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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강탈-81화 (8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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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제로 운영하는 프라이빗 라운지. 보통은 밤에만 영업하지만 오늘은 임 재단장 때문에 특별히 낮에도 문을 연 모양이었다. 지겸이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가게 주인으로 보이는 화려한 외모의 여자가 알은체를 해 왔다.

“어머머 전무님! 너무 오랜만 아니세요? 요즘 통….”

“…안내해 주시죠.”

하지만 지겸은 무감한 표정으로 여자의 말을 단번에 끊을 뿐이었다. 당황한 여자가 알쏭달쏭한 표정으로 그의 눈치를 살폈다.

“네, 네. 늘 만나시는 가장 안쪽 방에서 이미 기다리고 계십니다.”

여자는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앞서서 안내하다가 불현듯 무언가 떠오른 모양인지 뒤를 돌았다. 파드득 논란 몸짓이 부산스러워 지겸이 미간을 조금 찌푸렸다.

“앗. 그럼, 혹시 구지훈 전무님이 아니라 그….”

“사장님. 이런 가게를 운영하시는 분치고 말씀이 많으신 것 같네요.”

“아, 전 그러려던 건 아니라…. 시, 실례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방 앞에 다다른 지겸이 문을 열려다 말고 여전히 뒤에 서서 기다리고 있던 주인을 향했다.

“오늘 일에 대해서도 충분히 주의, 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말이 새어 나가서는 안 되니까.

“네, 그런 부분에선 염려하지 않으셔도 되어요. 다시 한번 사과드려요.”

그제야 상황을 완벽하게 파악한 여자의 사무적인 미소에 지겸이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방으로 들어섰다.

“어서 오시게, 구 박사.”

“몇 달 만에 뵙습니다.”

이미 혼자서 한잔한 건지 그의 앞에 위스키 잔이 놓여 있었다.

“사실 전화 받고 조금 놀랐네. 다신 연락이 없을 줄 알았거든.”

“그러셨습니까.”

술에 취해서인지, 아니면 뭔가 기대하는 구석이 있는 건지 지겸을 마주한 재단장의 얼굴은 조금 상기돼 있었다.

“역시 소희랑 다시 만나는 건가?”

먼저 불쾌해진 건 지겸 쪽이었다. 제 딸에 대해 알고 싶은 게 정말 그런 것뿐인가. 재단장의 행보를 계속 지켜봤지만 그는 시대와 맞지 않게 가부장적인 인물이었다. 게다가 소희의 상황과 혼사를 빌미로 얻을 이득만을 계산해 온 사람이란 걸 알고 있기에 얼굴을 마주할수록 더욱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 부분을 꼭 재단장께 말씀드려야 할 의무는 없는 것 같습니다만.”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조금 날카로운 대답이 나간 것도 사실이다.

“허허 자네도 참. 내가 소희 아비인데 그렇게 말하면 서운….”

툭. 민망해하는 남자 앞에서, 지겸은 더 말하지 않고 준비해 온 서류 봉투부터 내려놓았다.

“이게… 뭔가?”

“먼저 확인해 보시죠.”

“흠.”

재단장은 소파 깊숙이 기대앉은 채 지겸이 건넨 서류를 느긋하게 살폈다. 하지만 등을 편히 기대고 있던 자세는 자료를 하나씩 확인할수록 앞으로 당겨졌고,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갔다.

“자네가 이걸 다 어, 어떻게. 대체 이게 무슨.”

그의 손은 육안으로도 알 수 있을 정도로 확연히 떨리고 있었다. 목이 타는지 위스키 잔에 손을 가져갔다. 자꾸 미끄러지는지 몇 번이나 시도한 끝에 잔을 드는 데 성공했다.

싱가포르에서 소희와의 일이 있었을 때, 지겸은 곧바로 재단장과 통화를 했었다. 당시에 그는 모든 걸 알고 있다는 사실은 숨겼다. 다만 베논 제약과 재림재단이 나라가 금지해 온 알파/오메가 진단 혈액검사를 번번이 시행하고 이걸로 뇌물을 받거나 연구비를 지원받은 사실에 대한 것만 지적했다. 그것만으로도 놀랐던 임 재단장은 어차피 지겸도 구회장의 아들이고 베논 제약 사람이니 자신에게는 큰 손해가 아니라는 계산 끝에, 소희와의 불미스러운 상황에 대해서도 넘어가기로 했던 것이다.

하지만 몇십 장 남짓한 종이에는 베논 제약과 재림 생명 공익재단이 결탁해 10년 넘게 저질러 온 모든 만행이 낱낱이 정리돼 있었다. 선영원의 어린아이들을 대상으로 행했던 불법적인 임상 시험은 물론, 나라가 금지해 온 알파/오메가 진단 혈액검사를 번번이 시행하고 그 특권을 누리고자 하는 정·재계 인사들에게 금전적, 행정적 이득을 취해 온 실상들이. 게다가 자료에 담긴 건 그뿐이 아니었다.

