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신부강탈-83화 (83/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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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선생님이 그때 부탁했던 것.”

선영원 원장이 지겸에게 서류 봉투를 건넸다.

“아무래도 전부 설득하는 건 어려웠어요. 주영이… 민주영 아나운서는 이미 만났다는 거 알고 있고. 여기 2명은 언제든지 증언해 주겠다고 약속했어요. 연락처와 함께 선영원에서 보관하고 있던 그 친구들 관련 자료는 전부 넣었어요. 전 원장님이 전부 폐기하셔서 남아 있는 게 거의 없긴 하지만.”

“아닙니다, 충분해요. 정말 감사합니다. 쉽지 않으셨을 텐데….”

“이렇게라도 해야죠.”

커피잔을 들어 올리는 원장의 손은 사뭇 떨리고 있었다.

“이제부터는 필요하면 제가 직접 만나 설득할 테니 더는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리고 선영원에는 절대로 어떠한 피해도 가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요. 그런데… 괜찮겠어요?”

소리 나지 않게 제 잔을 내려놓으며 원장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신의 아버지와 척을 지려는 그 아들을 우려하는 것임을 안다.

“네. 무엇보다… 단순히 제 개인이 괜찮고 말고 할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단단한 지겸의 표정과 대답에 원장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그래도 구 선생님 덕분에 내가 사모님도, 다른 아이들…도. 나중에 하늘에서라도 볼 낯이 생길 것 같아.”

“또 뵈러 올게요. 참, 이달 후원금은 오늘 오전에 입금됐을 겁니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지겸을 따라 원장도 일어섰다. 문가로 걸어가던 원장이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아, 오늘 같이 온 여자분. 그때 얘기했던 분… 맞죠?”

“네.”

소희의 이야기가 나오자 굳어 있던 지겸의 표정이 그제야 부드럽게 풀어진다.

“잘 어울리네요, 두 사람.”

그 모습을 본 원장의 얼굴에도 어머니 같은 온화한 미소가 퍼졌다.

***

선영원 뒤쪽에는 자그마한 장미화원이 있었다. 지겸의 어머니가 만들고, 그녀 생전엔 자주 와서 직접 가꾸기도 하셨던 곳. 소희와 지겸은 그 화원 가운데 놓인 흰 벤치에 앉아 있었다. 아이들의 낮잠 시간이라 고요한 주변에는 이따금 새소리만 감돌았다.

“어머니께서 만드신 보육원이라고 했었죠? 너무 따스하고 포근한 곳 같아.”

“응. 이곳에 마음을 많이 쓰셨었지.”

어린이날이나 크리스마스 때면 어머니는 지겸과 지훈을 데리고 꼭 이곳을 찾았다. 사실 두 형제도 겨우 초등학교 저학년일 때라, 놀이공원이나 더 재밌는 데 가지 못하는 걸 투덜대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럴 때만큼은 단호한 분이셨다. 아마 형제에게 직접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 같다. 자신들이 가진 것이 얼마나 큰지를 깨닫기를, 그래서 자만하고 자랑하기보다는 감사하고 나눌 줄 아는 어른으로 자라나기를 바라신 거겠지.

출발하기 전에는 짜증만 가득했지만, 정작 이곳에 오면 지겸이야말로 누구보다 신나게 놀았다. 또래들과 모여 엄마가 가져온 큰 선물더미를 함께 풀고, 피자며 맛있는 음식을 실컷 먹고는 같이 축구공을 차며 온종일 놀았다. 그러고 저녁 무렵이 오면 새로 사귄 친구와 헤어지기 싫어서 자고 가겠다고 떼를 썼던 것 같기도 하다. 지훈은 반대였던 듯하지만.

“난 아주 오랫동안, 어머니가 그렇게 돌아가신 게 아버지의 집착과 간섭이 너무 심했기 때문이라고만 생각했었어.”

그의 어깨에 기대어 있던 소희가 지겸의 팔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어머니 이야기를 꺼낼 때 그는 항상 지나칠 정도로 담담해서 오히려 소희의 마음이 더 시렸다.

“그런데 그게 전부가 아니었어. 5년 전, 지금의 원장 선생님께서 선영원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혈액검사 결과지를 하나 보여주셨는데, 그걸 시작으로 모든 걸 알게 됐지.”

