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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겸에게 마음을 고백하고, 그를 만나게 되면서 소희에겐 작은 버릇이 생겼다. 그의 옆모습을 몰래 관찰하는 것. 운전이나 요리와 같이 다른 뭔가에 집중할 때가 아니면 항상 진득하게 그녀에게만 시선을 고정하는 남자이기 때문에, 소희로서 방해받지 않고 그를 마음껏 볼 수 있는 건 이런 순간뿐이었다.
매끈하게 튀어나온 눈썹뼈와 미간에서 코끝까지 직선으로 높고 곧게 뻗은 콧대는 짐짓 날카로우면서도 다분히 남성적이었다. 동양인치고 깊게 파인 아이홀은 옆에서 보면 더 도드라졌다. 그리고 입술은…. 음, 그건 넘어가자. 괜히 입 안이 바짝 마른 기분에 소희가 작게 침을 삼켰다.
“뭘 그리 빤히 봐.”
여전히 전방을 주시하면서도 그녀의 시선을 기민하게 알아채는 남자다. 그의 입술이 호선을 그리며 살며시 올라갔다.
“내가 언제요.”
후다닥. 빤히 아는데도 황급히 시선을 거뒀다. 미쳤나 봐. 왜인지 모르겠지만, 소희는 아까부터 자꾸 지겸의 입술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가끔 아니 솔직히 자주. 잠들기 전에 스치듯 저 입술의 감촉이 떠오른 적이 여러 번이다. 그녀의 목덜미, 쇄골뼈, 손목, 발목…. 그뿐 아니라 보통 사람의 시선이 닿을 수 없는 구석구석까지도 온통 빼곡했던 붉은 순흔들. 그러면 자신도 모르게 아랫배에서부터 뭉근하게 습하고 야릇한 욕망이 모여들었다. 감각은 이토록 기억보다도 정직하다.
“어머니… 어디에 모셨어요?”
이상한 생각으로 다시 머리가 가득 채워지기 전에 소희가 재빨리 다른 화제를 꺼냈다.
“이천.”
답하는 그는 덤덤해 보였지만 확실히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지겸의 어머니가 그가 어린아이였을 때 돌아가셨다는 건 소희도 부모님께 들어서 알고 있었다. 자세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모임에서 몇 번 뵈었던 그의 어머니가 온화한 미소가 어울리는 굉장한 미인이었던 건 떠오른다. 반짝이던 모습이 어린 소희의 뇌리에도 남았을 만큼. 직접 만나 뵐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긴장이 됐다.
“편히 생각해. 널 보는 것만으로도 기뻐하실 분이니까.”
정말로 소희를, 자신이 사랑하는 유일한 여자를 어머니가 보셨으면 좋았을 텐데. 순간 그의 얼굴에 스미는 쓸쓸한 그늘을 소희도 알아봤다.
지훈과 지겸의 차이는 거기에 있는 것 같았다. 지겸은 단단하고 흔들림 없어 보이는 사람이었지만 그런데도 어딘가 묘한 결핍이 느껴졌다. 그 빈 곳조차 자기만의 방식으로 받아들이는 듯 보여도, 때때로 뼛속까지 스며든 외로움이 느껴졌다.
지치지도 않고 그녀의 안에 파고들 때, 잠시도 쉬지 않고 온몸을 부딪쳐 올 때. 어쩌면 그가 그녀에게 갈구하던 건 그런 채워짐이었을까. 그렇다면, 어쩌면…. 이젠 자신이 그 빈자리를 조금이라도 메워줄 수 있지 않을까. 처음으로 소희의 맘속에 기꺼이 그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 옆의 한 남자를 위해서라면.
***
지겸을 따라 도착한 곳은 여타 봉안당과는 달랐다. 동그랗고 예쁜 돌만 모아 만든 듯한 낮은 돌담을 지나치면, 연둣빛 정원이 앞뒤로 펼쳐지고 큰 창이 있는 예배당을 중심으로 작은 호수가 둘러져 있었다. 마침 오늘따라 하늘도 구름 한 점 없이 파래서, 이곳의 분위기가 더욱 평온하고 따뜻하게 느껴졌다.
지겸은 오늘도 직접 차 문을 열어 준 뒤 내리는 그녀의 손을 단단히 붙들어 주었다. 마주 잡은 손 온도가 높았다. 그의 한쪽 손에는 소희에게 선물했던 것과 다른 새로운 꽃다발이 들려 있었다. 어머니께 드리려고 준비한 것 같았다.
“왜 빨간 장미를….”
이럴 땐 보통 흰 국화를 준비하지 않나. 갸우뚱하는 소희를 향해 그가 희미하게 미소 짓는다.
“어머니가 좋아하셨거든.”
소희는 순간 제 엄마는 무슨 꽃을 좋아하셨는지 떠올려 봤다. 그녀의 엄마도 생화를 좋아하시긴 했지만, 특별히 좋아하는 꽃이 뭔지는 몰랐다. 반면에 지겸은 당시 어린 나이였는데도 어머니의 취향을 자세히 기억하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그는 소희의 취향도 놀랍도록 꿰고 있었다. 함께 휴가를 보냈을 때, 지나가듯 했던 이야기들을 전부 기억하고 있는 건 기본이다. 다정하고 세심한 건 어릴 때부터 타고난 남자인가 보다.
