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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희는 오랜만에 꿈조차 꾸지 않고 깊은 잠을 잤다. 어젯밤에 무리해서일까, 정신은 슬슬 깨는데 온몸이 나른하기만 했다. 가물거리는 그녀의 아침을 깨운 건 고소한 음식 냄새였다.
일어나라는 속삭임 대신 채근하는 듯한 달달한 키스가 얼굴 여기저기에 퍼부어졌다.
“으응….”
간지러워서 지분대는 입술을 손으로 밀어내자 이번엔 그 손끝에 지겸의 입술이 내려앉는다.
“밥 먹자 소희야. 응?”
그가 코로 그녀의 목덜미를 간질였다가 손가락 끝을 살짝 깨물어버린다. 그래도 깨고 싶지 않았다. 그의 체향이 가득 맴도는 침대 위가 너무 안온하고 따스하다.
소희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손을 뻗어 그의 목 뒤로 팔을 감았다. 남자는 기꺼이 그녀에게 끌려와 가슴에 얼굴을 기댔다. 물론 무겁지 않도록 제 무게까지 전부 싣지는 않았지만.
지겸이 그녀의 심장 소리에 귀 기울이는 게 느껴졌다. 느른한 호흡에 쇄골뼈가 간지럽다. 두근, 하고 두 사람을 이은 울림이 하나로 합쳐졌을 때쯤.
할짝.
순식간에 소희의 실크 로브 끈이 스르륵 풀리더니 축축한 혀가 어제 하도 시달려 부은 유두 끝을 슬쩍 핥았다.
“핫!”
놀란 소희가 그제야 눈을 번쩍 떴다. 미소를 머금은 채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던 남자가 당황해 떨리는 입술에 가벼운 입맞춤을 했다.
“어서 일어나야지. 어젯밤에도 제대로 못 먹었잖아.”
지겸은 방금 자신이 한 짓은 기억도 안 난다는 듯이 시치미를 뚝 뗀 표정과 담백한 몸짓으로 그녀를 일으켰다. 소희가 황급히 로브 끈을 다시 여미면서 그를 노려보았다.
“씻고 와, 다 식기 전에.”
“변태….”
그녀의 질책에 지겸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올라간다.
“흠. 난 또 네가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어젯밤에도 분명 변….”
“모, 몰라, 나 얼른 씻고 나올게요!”
지겸의 말을 더 들을 자신이 없어진 소희가 쏜살같이 욕실로 사라졌다. 침대에서 일어나는 순간 아래쪽에 뻐근한 둔통이 느껴졌지만, 다행히 심하지는 않았다. 문 뒤로 쏙 사라지는 몸짓 뒤로 지겸의 짓궂은 웃음소리가 뒤따랐다.
욕실과 연결된 작은 파우더룸에는 언제 놓아둔 건지 속옷과 얇은 니트 원피스가 놓여 있었다. 놀라울 정도로 세심한 남자의 배려가 고마우면서도 민망해 눈을 질끈 감았다.
소희가 다시 나왔을 때, 지겸은 일하는 중인지 노트북 스크린에 집중하고 있었다.
방 2개는 합쳐 놓은 듯한 넓은 공간의 창가 쪽, 그가 앉은 가죽 의자 앞 라운드 테이블에는 소담한 아침 식사가 차려져 있었다. 인기척이 들리자 지겸이 바로 고개를 들고 소희를 향해 미소를 짓는다. 처음 보는 장면인데도 어쩐지 늘 이랬던 것만 같은 기시감이 든다. 걸음을 옮기는 발뒤꿈치에 어쩐지 힘이 들어갔다.
“어서 와서 먹어.”
전복 미역국, 갈치구이와 애호박전을 비롯한 몇 가지 밑반찬. 평소에 아침을 잘 챙겨 먹지 않는 소희에게는 과할 정도로 정성스러운 한상차림이다.
“당신은요?”
그의 맞은편 의자를 빼서 앉으며 소희가 물었다.
“난 운동하기 전에 먼저 조금 먹었어.”
“운동?”
“응, 매일 새벽에. 습관이라 혼자 다녀왔어. 깊이 잠든 널 깨우고 싶지도 않았고.”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이며 소희가 쉽게 수긍했다. 하긴 꾸준히 운동하지 않으면 절대로 유지될 수 없는 그런 몸이긴 했다. 자기도 모르게 어제 잔뜩 봤던 지겸의 맨몸을 떠올려 버린 소희가 얼굴을 조금 붉혔다.
“임소희. 이상한 생각은 그만하고.”
그가 말랑한 소희의 볼살을 아프지 않게 쥐고 흔든다.
“하지 므여….”
큭. 다시, 그의 웃음. 창문으로 비추는 햇살 때문인가, 참 포근하다.
“방금 국 다시 데워왔어. 따뜻해.”
호록. 따뜻한 미역국이 배 속을 채우니 피곤이 풀리며 온몸이 훈훈해지는 기분이다. 엄청 맛있네, 간도 잘 되어 있고. 약간 익숙한 듯한 맛인데. 어쩐 일이지?
“맛있…는데요?”
