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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함께하는 모든 순간이 마치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소희는 누굴 좋아하게 된 것도, 고백도 전부 처음이라서 그 후엔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 펼쳐질 줄 알았다. 아쉽게도… 그런 건 없었다. 그저 둘이 차 안에서 함께 음악을 듣고, 마주 앉아 밥을 먹고, 나란히 발맞추어 걷는 평범하고도 소소한 일뿐이었다. 다만 그 별것도 아닌 대화가, 음식이, 추운 바닷가의 공기조차 평소보다 훨씬 소중하고 특별하게 다가왔다. 그러니까 세상은 그대로였다. 변한 건 그녀의 마음과 태도뿐.
“많이 추웠지….”
차로 돌아온 지겸은 내내 어쩔 줄을 몰랐다. 오들오들 떠는 그녀를 보고 거듭 돌아가자고 했지만 좀 더 바다를 보고 서 있고 싶다 우긴 건 소희였다. 반소매 티셔츠 하나 남기고 셔츠나 재킷 전부 그녀 몸에 둘러줘 놓고. 마치 자신 때문에 그녀가 춥기라도 했다는 듯 얼굴이 어둡다.
지겸이 히터를 세게 틀어 온도를 높인다. 차 밖과 안의 온도 차 때문에 창문에 뿌옇게 김이 서렸다.
“괜찮아요, 나. 진짜로.”
오히려 소희 눈에 들어온 건 찬바람을 하도 맞아 불그스름해진 그의 팔뚝이었다.
“당신이야말로, 괜찮은 거예요?”
소희가 그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의 오른팔에 살짝 얹었다. 얼음장 같았다. 갑작스레 맞닿은 손길에 그의 팔에 불거진 힘줄이 흠칫, 꿈틀대는 게 느껴졌다.
“앗, 엄청 차갑잖아요!”
그녀가 미간을 찌푸리며 제 몸에 이불처럼 덮인 그의 겉옷을 벗어 건네려고 했다.
“됐어.”
지겸이 그런 그녀를 저지하며 다시 옷을 덮어주기 위해 소희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순간 두 사람의 눈이 뜨거운 공기가 맴도는 허공에서 마주쳤다. 좁혀든 몸과 몸 사이 고요하고 미묘한 적막이 감돌았다.
아까 맨발로 밟았던 백사장의 모래가 아직도 남아 있는 건 아닐까. 분명 차에 타기 전에 그가 꼼꼼하게 털어 줬는데도 불구하고, 발끝부터 간지러운 기운이 소희의 발목과 종아리를 천천히 타고 올라와 아랫배 언저리 어딘가에 찌릿하게 뭉쳐졌다.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는 남자의 눈동자가 데일 듯 뜨거웠다. 어쩔 수 없이 시선을 천천히 내리니 우뚝 선 콧날을 따라 남자의 얇고 붉은 입술이 눈에 들어왔다.
히터 때문일까, 차 안에 공기가 부족한 느낌. 숨이 천천히 막히는 것만 같다. 겨우 들이마신 숨을 내뱉을 차례인데, 자신을 향한 지겸의 눈빛 때문인지 맘대로 호흡조차 내쉴 수 없다. 아니면….
소희가 눈을 스르르 감았다. 그의 입술에 닿고 싶다, 고 생각했다. 그가 다가와 숨을 나눠주면 그제야 편안히 호흡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마른침을 연신 삼켰다. 무릎 위에 포개뒀던 하얀 손끝이 동그랗게 말린다. 감긴 제 눈꺼풀 위로 지겸의 떨리는 숨결이 조금씩 가까워졌다. 또다시 끼쳐오는 그의 체향. 여전히 그녀를 빠듯하게 긴장시키는 남자의 페로몬. 정말로 숨이 턱, 막혔다.
쪽.
지겸의 입술이 소희의 이마에 조심스레 닿았다가 곧 떨어졌다.
“숨, 쉬어.”
분명 그도 떨고 있었다. 그 묘한 진동에 그녀는 사르륵 눈을 떴다가 여전히 자신을 곧게 응시한 눈동자를 발견하고는 두 볼까지 화르르 달아올랐다.
“이미 자, 잘 쉬고 있어요.”
소희가 고개를 오른쪽으로 홱 돌리며 대꾸했다.
지겸이 피식, 간지럽게도 웃었다. 그 소리에 이제 소희는 귓불까지 빨개졌다.
아, 너무 예쁜데… 확 잡아먹어 버릴까.