“어머니, 저 왔어요. 소희도.”
지겸이 소희의 어깨를 살짝 안듯이 감쌌다. 그의 어머니를 모신 곳에는 예전에 둔 것인지 바싹 마른 붉은 장미꽃과 액자가 놓여 있었다. 어제 바닷가에서 봤던 지겸의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 웃음이 사진 속 여성의 얼굴에 겹쳐 보였다. 소희가 천천히 고개를 숙이고 묵념하듯 눈을 감았다. 그런 그녀를 보던 지겸이 새로 가져온 꽃다발과 이전의 꽃을 바꿔서 올리더니 함께 눈을 감았다. 두 사람은 어디선가 그들을 지켜보고 계실 어머니에게 각각 다른 약속을, 같은 마음으로 속삭였다.
봉안당을 돌아 나오던 두 사람은 돌담 앞 막 꽃잎을 터뜨리려는 매화나무 아래 벤치에 앉았다. 아직 채 개화하지도 않은 홍매(紅梅) 향이 어디선가 은은하게 감도는 것만 같았다. 소희는 말이 없는 그의 옆에 그저 함께 앉아 있을 뿐이었다.
“어머니…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어.”
잔잔한 물소리만 들리던 고요한 공간에 그의 나지막한 저음이 조심스럽게 울렸다.
“그걸 처음 발견했던 게 나고.”
애써 담담하게 들으려 했던 소희가 놀라 지겸을 쳐다봤다.
“침대에 누워 있는 모습이 너무도 평온하게 보여서. 안아도 보고, 한참을 흔들어 본 뒤에야 알았어.”
흡. 소희가 저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아직도 가끔 그날의 꿈을 꿔.”
조금 더, 내가 조금만 더 빨리 발견했으면 좋았을 텐데.
허공을 응시하던 지겸의 얼굴이 자책인지 슬픔인지 모를 감정으로 일그러졌다.
그건 당신 잘못이 아닌데. 그야말로 위로받아야 하는 사람은 어머니를 잃고 제대로 애도하지도, 위로받지도 못했을 당신일 텐데. 소희의 가슴 한구석이 서걱댔다.
어린아이의 피부는 놀랍도록 재생력이 뛰어나서 웬만한 상처는 흉터조차 잘 남지 않는다. 하지만 전부 그런 건 아니다. 오히려 여린 살을 깊게 파고든 상처는 새살이 돋아난 후에도 또렷하게 남아, 성장하는 동안에도 계속 아픔의 흔적을 남기며 자라난다. 소희와 지겸의 몸에 있는, 개에게 물리고 남은 흉터처럼. 그의 마음속 깊이 새겨졌을 어머니에 대한 상처처럼.
스르륵. 소희가 자기도 모르게 고개와 몸 한쪽을 살며시 기울여 그의 팔에 기댔다. 남자의 높은 체온이 그녀에게 전해졌다.
아. 어디선가 포근한 봄바람이 불어온다. 그 바람에 실린 소희의 체향이 그를 감쌌다. 백 마디 말보다 가만히 다가온 그녀의 온기가 지겸에겐 더 큰 위로가 됐다. 달콤한 꿈에서 깼는데, 깨서 아쉬워할 틈도 없이 그의 곁에서는 다시 새로운 꿈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녀라는 꿈이.
소희가 손을 뻗어 그의 손등에 제 손을 올려놓았다. 보드랍지만 차가운 감촉에 지겸이 눈을 떴다.
“왜 이렇게 차가워.”
구박하는 말투 같은데도 애정이 듬뿍 묻어나 있다. 그가 제 손을 돌려 그녀의 하얗고 작은 손을 감싸듯 꽉 잡았다. 굵고 긴 손가락이 소희의 손가락 사이사이를 파고들었다.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었다. 둘 중 누구도 깊이 깍지를 낀 손은 풀 생각을 하지 않았다.
“소희야.”
“…응?”
“싱가포르에서 네게 그런 일이 있고 나서, 어머니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어.”
숨이 막히는 듯 무겁게 잠긴 그의 목소리가 어딘가에 억눌린 듯했다.
“별장에서 말했었지. 어머니에 대한 아버지의 의심. 내가 평생 본 아버지의 사랑은 잔인할 정도로 기형적인 것이었어. 그런데 내가 똑같이 답습하고 있더라…. 내가… 이 마음이… 너를 망가트릴 것만 같았어. 그 일이 경고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끔찍했어. 그래서 결심했던 거야, 놓아줘야겠다고.”
마주 잡은 손을 통해 그의 떨림이 전해졌다.
“그런데… 각인은 왜 그대로 뒀어요.”