“최근에 보건복지부 서 장관의 자제분, 재림대 병원에서 시술받은 것도 알고 있습니다.”

심증만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의 반응을 보면 잘못 넘겨짚은 것인지, 아니면 정말 제 예상이 틀리지 않았는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그건 어쩔 수 없었네. 이미 작년부터 약속했던 일이었고. 그래도 구 회장의 요청으로 최근 몇 달간 우성 강화 시술 횟수는 확연히 줄였네. 왜 그러는 건가 궁금했는데 아마 자네와 논의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은데….”

재단장은 지겸이 내민 미끼를 물었다. 그는 자신이 무슨 정보를 주고 있는지도 모르고 사건의 전말을 토해냈다. 역시 지겸의 예상대로 아버지는 애초에 약속을 지킬 생각이 없었다.

초기 베논 제약과 재림대 병원은 혈액검사를 통해 알파/오메가 여부를 판별하는 항체 개발을 목표로 공동 연구를 진행했다. 결과는 성공. 그러나 나라에서는 생명윤리법을 근거로 관련 기술 사용을 제한했다. 그런데도 그들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베논과 재림 생명 공익재단은 오랜 연구 끝에 개개인의 알파/오메가 여부를 나타내는 항원과 결합하는 약을 만들었고, 그를 이용해 항원의 역할을 극대화할 방법을 찾아냈다. 그 결과 베타를 알파로 만들 수는 없지만, 열성 알파를 우성 알파로, 열성 오메가를 우성 오메가로 만드는 건 가능해졌다.

최근 지겸의 연구팀이 얻은 성과도 비슷한 연장선에 있는 것이었으나, 그는 이 모든 게 치료 등의 목적으로만 정당하게 쓰일 거라고 믿었다. 개개인의 사리사욕을 채우고 지배층의 권력과 유착을 더 공고히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논의요? 아니요. 이게 과연 협의할 문제일까요. 제가 요구한 건 관련 시술을 전면 멈추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저와의 약속을 이 정도로 가볍게 여기실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던 건 아닙니다만.”

재단장은 그제야 자신이 지겸에게 확증을 줬다는 것을 알고 당황해 어쩔 줄 몰랐다.

“제가 이 서류를 가지고 검찰도, 아버지도 아닌 재단장님을 찾아온 것은 그나마… 말씀이 통할 분이라고 생각해서입니다.”

구 회장이 주도해 온 것은 맞지만, 시술할 병원과 의료진이 갖춰지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베논 제약 측에서 매년 몇천 억이 넘는 연구비를 충당한다 해도, 재림의료원의 적극적인 협조와 기술보조가 없었다면 이 모든 건 꿈도 꾸지 못했을 거다. 임 재단장은 완벽한 공조자였다. 지겸이 마음을 먹은 이상 어차피 그 개인이 법망을 피해갈 방법은 없다.

다만 그가 어떤 인간이든 소희의 친부이니까. 마지막으로 기회라도 주고 싶었다.

재림재단이 소희와 아무 연관이 없었다면 지겸은 고민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소희에 대한 것을 차치하고서라도 실제로 재림대와 의료원은 이 사회에 기여하는 바가 컸다. 고작 한 제약회사의 존폐에 대한 고민보다는 확실히 무거운 의사결정이다.

“그, 그래서 나한테 정확히 바라는 게 무엇인가.”

“몇 주 안에, 검찰 조사가 시작될 겁니다. 조사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시는 것은 물론, 가지고 계시는 여타 자료와 증거들을 먼저 제게도 넘겨주십시오. …솔직히 말씀드리죠. 거절하신다고 해도 제가 손해 보는 것은 없습니다. 조사가 없던 일이 되지도 않을 거고요.”

재단장은 기민한 사람이라, 이미 그 정도는 파악했으리라. 지겸이 건넨 자료만으로도 자신의 구속은 확실해 보였으니까.

“다만 제 요청을 들어주신다면 재림의료원이 얻을 것은 있겠지요. 상급 종합병원에서 강등되는 것은 막아드리겠습니다.”

의료법 위반의 경우 개인의 처벌보다 관련 의료기관에 대한 행정적인 처분이 더 문제가 된다. 그동안의 비리가 밝혀진다면 재림의료원의 병원 등급 강등은 당연한 수순일 테다. 병원의 위상이 실추됨은 물론 기존의 유능한 교수들이 대거 이탈할 것이다. 당분간 연구비 투자도 줄어들 것이고 새로운 교수 수용 범위도 줄어든다. 단순히 당장 병원 수익구조에서의 문제를 넘어 장기적인 관점에서 병원의 앞날이 어두워진다고 볼 수 있었다.