사실 그도 한참 전부터 온몸의 열기가 한 곳으로 뻐근하게 몰려든 상태. 하지만 스스로 다짐한 게 있지 않은가. 그 결심을 이렇게 빨리 깨버릴 수는 없다. 지겸은 조금 불편한 몸짓을 애써 감추며 소희에게 안전벨트를 단단히 둘러줬다.
“이제 갈까? 너 피곤하겠다.”
“아. 으응, 네….”
소희가 지겸 쪽은 쳐다보지도 못한 채 대답했다. 그의 차가 온통 새까만 바닷가 옆을 달렸다. 그녀는 괜스레 김이 서린 창문에 손가락으로 조그만 별이나 토끼 따위를 끄적댔다. 어쩐지 머릿속이 복잡했다.
사실 소희는 오늘 평소보다 좀 더 큰 가방을 챙겨왔다. 속옷과 갈아입을 옷까지 넣어서. 정말 혹시나, 바다까지 왔으니까. 잠깐 어디 머물다 가게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특별히 그와 시간을 더 보내는 걸 진심으로 기대했다기보다는…. 아닌가, 그녀도 모르게 속으로는 어쩌면. 소희가 거기까지 생각하고는 제 입술 한쪽을 잘근잘근 씹었다. 스스로가 바보같이 느껴졌다.
아니지. 싱가포르에서의 일을 떠올리면, 소희가 그런 의심을 하기에 타당하고도 남는다. 아무리 히트와 러트 사이클 때문이었다고 해도, 첫날을 제외하고는 호텔 밖으로 제대로 나오지도 못하고 그와 침대에서 뒹굴었으니까. 한순간도 그녀와 닿지 않으면 죽을 것처럼 굴었던 남자가 제 고백까지 들어놓고 이렇게나 조심스럽게 행동하다니. 그런 그의 변화가 싫은 건 아니었지만 어딘지 조금 아쉬운 것도 같았다.
“피곤하면 좀 자둬, 소희야. 아직 한참 더 가야 해.”
창문에 한쪽 머리를 콩, 콩 박고 있던 소희가 그의 다정한 말에 답 없이 눈을 감았다. 이미 자고 있었다는 양 시늉이라도 하려고. 실은 복잡한 속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
***
소희의 집 앞, 도착한 지는 시간이 꽤 지났지만, 지겸은 차마 그녀를 깨우지 못하고 있었다. 처음엔 분명 잠든 척하는 것 같더니 금세 진짜로 새근거리며 잠들어 버렸다. 조수석 시트를 살짝 뒤로 젖혀 주고는 평온하게 잠든 얼굴을 한참을 바라봤다. 동그란 이마, 부드러운 선을 그리는 코, 그리고 다홍빛 입술. 아까 지겸이 이 입술에 키스하고 싶은 걸 겨우 참았을 때, 당황하며 눈을 깜빡이던 모습이 떠올랐다. 평생 곁에서 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겠지.
무슨 꿈을 꾸는지 그녀의 미간이 살짝 좁혀든다. 지겸이 검지를 들어 그녀의 눈썹 사이를 살살 문질렀다. 그녀를 찡그리게 하는 나쁜 꿈이 달아나길 바라며.
“으음….”
그 탓에 잠이 깼는지 소희가 조금 꿈틀대다 눈을 떴다.
“어, 벌써!”
벌떡 몸을 일으켜 주변을 돌아보더니 그녀가 제집인 걸 알고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도착했으면 깨우지 그랬어요. 나 많이 잤어요?”
“아니, 조금.”
덤덤하게 답하는 지겸의 목소리에 아쉬움이 묻어난다.
“저 들어갈게요, 당신도 어서 들어가서 쉬어야죠.”
그래. 말하면서도 지겸은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 그런 그를 소희가 힐끗 흘겨보다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표정을 풀었다.
“아, 내일까지 휴가랬죠?”
“응.”
“흠 그럼…. 오늘은 저 가고 싶은 곳 다녀왔으니, 내일은 구지겸 씨가 골라요.”
“뭘?”
무슨 이야긴가 싶은 지겸의 대답이 느릿하다.
“같이 갈 곳?”
“아.”
내일도 만나자고? 여상하게 되묻는 남자의 표정에 소희가 눈을 가늘게 뜬다.
“아니면 같이 병원으로 가든지요.”
