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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희는 교수식당에서 학장과 함께 점심을 먹은 후 서둘러 주차장으로 나왔다. 커피 한 잔 더 하자는 제안을 몸이 안 좋다는 핑계로 거절까지 한 채였다. 어린아이를 집에 두고 나온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불안해서 밥을 먹는 동안에도 내내 안절부절못했다. 2시간은 넘게 떨어져 있었던 것 같은데. 그동안 혹시 자신이 곁에 있지 않아서 지겸이 아프거나 했으면 어떻게 하지.
“… 지겸 씨!”
그래서였을까. 아까 주차했던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자신을 기다리는 남자를 발견한 순간 기쁘고 벅찼다. 밖에 나와 차에 비스듬히 기대 있던 지겸은 다가오는 소희를 보자마자 그 어느 때보다 환한 미소를 지으며 두 팔을 벌렸다.
평소에 이런 건 정말 유치한 행동이라 여겼는데…. 그녀는 기꺼이 그에게 달려가 안겼다. 자신이 팔을 벌리면서도 이럴 줄 몰랐는지 제 품에 폭 안겨 온 소희를 보며 얼떨떨한 표정을 짓던 지겸이 곧 그녀를 더 꽉 끌어안았다.
“왜, 학장이 괴롭히기라도 한 거야? 교수회의 멋대로 박차고 나왔다고 혼났어?”
자신을 어르고 달래는 그의 말끝에는 뭉근한 웃음이 어려 있었다. 학교에서 친구들이랑 서운한 일 있었다고 하굣길에 투정 부리는 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또 심장이 제멋대로 간질거린다.
“그럴 리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우리 소희 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네.
깜빡거리는 여린 눈꺼풀에 따스한 입맞춤이 살짝 내려앉았다 떨어졌다.
예쁘다, 보고 싶다, 사랑한다.
그는 제 안을 가득 채운 감정을 어떻게든 표현하지 않으면 큰일 날 사람처럼 굴었다. 그녀만을 향해 끊임없이 속삭이는 사랑 고백이 어떻게 싫을 수 있을까. 매번 꾸밈없이, 덤덤한 듯 읊조리는 그의 목소리에 소희는 또 녹아내릴 것만 같다.
지겸이 소희에게 단단히 벨트를 매어주고는 조심스럽게 차를 몰았다.
봄이면 늘 목련이 흐드러지게 피는 학관 앞을 지나치며 소희는 생각했다. 아직 봉오리밖에 나오지 않은 저 나무가 크게 꽃을 피워내는 날, 그날도 그가 제 옆에서 이렇게 함께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고.
“근데 정말 괜찮아요?”
“뭐가?”
“심장….”
지겸은 정말로 멀쩡해 보였다. 떨어져 있던 시간이 짧아서일까. 의아해하는 소희를 느낀 지겸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사실 각인으로 인한 통증에 대해서는 의학적으로 밝혀진 게 별로 없어. 명확한 발병 원인을 모르니까 근원적인 치료도 불가능하고. 그래서 각인한 사람이 곁에 있거나 각인을 제거하는 게 치료법 대신이 된 거야. 각인한 커플이 일정 거리 이상 서로 떨어져 있게 되면 아픈 것도 마찬가지고.”
하긴 소희도 늘 궁금했었다. 그녀의 부모는 해외든 지방이든 대부분의 장거리 일정에 동행했다. 두 분이 떨어져 있으면 어머니는 괜찮지만, 아버지는 심각한 고통을 느끼시기 때문이었다. 왜 한쪽만 그럴까. 각인은 양쪽 다 똑같이 했는데.
“하지만 최근 학회 발표에 이런 게 있었어.”
“어떤 건데요?”
“이쪽으로 꽤 유명한 교수님의 연구 결과였는데, 상대방의 애정을 얼마나 신뢰하는지가 통증의 강도나 빈도수에 영향을 미친다는 거지.”
아. 소희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듣는 이야기였지만 충분히 수긍이 갔다. 서로 일정 거리 이상 멀어지면 심장에 통증을 느꼈던 아버지는 가부장적이고 고압적인 태도는 버리지 못할지언정, 그런 자신 때문에 어머니의 마음이 변하는 것은 아닐까 늘 불안해했다. 반면 어머니는 그녀에게서 분리불안 증세까지 느끼는 아버지를 갑갑해하고 안쓰러워하면서도 그 사랑만은 의심하지 않았다.
“어쩌면 각인은 결혼반지 같은 걸지도 몰라.”
“반지?”
아리송한 표현이다. 무슨 뜻인지 가늠하기 위해 소희가 지겸 쪽을 쳐다봤다.
“그렇잖아. 결혼반지는 두 사람이 부부이고 서로에게 종속되었다는 확실한 증표이지만, 실제로는 아무런 구속력이 없지.”