“시간을, 시간을 조금만 주게.”

지겸의 눈썹 끝이 묘하게 휘어졌다. 지금 이 상황에서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라도 세워보려는 수작일까.

“고민하실 여유가 있으신가 보네요.”

“그렇다기보다는 나도 아무래도 이것저것 고려해야 할 것들이 있으니 그렇지.”

소희와 어쩜 저렇게 다를 수 있을까. 아버지라는 사람이 병원의 이익과 개인의 사리사욕을 위해 딸의 인권은 철저히 짓밟아왔다. 지금까지의 잘못을 떠올린다면 부끄러워서라도 저렇게 고민하는 척은 하지도 못할 것 같은데.

후. 지겸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재단장이 고개를 들었다. 마주한 지겸의 표정은 조금 전보다 한층 더 가라앉아 있었다.

“작년에 건강검진을 핑계로, 소희에게 저지른 일 전부 알고 있습니다.”

“뭐…?”

놀란 재단장의 얼굴이 핏기가 가신 듯 보였다.

“냉동해 두신 것, 전부 당장 폐기하시죠.”

오늘 그를 따로 만난 진짜 이유는 이것이었다.

작년에 소희가 몇 회에 걸쳐 꾸준히 맞았던 호르몬 주사, 산부인과 검진, 내시경을 핑계로 했던 수면 마취. 실은 전부 소희의 난자를 채취하기 위함이었다.

구 회장과 임 재단장은 시술과 약을 통해 단순히 알파/오메가로서의 형질을 극대화하는 것을 넘어, 정자와 난자의 수정 단계에서부터 관여해 우성적 유전형질만을 갖춘 일종의 ‘슈퍼 베이비’를 태어나게 할 목적으로 연구를 진행 중이었다. 그 연구에 사용하기 위해 본인의 동의도 없이 소희의 난자를 채취해 냉동했다. 결혼 후 자연스럽게 지훈의 정자와 인공수정을 시도할 계획이었겠지.

“그, 그건! 사실 소희를 위한 일 아닌가. 제 자식이 누구보다 뛰어나게 태어난다는 데 싫어할 부모가 어디 있다고!”

“이 세상 사람들이 다 아버지나 재단장님 같은 줄 아십니까. 소희가 진심으로 기뻐할 것 같으냐 이 말입니다. 무엇보다 개인의 동의도 없이 어떻게 그런 짓을 딸에게…!”

지겸이 오른 주먹을 꽉 쥐었다. 최대한 자제하려고 했지만 격한 감정이 올라오는 것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그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임 재단장은 뭔가 더 변명해 보려다 도저히 하기가 어려운지 입술만 달싹였다.

흥분이 진정된 지겸이 다시 담담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잘 아시겠지만, 불법적인 의료시술이라고 해 봐야 살인죄가 아니라면 5년형이 최고입니다. 하지만 거기에 생명윤리 및 안전에 관한 법률 위반이 죄목으로 추가된다면 달라지겠죠.”

병원 명성에도 금이 갈 테고.

짧은 시간 여러 각도로 머리를 굴리는 남자의 얼굴을 지겸이 사뭇 무감하게 응시했다. 하지만 그 눈빛만은 몹시 차갑고 매서워서, 임 재단장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조금 웅크렸다.

“아, 알겠네. 뭐든… 자네가 하자는 대로 하지.”

그가 마지막 남은 몇 모금의 위스키를 한 번에 입에 털어 넣으며 답했다. 독한 술이 목을 타들어가게 하는지 얼굴을 찡그렸으나 전혀 안쓰럽지 않았다. 지켜보던 지겸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혹시 저와 나눈 이야기나 보신 서류에 관해 발설하거나, 오늘 이후로 아버지나 베논 제약 쪽 사람 누구든 관련 일로 접촉하신다면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을 겁니다.”

“…명심하지.”

“그럼, 전 이만. 곧 연락이 갈 겁니다.”

조금 전까지 폭탄을 던진 사람답지 않게 지겸은 태연하고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돌아섰다.

“자, 잠깐.”

임 재단장의 간절한 부름에 방을 나서려던 지겸이 뒤를 돌았다.

“설마 자네, 소희의 일까지… 알고 있는 건가?”

지겸의 눈에 묘한 이채가 감돌았다. 느릿하게 주먹을 쥐었다가 펴고는 그를 똑바로 노려보며 답한다.

“아뇨. 알아도, 평생 모른다고 생각하고 살 겁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게 가장 중요한 일일지 몰라도, 자신에게는 아니다.

쾅. 더는 그와 한 공간에 있고 싶지조차 않아서, 지겸은 거칠게 문을 닫고 나왔다.

소희가, 너무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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