하하. 움찔한 지겸이 항복 선언을 하듯 웃어버렸다. 그녀와 가고 싶은 곳이라. 사실 장소는 별로 의미도 없었다. 지겸에게 중요한 건 소희와 같이 있다는 사실 그 자체니까. 하지만 그녀가 그렇게 물으니 딱 한 장소가 떠올랐다. 그녀를 꼭 보여주고 싶은 사람. 소희와 함께 갈 장소. 그에게도 그런 곳이 있다.
“그래, 내일 아침에 데리러 올게.”
지겸은 소희가 건물 안으로 무사히 들어갈 때까지, 아니 그녀 집에 제대로 불이 들어오는지 확인할 때까지. 실은 그보다 한참을 더 차 문에 기대어 서서 그녀 집 앞에 머물렀다.
두 사람 사이에 이렇게 조금씩, 새로운 약속이 생겨난다.
***
또각또각. 다가오는 소희의 구두 소리를 들었는지 지겸이 비스듬히 기대 있던 몸을 세웠다. 어젯밤 그녀와 헤어질 때와 같은 장소, 동일한 자리. 그는 마치 집에 돌아가지 않았던 사람처럼 그곳에 서 있었다. 어제와 다른 게 있다면 네이비 컬러의 쓰리피스 슈트를 완벽하게 차려입은 모습 정도일까. 역시 이럴 줄 알았어.
아침에 외출 준비를 하며 소희는 한참을 고민했다. 오늘 어딜 가는 건지 그에게 물어보지도 못했는데, 그렇다 보니 뭘 입어야 할지도 망설여졌다. 어제처럼 편안한 옷을 입을까 하다가 결국 하늘거리는 실크 블라우스에 트위드 재킷과 치마까지 갖춰 입은 건, 얼마 전 양평 별장에서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왜요?”
소희가 자신이 가까워졌는데도 계속 물끄러미 바라보고 가만히 서 있는 남자에게 툭 한마디를 던졌다.
“아, 아니. 그냥.”
너무 예뻐서, 라고 말하면 또 민망해서 얼굴이 빨개지겠지. 사실 그런 그녀의 모습도 꽤 지겸의 취향이었지만 여러 가지를 참고 있는 상황에서 스스로를 자극할 필요까지는 없지 싶었다.
지겸이 차 문을 열어주어 올라타려는 순간, 소희는 좌석에 꽃다발이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내 거예요?”
“응.”
뭐야… 그도 쑥스러워할 때가 다 있나 보다. 괜스레 그녀의 눈을 피하며 운전석으로 가는 지겸을 흘끗 보던 소희가 선물 받은 커다란 꽃다발을 품에 안았다. 마치 나비 날개인 듯, 춤추는 여인의 치마폭인 듯 살랑이는 가녀린 분홍 꽃잎이 장난스럽게 덩굴진 잎 사이사이 피워져 있었다. 꽃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니 달콤한 향기가 코끝에 맺힌다.
“스위트피, 라더라.”
봄의 시작을 알리는 꽃이라던데.
여느 때처럼 붉은 장미꽃을 사러 꽃집에 갔다가 발견한 이 작은 꽃송이들 앞에서 그의 걸음이 멈췄다. 소희를 닮았다. 팔랑거리는 듯한 보드라운 꽃잎 하며 달큼한 향기까지 전부.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그가 이번엔 그 가게의 스위트피를 전부 사 꽃다발로 만들고 있었다.
“이렇게 생긴 꽃이었구나. <댈러웨이 부인>이라는 소설에 나오거든요. 거기 여주인공 클라리사가 파티를 위해 고른 꽃.”
기분이 좋은지 두 볼이 살짝 상기된 소희를 바라보며 지겸의 입가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그가 그 꽃을 고르게 된 건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지겸이 결국 소희에게 선물하지 못했던, 어느 날의 은방울꽃과 같은 꽃말을 가지고 있으므로.
‘반드시 당신에게 찾아올 행복.’
이번엔 자신이 실패하지 않기를. 용기를 내어 그에게 한 발자국 다가와 준 그녀를, 그 마음을 온전히 지켜낼 수 있기를. 지겸이 운전대를 더 힘주어 쥐었다.
“그런데 우리 오늘 어디 가요?”
소희의 물음에 지겸이 짐짓 긴장한 목소리로 답을 건넸다.
“……어머니 만나러.”
두 사람을 태운 차가 스쳐 지나간 길가의 벚꽃 나무에 어느덧 꽃봉오리가 맺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