그리고 어머니의 죽음엔 이곳 아이들에 대한 죄책감도 큰 작용을 했을 거라는 사실까지.

“20년도 더 전에, 베논 제약에서 불법적으로 진행했던 임상 시험 때문에 선영원 아이들 여럿이 죽었어.”

놀란 소희가 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하고 지겸을 쳐다봤다. 그를 향한 눈빛이 몹시 흔들리고 있었다.

베논 제약은 연고가 없는 고아 중 혈액검사를 통해 알파나 오메가로 판명이 난 아이들을 시험 대상으로 삼았다. 지금은 물러난, 당시의 선영원 원장은 완전히 구 회장 쪽 사람이었으므로 이들의 만행을 규제할 사람은 없었다.

아무리 알파나 오메가라고 해도 대부분 열성의 형질을 가지고 있던 아이들에게 베논 제약은 알파/오메가의 우성 형질을 강화하는 약을 주기적으로 복용시켰고, 부작용 때문에 원인을 알 수 없는 고열에 시달리다 여러 명이 죽었다. 이미 전 원장에게서도 증언을 확보한 내용이었다.

“그 아이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베논은 실제로 우성 형질을 개발시켜 열성을 우성으로 만들 수 있는 신약 개발에 성공했어.”

“정말… 그런 약이 있다고요?”

소희로썬 믿기 어려운 얘기였다.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응. 다만 부작용을 전부 해결하지는 못한 것 같아. 예전처럼 생명에 위험이 되는 정도는 아니지만, 억지로 형질을 바꾸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호르몬의 변화 때문인지 여러 정신질환이 발견되고 있어. 최근에… 자살한 사람도 있고.”

지겸을 붙잡고 있던 소희가 툭, 팔을 놓았다. 불규칙해진 숨소리를 들으니 그녀가 얼마나 동요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서, 설마…. 이 모든 것에 제 아버지도… 재림재단도 관련이 있나요?”

제발 아니기를 바라며 물었지만, 소희는 듣지 않아도 이미 답을 알 것만 같았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가 지나치게 덜덜 떨리고 있었다.

임상 시험부터 약의 개발과 적용하는 시술까지. 단순히 제약 회사 혼자 진행할 수 있는 규모의 연구가 아니다. 게다가 얼마 전 그녀에게 지겸으로부터 들은 게 없었냐고 묻는 아버지의 불안해 보였던 표정도 떠올랐다.

“그래, 소희야. 이제라도 너한테 이걸 말하는 건… 임 재단장님도 이 일에 깊숙이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야.”

“그리고… 당신은 그걸 다 밝힐 계획이군요.”

지겸이 떨고 있는 소희의 손을 끌어당겨 잡았다. 그가 차분하게 제 호흡을 다시 가다듬는 게 느껴졌다.

“맞아. 곧 검찰 조사가 시작될 거야. 우리 아버지도 임 재단장님도… 실형을 피하긴 어려워.”

소희가 초조하게 제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구 회장과 아버지는 처벌받는 게 옳을 것이다. 자신들의 기술로 사람들과 사회를 농락했으니까. 특권을 유지하고 확대하기 위해 인간이라면 응당 존중하고 또 받아야 할 생명을 가볍게 여기고 심지어 이용했다.

그들이 저지른 범죄에 지나친 선민의식과 가부장적 태도도 반영되지 않았을까. 소희가 아버지에게 대체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었냐고 따진다고 해도, 어쩐지 그는 한치의 부끄러움도 없어 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일까. 지겸의 말을 듣고, 소희 자신도 놀라울 정도로 아버지보다는 어머니에 대한 걱정이 앞섰다. 이 일로 인해 피해받을 학교와 재단도.

“사실 오전에 아버님 뵙고 왔어. 관련해서 전부 말씀드렸으니, 재단운영과 관련해 필요한 것들은 미리 정리하시겠지.”

소희의 표정이 점점 더 어두워졌다. 복잡한 생각들을 갈무리하는지, 꽤 오랜 시간 아무 말 없는 그녀를 지겸이 물끄러미 바라봤다. 많이 놀랐겠지.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가만히 기다렸다. 소희가 생각을 정리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시간 동안.

“힘들었겠다….”

“응?”