오래전부터 알파와 오메가 사이의 각인을 본능에서 오는 대단한 운명 같은 거라고 취급해 왔지만 정말 그럴까. 심장에 각인까지 하고도 그 상대를 믿지 못해서 괴로워하는 게 인간인데.
“그러니까 당신 말은. 각인이란 게 어쩌면 그렇게 큰 의미가 아닐 수도 있다는 거죠?”
소희의 반문에 지겸이 고개를 끄덕였다.
각인은 어쩌면 마음의 진정한 결속보다도 쓸모없는 것일 수 있다. 세간에 알려졌던 것과는 다르게, 베타의 사랑보다 알파와 오메가의 사랑이 더 대단하거나 뛰어날 것도 없다는 뜻이다.
사랑은 그저 사랑일 뿐.
소희가 곁에 없어서, 심장을 저미는 듯한 고통에 시달렸던 게 불과 얼마 전의 일이다. 그런데 지금의 지겸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몇 시간을 떨어져 있어도, 고통을 느끼기는 커녕 심장박동은 평소보다 더 규칙적으로 느껴졌다.
“네 고백을 믿으니까. 이젠 나한테 소희 너의 마음은 허상이 아니고, 그걸 지켜낼 자신도 있으니까.”
그의 확신은 묘한 뭉클함이 되어 소희의 안에 차곡차곡 쌓였다. 조금 전 그의 품에 안겼을 때 느꼈던 안온한 충족감이 다시 전신에 퍼졌다.
눈앞의 신호가 노란 불이 되더니 이내 빨간 불로 바뀌었다. 지겸이 왼손으로만 핸들을 안정적으로 잡은 채 천천히 브레이크를 밟으며 속도를 줄였다. 그리고 오른손을 들어 소희의 뺨을 감쌌다. 그가 손에 살짝 힘을 주니 소희가 운전석 쪽으로 끌려간다.
쪽.
가벼운 키스인 줄 알았던 입맞춤을 벌려 그가 더 깊숙이 파고든다. 순식간에 그녀의 입술 새를 비집은 남자의 혀가 부드럽게 소희의 입 안을 훑고 부딪는 혀를 빤다.
겨우 1분 즈음 흘렀을까.
빨간 불에 차가 멈춰 있는 동안 소희의 입술이 온통 타액으로 젖을 정도의 키스가 오고 갔다.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지겸은 다시 정면을 응시하고 차를 출발시켰다. 다만 여전히 그녀의 뺨을 감싼 다정한 손이 축축한 입술을 더듬어 닦아 준다.
허벅지 사이를 감도는 찌릿함에 소희가 무릎에 힘을 주며 좀 더 붙여 앉았다.
붉어진 볼을 식히기 위해 창문을 여니 바람에 실려 온 지겸의 페로몬이 소희의 코끝에 부드럽게 감돈다.
소희는 생각했다. 아주 오랜 뒤에 그와의 사랑이 시작되던 순간을 떠올린다면 아마도 오늘, 이 초봄의 바람이 기억날 것 같다고.
***
“삼촌?”
두 사람은 선영원에 들렀다. 지겸이 따로 받을 자료가 있어서이긴 했지만, 더 큰 이유가 있었다. 오늘 이곳에서 소희에게 모든 걸 털어놓아야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이다.
“와 진짜다! 지겸 아찌다!”
놀이터에서 바깥 놀이를 하던 아이들 몇이 지겸이 들어서는 걸 보자마자 소리를 지르며 달려왔다. 자주 봤던 얼굴인 듯, 아이들 모두 반가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지겸이 양팔에 한 명씩 매달고 놀이기구처럼 앞뒤로 흔들어주자 까르륵거리며 좋아하는 아이들의 웃음 위로 봄 햇볕이 따스하게 부서져 내렸다.
“언니는 누구예요?”
머리에 분홍 리본을 단 여자애 한 명이 주춤거리며 소희 옆으로 다가왔다. 예닐곱 살쯤 됐을까? 동그란 눈에 볼록한 볼이 귀여웠다. 소희는 무릎을 접어 아이와 눈을 맞추고 웃어줬다.
“안녕? 너무너무 반가워. 언니 이름은 소희야. 우리 예쁜 친구는 이름이 뭘까?”
소희가 손을 뻗어 여자아이의 틀어진 리본을 제대로 달아주려고 할 때.
여자애가 고개를 빼내고 몸을 한걸음 물렸다. 그러고 보니 소희를 향한 아이의 눈빛에 반가움보다는….
“지겸 삼촌이랑 무슨 사이예요? 설마 언니가 삼촌 여자친구예요?”
