 듯 천천히 토닥여 준다.
다시 만나게 된 이후, 지겸이 늘 조심하고 있다는 걸 소희도 알았다. 금세 버거워하는 자신에게 맞추기 위해 많은 걸 참고 있다는 것도.
누군가에게 무엇을 해 주느냐보다 어쩌면 무엇을 하지 않는지가 실은 애정의 진정한 척도일지도 모른다는 걸, 소희는 이 남자를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소희도 잠을 청해 보려 노력했지만 잘되지 않았다. 등 뒤에서 선연하게 느껴지는 남자의 존재감에 도리어 정신이 바짝 든다.
“이대로는 못 자겠어요.”
뭔가를 결심한 소희가 몸을 돌려 둘이 함께 걸치고 있던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가운을 벌리고 안으로 파고드는 작은 손의 감촉에 그의 몸이 흠칫 굳는다.
“소희야. 갑자기 왜…. 큿.”
지겸이 뭐라고 덧붙일 새도 없이 소희가 입을 벌려 딱딱하게 발기한 성기의 선단을 물었다.
비누 향에 오묘하게 섞여 든 비릿한 남자 냄새. 역할 것 같았지만 이상하게 싫지 않았다.
후으. 당황한 그가 깊게 호흡을 내뱉는다. 입에 넣기 위해 단단히 붙잡은 뜨거운 기둥의 아래쪽이 손안에서 크게 꺼떡였다. 어느덧 더 흉흉하게 불거진 핏줄이 이제는 그녀의 손바닥 안에서도 움찔대며 느껴질 정도. 겨우 입 안에 귀두만 머금었을 뿐인데도 확연히 달라진 남자의 반응에 소희는 형언하기 어려운 뿌듯함을 느꼈다. 반은 놀리듯이, 반은 진심을 담아 소희가 혀를 돌려 귀두를 핥았다.
“흐. 하지, 마…. 응?”
가쁜 숨을 애써 감추고 지겸이 소희의 뒷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하지만 소희는 대답하지 않았다.
몸을 섞을 때마다 그녀의 아래를 집요하게 빨아대는 이 남자의 심정이 그동안은 별로 이해되지 않았었는데, 이제야 조금 알 것도 같다. 좋아하는 사람이 제 애무에 반응하며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는 모습이 생각보다 더 기껍다.
선명하게 갈라진 귀두를 요리조리 맛본 소희가 고개를 조금 꺾어 입술을 모아 기둥 옆을 위아래로 훑는다. 어차피 소희의 입 안에 제대로 넣을 수도 없는 굵기와 크기. 길쭉한 아이스바를 먹던 기억을 되살려 성기의 뿌리부터 귀두까지 뭉근하게 핥아 올리길 반복했다. 그녀의 머리카락을 쥔 지겸의 손아귀에 점차 힘이 들어갔다.
“그만.”
재차 들려오는 단호한 목소리도 무시한 채 소희는 남자의 것을 빠는 데 열중했다. 그녀의 큰 장점인 성실성이 이런 상황에서도 발휘되는 모양이었다. 숨을 한번 크게 들이마시고 다시 귀두를 입에 물었다. 벌써 볼이 빵빵해진다. 이미 버겁지만… 조금만, 조금만 더 넣어볼까. 반도 못 삼킨 것 같은데 이미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어쩔 수 없는 생리적 구역감이 슬쩍 치민다. 하지만 이상하게 멈추고 싶지는 않다.
홱. 그 순간 지겸이 소희의 양 겨드랑이를 감싸더니 그녀의 몸을 제 얼굴 쪽으로 끌어올렸다. 황급하게 물었던 걸 뱉어내느라 살짝 깨문 것도 같은데… 그는 신음 하나 흘리지 않는다.
왜 그러냐고 미처 물어볼 새도 없이 지겸은 그녀의 통통한 입술 사이로 제 혀를 밀어 넣었다. 깊숙이 키스한 그가 소희의 혀를 뿌리까지 잡아채 세게 빤다. 마치 입 안에 남은 그의 흔적 위에 새로이 덧그리기라도 하려는 듯 빨간 점막 여기저기를 매만지고 핥아내는 혀의 움직임이 급하고 절박할 정도였다.