지겸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소희의 반응에 멍한 얼굴이 되었다. 지금까지 그녀의 떨리는 손을 잡아주고 있던 것은 자신이었는데, 어느덧 제 손등을 쓰다듬고 있는 건 소희다.

사실 소희에게 이 이야기를 털어놓기까지 지겸에게도 큰 용기가 필요했다. 그녀가 상처받을까 봐 걱정됐고, 혹여 다시 자신을 미워할까 봐 두렵기도 했다. 그의 행동을, 앞으로의 계획을 이해하지 못하면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고민도 깊었다. 그녀가 내내 고압적이고 가부장적인 환경에서 시달린 것을 알지만, 그래도 친아버지에 대한 일이니까.

그런데 지금 소희는 오히려 지겸을 걱정하고 있었다.

“이 모든 걸 안 지 5년이나 된 거예요?”

“아. …처음부터 전부는 아니고. 조금씩, 계속 조사하면서.”

“혼자서. 괴로웠을 것 같아.”

사실 당황스러운 건 소희도 마찬가지였다.

이상하게 이야기를 듣는 내내 그가 신경 쓰였다. 지겸은 자신의 친부인 구 회장의 오랜 비리를 직접 파헤쳤고, 그 과정에서 어머니의 죽음도 연관이 있다는 것까지 알았을 거다. 그런데 그의 곁에는 매 순간 차올랐을 고통스러운 마음을 솔직히 털어놓을 사람 하나 없었다.

비리에 대해 알게 된 것보다, 이 사람이 혼자서 외로운 싸움을 해 왔을 거라는 사실이 소희의 마음을 더 괴롭게 했다.

지금 자신의 곁에는 그가 있다. 언젠가부터는 늘 그랬다. 이 이야기를 듣는 동안 혹여 그녀가 많이 놀라고 또 아플까 봐 전전긍긍하는 남자의 진심과 배려를 오롯이 느꼈다. 그래서 괜찮지 않지만 그나마 괜찮을 수 있는 거다.

하지만 이 남자는 늘 혼자였다. 가장 사랑했던 사람이 자신을 떠났던 어린 날에도, 아버지가 자신에게만 나쁜 사람이었던 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그랬다는 걸 깨달은 끔찍한 순간에도.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마음은 결국 이런 걸까.

마냥 달콤하고 설레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의 일에 공감하고 함께 속상하고 아파하는 것.

자신이 상대방을 위해 할 수 있는 게 없었던 순간에조차, 그런데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자괴감까지 느껴지는 것.

소희가 그의 손을 끌어당겨 지겸의 품에 안겼다. 그리고 팔을 최대한 뻗어 할 수 있는 한 가장 크게 그의 등을 감싸 안았다.

그녀보다 배는 큰 남자의 몸은 고목처럼 단단하고 커서 제대로 안기가 버거웠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고생했어요, 당신….”

그리고 잘했어요. 그게 무엇이든, 전부.

소희의 고요한 속삭임이 지겸의 심장에 느른하게 다가와 잔잔한 파동을 일으켰다. 그 울림은 점점 커져 물결이 되어 그의 가슴 속에, 눈가에 찬찬히 고여 들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보호하느라 겹겹이 쌓아왔던 남자의 견고한 벽이 그 물결에 부딪혀 조금씩 허물어진다.

그 오랜 시간 동안 누구도 그를 이렇게 안아준 적은 없었다.

이런 위로를, 진심 어린 마음을 받은 적도 없었다.

하아.

그의 입술 새로 긴 숨이 빠져나와 소희의 귓가를 스친다.

지겸은 믿었다. 소희를 사랑하는 걸 허락받는 게, 그 자격이 주어지는 게 자신이 바라는 유일한 꿈이라고. 하지만 틀렸다. 그는 자신이 정말 무엇을 원하는지도 몰랐던 거다.

실은, 사랑받고 싶었다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도 사랑받고 싶었다고.

매일매일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숨을 쉬었다. 하지만 오늘처럼, 이 작은 여자의 품에 오롯이 안긴 이 순간처럼 숨이 제대로, 기꺼이 쉬어진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사랑해.

나도.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의 품 안에서 마치 하나라도 된 듯 깊숙이 서로를 파고들었다.

모든 건 그의 계획대로였다.

어느덧 너무 커져 버려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흘러나온 이 고백만 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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