아. 그래서였구나. 자신을 향한 이 이유 모를 경계심의 원인이. 꼬마 숙녀가 상처받지 않게 어떤 그럴싸한 대답을 해 줘야 하나 소희가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맞는데. 주아에게 말한 적 있었지? 삼촌이 아주 많이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예쁘지?”
어느덧 다가와 있던 지겸이 소희의 어깨를 감싸 제 쪽으로 부드럽게 끌어당기며 대신 답했다.
앗. 지금 그런 말은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데. 소희가 이 눈치 없는 남자의 허리를 팔꿈치로 슬며시 쿡쿡 찔렀다.
왜?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지겸이 소희를 바라보는 순간, 아니나 다를까 주아의 커다란 눈망울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몰라! 못… 생겼어요! 싫어어아아아앙!”
“어머 주아야. 왜 울어, 응?”
원장 선생님이 여전히 울음을 그치지 않는 아이를 품에 안아 다독이며 인사했다.
“구 선생님 오셨어요? 오늘은… 다른 손님도 같이 오셨네?”
“안녕하세요. 임소희라고 합니다.”
“네 소희 씨. 어서 와요.”
자신을 응시하는 원장 선생님의 눈빛이 지극히 다정했다.
지겸이 원장실에서 대화를 나누는 동안 소희는 아이들을 모아놓고 동화책을 읽어줬다. <외톨이 공작새>라는 책이었다.
“저 멀리, 깊은 숲속에 아름다운 공작새 한 마리가 살고 있었대. 그 공작새는 다른 공작새와는 달랐어. 빨강, 초록, 파랑의 색색 가지 깃털이 햇살을 받으면 마치 무지갯빛 보석처럼 반짝반짝 빛났거든.”
“우와 부럽다!”
“나도 반짝이는 깃털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숲속의 다른 공작새들은 모두 그 무지개 공작새를 부러워했다. 어느 날 초록색 공작새 한 마리가 다가와 반짝이는 깃털을 한 개만 달라고 부탁한다. 하지만 무지개 공작새는 잘난 체하며 단칼에 그 제안을 거절한다. 화가 난 초록색 공작새는 그 일을 다른 친구들에게 일러바치고 무지개 공작새는 외톨이가 된다.
슬퍼하던 무지개 공작새는 어두운 동굴을 찾아가게 된다. 그때 올빼미 할머니가 나타나 가르쳐 준다. 다른 친구들에게 반짝이 깃털을 하나씩 나눠 주라고.
“그럼, 넌 이 숲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작새가 되진 못하겠지만 지금보다 훨씬 행복해질 거다.”
그래서 무지개 공작새는 자신의 반짝이 깃털을 모두 뽑아서 다른 공작새들에게 하나씩 나눠 주었다. 숲속은 어느덧 반짝이는 깃털로 가득하게 되었고 무지개 공작새는 돌아온 친구들 사이에서 편안함과 행복을 느꼈다는 이야기였다.
“왜 그래야 해요?”
소희가 책을 읽기 시작할 때는 멀리서 등지고 혼자 그림을 그리고 있던 주아가 어느덧 가까이 와 있었다.
“응?”
“친구들이 나빠요. 반짝이 깃털은 무지개 공작새 거잖아요. 그걸 안 줬다고 같이 안 놀아주는 건 치사해요.”
아이의 입술이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무지개 공작새를 대신해 진심으로 억울하다는 표정이 너무 사랑스러웠다.
소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게. 나도 주아랑 똑같이 생각해. 반짝이 깃털을 나눠줄 수도 있겠지만 안 그래도 되는 거야. 그건 무지개 공작새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돼. 우리는 우리의 깃털을 억지로 나눠주지 않아도 곁에 있어 주는 더 좋은 친구를 찾자.”
‘네, 맞아요’를 외치며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들을 소희가 흐뭇한 미소와 함께 쳐다봤다. 제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줬다는 생각에서인지 그녀를 향하는 주아의 눈빛도 조금 달라져 있었다.
“이제 보니 동심 파괴자였네?”
“어, 당신….”
고개를 돌리니 지겸이 문에 비스듬히 기대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입가에는 그녀를 향한 선명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소희가 답하듯 눈을 접어 웃어주자 그가 손을 뻗는다. 어느새 익숙해진 손길. 그의 크고 따뜻한 손 위에 소희가 제 손을 가만히 올려 잡는다.
“갈까, 보여줄 게 있어.”
“응.”
서로의 손가락이 사이사이 깊게 얽힌다.
소희 네가 그 초록 공작새였다면, 난 무지개 공작새 놈을 기절시키고 반짝이 깃털을 전부 뽑아다 줬을 거야.
“미쳤어, 진짜….”
또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제 귓가에 속삭이는 남자. 그런 지겸을 소희가 노려봤지만, 그 순간 눈꺼풀 위로 간지러운 키스가 내려앉는 바람에 마음껏 싫은 티를 낼 수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