“하, 하아…왜….”
마침내 떨어진 두 사람의 입술 새로 긴 은실이 이어지다 끊어졌다. 영문도 모르고 혼이 쏙 빨리도록 키스 세례를 받은 소희가 거칠어진 호흡을 애써 가다듬었다.
그녀 입술에 남은 제 타액을 엄지로 조심스레 닦아주며 지겸이 나무라듯 말했다.
“넌 이런 거 하지 마.”
조금 화난 듯 단호하게 들려오는 중저음.
“그런 게 어디 있어요. 당신은 매번 나한테….”
당황한 소희의 목소리에 지겸의 표정이 풀어진다. 이마와 코끝에 쪽, 쪽 잘게 입술을 누르더니 품 안에 깊숙이 끌어안는다.
“넌 받기만 해, 소희야.”
그게 뭐든. 어떤 식으로든. 받기만 해.
치…. 소희가 좀 더 따지려고 입술을 달싹이다 멈춘다.
일정하게 뛰는 남자의 곧은 심장 소리, 따뜻한 품, 무엇보다 그녀를 가장 떨리게도 또 안심시키기도 하는 특유의 체향. 모든 것이 그래, 완벽하게 느껴진다. 지금 이대로도.
지겸이 소희의 등을 토닥이며 자장가를 불러줬다. 감미로운 노랫소리가 그의 가슴을 타고 그녀의 뺨에 부드럽게 와닿는다.
노래도 잘하네. 못하는 게 뭐야….
혼자 중얼거리던 소희의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지더니 결국 스르륵 감겼다.
색색 잠이 든 그녀의 숨소리가 고르게 바뀐 후에도 한참 동안 지겸의 노래는 멈추지 않았다.
***
햇빛에 눈이 부셔서 잠에서 깼다. 하암. 오랜만에 푹 잤다.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 앉는데 뭔가가 허전하다.
아. 손을 뻗어 옆을 더듬어 본 다음에야 침대 위에 지겸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스륵 일어나 가운의 허리끈을 고쳐 매고 방에서 나왔다. 거실이나 부엌 쪽도 고요하다. 시계를 보니 아침 8시도 아직 안 된 시각. 말없이 어디 나갈 사람이 아닌데…. 지난번처럼 운동 간 건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소희는 자기도 모르게 집 안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저의 집인데 묘하게 불편한 이 기분은 대체 무엇인지. 지겸의 흔적만을 쫓고 있는 스스로가 신기하기도 하고, 아무 말 없이 집을 비운 그에게 괜스레 서운해졌다.
전화해 볼까. 소희가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에스프레소 머신을 켰다. 전화번호를 띄워놓고 통화버튼을 누를까 말까 고민하는 사이에 크리미한 라테향이 주변을 감쌌다. 소희가 커피를 마시려던 찰나.
티릭.
도어락이 열리고 인기척이 들렸다.
치. 소희가 일부러 뒤돌아보지도 않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어. 일찍 일어났네?”
문 앞에 걸려 있던 카드키를 원래 자리에 돌려놓고 들어오던 지겸이 소희의 뒷모습을 발견하고는 놀라서 물었다.
지겸이 새벽에 몰래 빠져나왔던 건 아침을 사려는 이유도 있었지만, 어젯밤 소희의 집으로 들어올 때 멀리 골목 어귀에서 수상한 남자를 봤기 때문이었다. 옷차림이 조금 달랐지만, 체격이나 외형이 이천에서 오는 길 들렀던 휴게소나 제 집 앞에서 우연히 스쳤던 사람과도 거의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아마 구 회장이 감시를 붙인 것 같았다.
“소희야?”
“….”
호록. 또 답 없이 한 모금. 소희 스스로 생각해도 유치한 행동이지만, 일어났을 때 옆에 그가 없었다는 게 얼마나 당황스러웠는지를 표현하고 싶었다. 그리고 겨우 이 정도 일에 기분이 상한 자신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소희야… 왜, 화났어?”