맛있어서 이상하다는 소희의 표정에 지겸의 눈썹 끝이 미묘하게 들린다.
“여사님께 미리 부탁드려서, 운동 다녀오는 길에 본가에서 받아왔어.”
내가 직접 하는 것보다 그걸 더 좋아할 것 같아서.
아. 최근까지도 계속 김 실장을 통해 전달받았던 그 음식들을 만들어 주신 분. 뭘 그렇게까지. 지겸이 만들어 주는 싱거운 음식도 어쩐지 먹다 보면 익숙해질 것도 같았는데. 조금 서운한 듯 말하는 남자가 조금 귀엽게 느껴졌다. 괜스레 코끝이 간지러운 기분.
지겸은 그녀의 손에 숟가락을 쥐여 주고는 젓가락으로 생선 살을 바르기 시작했다. 껍질을 벗겨내고 가운데 얇은 뼈를 완벽하게 분리해 내는, 지나치게 진지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곳이 무슨 수술실이라도 된 듯한 착각이 들었다.
어, 그러고 보니 또….
“원래 안경… 썼었어요?”
생각해 보니 싱가포르에서도 이렇게 안경을 쓰고 일을 하던 모습이 자연스레 겹쳐 보였다.
“아 어릴 때부터, 필요할 때만. 아주 나쁘진 않아.”
“지훈….”
그건 둘 다 비슷한 건가. 구지훈도 늘 안경을 쓰고 다녔다.
“형은 눈 좋아.”
무슨 질문인지 이미 안다는 듯, 그가 소희의 숟가락 위에 반찬을 올려놓는 데 더 집중하며 담담하게 말했다.
“응? 그런데 왜 항상 안경을?”
“너랑 처음 만났던 날, 내가 안경을 쓰고 있었으니까.”
놀란 소희가 입으로 숟가락을 가져가려던 동작을 멈췄다. 그러니까 구 회장은, 소희를 구한 게 지겸이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지훈에게 평생 도수도 없는 안경을 쓰게 했던 거다. 경악스러운 마음을 감출 수가 없다. 그런 그녀를 눈치챘을 텐데도 지겸의 태도나 표정에는 변함이 없다. 어서 먹으라며 발라둔 생선 살을 하나 더 올렸을 뿐.
지겸에 대해 알면 알수록 신기했다. 어쩌면 저렇게 평온해 보이지. 자신을 둘러싼 상황에 초탈한 것처럼 보일 정도다. 하지만 소희는 이제 그가 스스로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꼭꼭 숨겨둔, 깊은 속에 드리운 그늘을 모르지는 않는다.
“왜 그렇게까지… 하셨을까요?”
당신의 아버지는.
물론 이제는 안다. 구 회장이 가지고 있던 상처와 열등감, 그로 인해 뒤틀려버린 가족관계. 하지만 그건 소름 끼치는 변명에 불과하다. 이 세상에 완벽한 사람이 없듯이 완벽한 부모도 없겠지. 그들도 나약하고 불완전할 뿐이고, 부족한 인간이 다른 존재를 보살피고 책임지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일 거다. 그렇다고 부모의 이름으로 저지른 잘못들이 무조건 용서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자신도 언젠가 부모가 되겠지만, 과연 얼마나 잘 해낼 수 있을까.
소희도 그렇지만 지겸 또한 남들이 보기엔 넘칠 정도로 좋은 환경에서 자랐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로열 알파/오메가 집안, 타고 태어난 뛰어난 능력. 먹고 싶은 걸 먹지 못한 적도, 갖고 싶은 물건을 가지지 못했던 적도 없을 것이다. 다만 비싸고 좋은 것들을 누리게 해 준 것으로 부모의 역할이 끝나는 건 아닐 거다.
그는 아이로서, 자식으로서 응당 받아야 할 걸 받지 못했다. 부모의 관심과 사랑, 온전히 보호받고 있다는 믿음. 그래서 앞으로 커서 또 누군가에게 그렇게 사랑받을 수 있으리란 기대. 그래서 완벽하고 단단해 보이는 지겸에게서 가끔 엿보이는 지독한 결핍이나 외로움을 발견할 때면 소희의 맘이 더 쓰렸다.
“글쎄…. 그게 아버지의 최선이었겠지.”
삶을 저버리지 않기 위한.
지겸은 평생 제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이해하려고 노력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이 저지른 잘못에 확실한 죗값을 치르게 할 계획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었으면 그와 달랐을 거라고 자신하진 않는다. 정작 그 입장이 되어 보기 전까지는 누구도 확신할 수 없는 거다.
사람은 저마다 자신만의 돌을 짊어지고 산다. 남의 돌이 내 돌보다 가벼워 보여도 실제로 그럴지는 아무도 모른다.
소희가 손을 뻗어왔다. 심각한 생각 때문인지 주름이 진 그의 미간을 손끝으로 살살 눌러 폈다. 그녀의 의도를 알아채고 지겸이 표정을 좀 더 부드럽게 풀었다. 그런 남자를 향해 소희가 자신이 지을 수 있는 한 가장 밝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젠 됐어요. 괜찮아요.”
“뭐가?”
“음 그냥….”