사실 다 알면서, 소희는 그래도 한 번 더 물어봤다. 지난번처럼 범죄자를 추궁하듯 몰아세우려는 게 아니라, 정말 그의 속마음까지 제대로 들어주고 싶은 마음으로.
“처음엔 지울 생각도 했었어. 도저히… 되질 않았지만.”
이 마음이 결국 널 삼켜버릴까 봐 겁이 나는데도, 죽기 전까진 도저히 멈출 자신이 없었어.
지겸이 고개를 돌려 소희와 눈을 마주했다.
집착도 사랑일까.
지겸은 그동안 자신에게 끊임없이 질문했다.
아니다, 아닐 것이다. 아버지만 봐도 알 수 있지 않나. 그따위 뒤틀린 소유욕이 사랑은 아닐 것이다.
그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리는 걸 느꼈을까. 소희가 이미 제 손을 완전히 감싼 그의 손에 좀 더 단단히 깍지를 껴 넣으며 말했다.
“당신은 당신 아버지와 다른 사람이에요. 나도 당신 어머니와 다르고. 이 세상엔 저 많은 사람의 수만큼 사랑도 다양하게 있는 게 아닐까.”
그러니까 비교하지도, 자책하지도 말아요.
조곤조곤하게 드러낸 소희의 진심은 다 타고 불씨조차 남지 않아 메마른 장작 같았던 지겸의 가슴에 윤활유를 부었다. 다시금 타오른 뜨거운 불꽃이 지겸의 눈가에 어른거렸다. 마주 잡은 손도 덩달아 뜨거워졌다.
“오늘 여길 온 건…. 잊지 않으려고.”
소희가 고개를 기울여 그를 쳐다봤다. 무엇을…?
“널 상처 줬던 것.”
다시 한번 스스로를 정죄하고 또 사죄하려고 왔다. 어머니 앞에서, 소희 앞에서 가장 부끄러운 민낯을, 처참한 밑바닥을 드러내 놓고. 왜냐하면.
“소희야. 시작하기도 전에 모든 걸 망쳐버렸던 게 나라는 걸 알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포기가 안 돼. 절대로 널 놓치고 싶지 않아.”
그녀와 헤어지는 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다. 소희가 원하는 건 뭐든 들어줄 거니까. 죽는 것도 상관없었다. 분명히 그랬다.
하지만 자신에게 다시 선택권이 주어진다면, 정말 그럴 수 있다면 어머니처럼 삶을 놓아버리지는 않을 거다. 제대로 살아보고 싶다. 그녀가 지금처럼 제 손을 잡아준다면.
“그 날, 네가 내게 했던 그 말이 진심이라면. 마지막으로 내게 기회를 줘.”
이번엔 제대로 해 내고 싶어.
두 사람의 손은 마주 잡은 후로 여태 떨어지지 않았다. 지겸이 그녀의 손을 살짝 당겨 손등에 가만히 키스했다. 여린 살갗 위로 스친 입술이 몹시도 떨리고 있었다. 언제부터 이 남자는 이렇게 제 앞에서 떨게 됐을까.
소희가 잡은 손을 놓을 듯 제 손을 쫙 폈다가 다시 더 꽉, 지겸의 손을 잡았다.
“…응.”
심장을 파고들던 고통이 섬광 같은 쾌감으로 치환되는 순간이었다. 저 작은 입술에서 나온 긍정의 대답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지겸이 살며시 머금어지는 소희의 미소를 제 각인 위에 덧씌울 듯 쳐다봤다.
“대신. 정말 마지막 기회니까, 이번엔 잘해 봐요.”
둘이, 같이.
소희가 입술 새로 수줍은 듯 투정처럼 답을 속삭였다. 내내 그녀의 얼굴을 응시하던 지겸의 시선이 종알거리는 선홍빛 입술에 꽂힌다.
커다란 남자의 손에 순간 힘이 실리나 싶더니 소희가 그에게 조금 끌려갔다. 홍매처럼 상기된 얼굴이 그를 향해 기울어지려는 찰나, 지겸이 고개를 낮춰 거리를 좁혀왔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부드럽게 맞닿았다. 마치 처음인 것처럼 정중하고도 다정한 입맞춤이었다. 부딪친 입술이 떨어지기 직전 그가 소희의 아랫입술을 살짝 빨아당겼다 놓았다. 겨우 그 정도 감촉에도 가슴이 철렁할 정도로 떨려서. 소희는 제 무릎 뒤쪽이 간질거렸다. 좀 더 깊은 키스가 이어지려는 신호일까. 그녀가 발꿈치에 힘을 주고 눈을 더 질끈 감았다. 하지만 남자의 숨결은 허무하게도 단숨에 멀어졌다.
“갈까? 배고프겠다, 집에 가서 맛있는 거 해 줄게.”
괜스레 아쉬운 마음에 소희가 손끝을 꼼지락댔다. 여전히 깊게 깍지 낀 두 사람의 손 위로 매화나무 그늘이 드리워졌다.
봄의 시작, 잎보다 꽃을 먼저 피우는 분홍 나무에 톡, 하고 첫 꽃잎이 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