툭. 아일랜드 식탁 앞 높은 스툴에 앉아 있던 소희의 발 앞에 그가 무릎을 접어 앉더니 그녀의 허벅지 위에 고개를 기대 엎드린다. 주인이 쓰다듬어 주기를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피식. 덩치 큰 남자가 그녀 아래 잔뜩 몸을 구기고 조용히 기다리고 있는 모습에 소희가 결국 먼저 웃음을 터트렸다.
“어디 다녀왔어요? 나 혼자 두고.”
소희가 그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으며 물었다. 화가 난 적도 없지만, 이런 태도라면 더 툴툴거리기도 어렵다.
“미안해. 이렇게 일찍 일어날지 몰랐네. 운동하고, 소희 아침 사 왔지. 여기 샌드위치 맛있다더라.”
이거 먼저 먹고 커피 마셔. 속 버려.
지겸은 그녀의 마음이 풀어진 걸 귀신같이 알아채고 옆자리로 옮겨 앉았다. 새벽부터 분주하게 사 온 음식 꾸러미를 소희 앞에 가지런히 펼쳐 놓는다. 종이 포장지를 뜯고 반듯하게 세모로 잘린 샌드위치를 꺼내 소희의 입가로 가져간다. 그녀도 자연스럽게 아, 입을 벌려 그가 내민 빵을 베어 물고, 오물오물 씹었다. 보드라운 달걀 샐러드가 입 안에서 뭉개진다. 달콤하다.
쪽.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지겸이 대뜸 입을 맞췄다.
이젠 놀라지도 않는 소희가 잠시 멈췄다가, 그가 입술을 떼자 얼굴을 붉히며 입 안의 음식을 마저 씹어 삼킨다.
그렇게 샌드위치 한입에, 키스 한 번씩.
그가 사 온 샌드위치 두 쪽에, 채소와 과일을 갈아 넣은 주스까지 싹싹 비우고 나자 몸이 다시 노곤해졌다.
“더 먹을래?”
“아니. 도저히 못 먹겠어요.”
절레절레. 소희가 너무 배부르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지겸이 그런 그녀가 귀엽다는 듯 물끄러미 보더니 물티슈로 입가까지 꼼꼼히 닦아준다.
이러다 버릇 나빠지겠어. 생각하며 기지개를 쭉 켜는데 순간 지겸의 눈매가 묘하게 좁혀든다.
“임소희. 너….”
일부러 아무것도 안 입은 거야?
그의 시선을 따라 제 아래를 보니 팔을 움직이느라 가운 한쪽이 살짝 흘러내린 통에 속옷을 입지 않은 한쪽 가슴이 드러나 있었다.
“아! 그게 아니라 원래 집에선 속옷을 잘 안 입어서. 습관이라….”
당황한 소희가 벌어진 가운 앞섶을 서둘러 여미려는데 지겸에게 손목을 잡히고 만다.
그의 손끝에서 가볍게 가운이 풀리고 하얀 속살이 낱낱이 드러났다. 지겸이 본능적으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어젯밤 자신이 남긴 흔적으로 군데군데 붉은 꽃이 핀 여체 앞에서 단숨에 끓어오른 욕망이 크고 단단한 형태로 뭉친다.
날 것의 본능으로 가라앉은 새까만 눈동자 앞에서, 제대로 숨을 쉴 수 없는 건 소희도 마찬가지였다. 어느새 은밀한 곳이 촉촉이 젖어 들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서 소름 돋을 정도로 달큼한 페로몬이 흘러나왔다.
“다 큰 어른이 그런 습관이라니.”
…칭찬해 줘야겠네.
“흣!”
지겸이 입을 벌려 눈앞의 젖가슴을 크게 베어 물었다. 방금 소희가 그가 내민 샌드위치를 먹을 때 그랬듯이.
뜨거운 입속에서 빨리고 혀끝에 뭉개지는 유두가 빳빳하게 일어선다. 바르르 떨리는 입술 한쪽을 깨물며 고개를 창가 쪽으로 돌렸다. 자기도 모르게 허리가 자꾸만 뒤로 휜다. 허벅지 안쪽으로 파고드는 손길에 그의 온기를 기억하는 꽃잎이 절로 뻐끔대며 꽃물을 흘린다.
밤새 내렸던 비는 어느덧 그치고 창밖의 날씨가 포근해졌다.
봄비가 그치면, 기적처럼 진짜 봄이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