자신이 있어 줄 테니까. 너무 외롭고, 그녀가 간절한 이 남자 곁에.
그의 그늘진 과거까지 전부 밝혀 줄 순 없겠지만, 자신이 곁에 있음으로써 지겸의 오늘이 조금이라 괜찮아질 수 있다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피식. 지겸의 웃음이 몽글하게 퍼진다. 그가 챙겨준 그대로 숟가락에 담긴 음식을 입에 쏙 넣고 열심히 씹으면서, 소희는 생각했다.
맛있다고. 참, 맛있다고.
***
교수 회의에 제대로 참석하지 못했던 소희는 대신 학장을 만나기로 했고, 지겸은 그녀의 아버지인 임 재단장과 선약이 있었다. 재림대에 도착한 지겸은 얼마 전과 비슷한 자리에 주차했는데, 소희가 한참을 머뭇거리며 내리지 못했다. 며칠 전 그에게 사고가 난 줄 알고 놀랐던 기억이 다시 떠올라서였다.
“왜 그래, 응?”
그녀의 손을 가만히 잡고 그 손등에 입을 맞추면서 지겸이 물었다.
“약속… 있다고 했죠?”
그럴 필요 없다는 걸 알면서도 소희는 괜스레 불안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응. 오래 걸리지 않아. 너 나올 땐 이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차에서 내리면 그가 사라질 것도 아닌데 우습게도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며칠을 내내 붙어 있어서일까. 잠시라도 헤어지기 아쉬운 마음이었다.
“앗! 근데 우리 이렇게 떨어져 있는 건… 괜찮아요? 당신….”
소희가 제 마음을 깨닫고 그와 함께하기로 했다고 해도, 여전히 지겸 쪽의 각인만 남아 있었다. 그녀는 그 각인 때문에 지겸이 또 아파지는 건 아닐지 걱정이었다.
“금방이잖아, 괜찮아.”
그가 소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입가를 올려 웃어주었다.
“아니면… 내가 학장실까지 손잡고 데려다줄까?”
혼자 들어가기 무서워?
“뭐? 아니에요! 내가 무슨 유치원생도 아니고. 그런 뜻 아니야!”
그새 귓바퀴까지 빨개진 소희가 귀여워서, 지겸이 귓불의 여린 살을 슬쩍 깨물었다.
“흣…. 학교에서 이런 거 하지 마요! 나, 나 갈게!”
이런 게 뭔데. 라고 여상하게 되묻는 남자를 두고 소희는 황급히 차에서 내렸다. 일부러 돌아보지도 않고 서둘러 걷는 뒷모습에서 그는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지이잉. 그렇게 소희가 보이지 않게 됐을 즈음 지겸의 전화가 울렸다.
“응, 유현아.”
- 형 어젯밤에 엄청 전화했는데. 전화기 계속 꺼져 있어서 걱정했잖아요. 부재중 통화 못 봤어요?”
“봤지.”
봤지만, 그 밤에 전화할 정도면 꽤 급한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무시했다. 소희와 함께 있는 순간을 누구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아서.
“미안. 무슨 일 있어?”
- 그게 아무래도 보건복지부 장관 딸. 그, 시술… 받은 거 같아요.”
후. 지겸에게서 낮은 한숨이 뱉어졌다. 그럴 줄 알았지만, 혹시나 하고 기대했던 자신이 바보 같다. 사람은 그리 쉽게 변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진료 기록… 확보했어?”
지겸이 담배를 꺼내 물려다가 도로 담뱃갑에 집어넣었다. 소희가 싫어할 거다.
- 아, 아뇨. 그런 건 아닌데… 그 친구가 최근에 SNS에 업데이트를 했더라고요.”
“SNS?”
- 친구들이랑 파티했던데. 로열 오메가로 발현된 걸 기념한다나 뭐라나…. 하여튼 제가 주소 보낼 테니까 들어가 보세요.”
보건복지부 서 장관의 딸이 올해 열일곱이라고 했다. 알파/오메가 발현은 2차 성징이 나타나는 10대 초부터 성인이 되기 직전까지의 시기에 나타난다. 발현 시기에 있어 개인차가 큰 남자에 비해, 대부분의 여자는 첫 생리가 시작되는 10대 초반에 성질이 발현된다. 물론 사람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겠지만 열일곱은… 늦은 편이다.
최근에 잦았던 제 아버지와 서장관의 회동, 그 딸의 오메가 발현 소식. 결코, 우연은 아닐 것이다.
“그래. 그리고 유현아, 민주영 아나운서 인터뷰 이번 주 안에 녹화해 줘.”
- 이제…시작이네요.
“응. 때가 된 것 같네.”
유현과의 전화를 끊은 지겸이 검지로 핸들을 톡, 톡 반복해서 치며 생각을 정리했다. 원래대로라면 오늘은 임 재단장을 만나 가볍게 의중만 떠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걸로는 부족할 것 같다. 좀 더 확인이 필요하겠지만, 아버지가 자신과의 약속을 지킬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안 이상 더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가 글로브 박스를 열고 그 안에 든 서류봉투를 꺼냈다.
차창 밖 하늘이 어느새 흐려졌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