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신부강탈-72화 (72/104)

-72-

딸꾹.

아…. 너무 당황한 소희에게서 딸꾹질이 나왔다. 덩달아 얼굴이 새빨개졌다. 이런 상황에서 민망하게 딸꾹질이라니.

“물 줄까?”

내려가자.

끄덕끄덕. 지겸의 물음에 소희가 제 입을 막은 채 고개만 움직였다.

“한국 와서 쭉… 여기서 살았던 거에요?”

지겸이 내미는 물을 두 잔째 받아 마시며 소희가 물었다.

“아니. 작년 가을 즈음 이사했지. 원래는 회사 근처에 살다가.”

그러니까 그녀와 살, 아마도 신혼…집을 미리 준비해 뒀었다는 뜻이다. 완벽하게 소희의 취향을 반영한 공간을 보고도 그걸 모를 수는 없었다. 그녀의 두 볼이 더 붉게 달아올랐다.

“부담 주려던 건 아니었는데….”

괜히 위층을 보여줘서 소희가 불편해진 것은 아닐까, 지겸은 그게 걱정이었다.

“그냥 혼자 앞서 나갔을 뿐이니까 신경 쓰지 마, 소희야.”

네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정리할게.

확실히 남자 혼자 살기엔 지나칠 정도로 큰 집이다. 그를 좋아하는 마음을 깨달은 건 맞지만, 미래에도 그녀와 함께이고 싶다고 확신했던 지겸의 계획에 바로 맞춰 주기는 어려웠다. 그런데도 막상 그가 그렇게 말하자 솔직히 아쉬웠다. 자신이 이렇게 이기적이고 우유부단했던가. 소희는 묘한 자괴감에 빠져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겸은 참 이상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의 곁에 있으면 그녀도 평소의 자신이 아니게 된다. 아니, 오히려 반대인가. 누구 앞에서도 내보이지 못했던, 억눌러 두었던 솔직한 모습과 마음이 드러난다고 해야 할까. 마치 소희도 몰랐던 자기 자신을 깨닫는 것처럼.

“아니… 꼭 그런 건 아니구.”

소희가 확실히 답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그때 지겸의 휴대폰이 낮게 진동했다.

“어, 미안. 잠깐만.”

지겸이 서재 쪽으로 가며 전화를 받았다.

“김 실장님. 네, 아무 일 없습니다. 네. …내일요? 확실해요? 하아. 알겠습니다.”

심각한 통화였는지 돌아오는 그의 얼굴이 조금 굳어 있다.

“그런데 내일 정말… 수술받을 거예요?”

소희가 지겸과 차마 눈을 마주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무릎 위에 마주 잡은 제 손을 괜스레 꼼지락거렸다. 아까부터 묻고 싶었다. 각인 제거술을 받겠다고 했던 그의 계획은 여전한지 말이다. 그녀의 고백을 들은 후에도.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데…?”

그가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할 남자라는 걸 알았다. 당장 받으라고 한다면 군말 없이 병원으로 가겠지. 하지만 지겸을 향한 제 감정의 정체를 알고 나자, 소희는 어쩐지 딴마음이 들었다. 자기가 생각해도 놀랍도록 이기적인 욕심.

소희가 이전과는 다르게 머뭇대는 걸 지겸이 놓칠 리가 없었다.

“며칠만 미룰까?”

“네?”

반문하며 고개를 든 그녀의 눈앞에 지겸의 미소가 번진다. 아, 이제야 알겠다. 저 남자의 표정 변화에 일일이 반응하며 조여들던 심장의 이 불편하고 어색한 기분. 꽃잎이 파르르 떨리며 그녀 가슴 어딘가에 차곡차곡 쌓이는 느낌. 이게 바로 좋아한다는 거구나.

“미루고, 어디든 너 가고 싶은데 다녀올까?”

“아. 저 내일 건강검진 있는 날인데.”

그제야 생각났다는 소희의 대답에 지겸의 눈썹이 미묘하게 뒤틀렸다. 그녀는 채 눈치채지 못했지만.

“미루면 되지, 너 작년에도 받았잖아.”

어, 그에게 그런 얘기까지 한 적 있던가? 소희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매년 아버지의 독촉으로 소희는 건강검진을 받고 있다. 작년에는 결혼 전이라 산부인과 관련 검사도 필요하다며 초음파 검사뿐 아니라 그 전에 주기적인 채혈 검사도 병행했다. 억제제 대신 호르몬 주사도 몇 달을 맞았다. 오메가로서의 페로몬을 강화해 자궁 면역력을 높인다고 했던가. 검사를 받을 때면 묘하게 인격적인 무시를 받는 기분이 들었으나 부모님의 완강한 설득에 어쩔 수 없이 따랐었다.

하긴 이런 기분으로 혼자 종일 병원에 있는 것보다는… 당연히.

소희가 고민하는 표정을 짓자 지겸이 좀 더 나긋하게 재촉하듯 물었다.

“어디 가고 싶은 데 없어?”

“으음….”

고민하는 소희를 바라보는 그의 표정이 조금 초조해졌다. 물론 지겸도 그녀와 어디든 간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쁘겠지만, 지금 이러는 데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내일 소희가 받을 건강검진… 그녀에게 그런 것을 받게 할 수는 없으니까.

“그럼… 바다?”

그녀는 작년 여름의 바다를 떠올렸다. 지훈인 줄 알았지만 실은 지겸과 함께했던 첫 휴가지. 다시 바다에 가보고 싶었다. 이번에는 제대로, 지겸과 둘이서.

“그래, 가자.”

지겸이 다행이라는 듯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속마음을 가만히 고백해 온 순간부터 모든 게 현실감이 없다. 제 눈앞의 소희를 바라보며 지겸은 눈도 제대로 깜빡이지도 못했다. 혹시 감았다 뜨면 꿈에서 깰까 봐. 이 모든 게 제 욕망이 만들어 낸 허상일까 봐 겁이 났다.

그래서 지겸은 그녀 모르게 내린 제 오른 주먹을 꽉 쥐었다. 미소가 어린 그녀의 입가에 제 입술을 가져다 대고 싶은 진심을 참고 또 참으면서.

***

“난… 저거!”

강릉 가는 길, 휴게소에 들렀다. 지겸이 커피를 마시는 동안 맞은편에 앉은 소희가 동그랗고 노란 찐 감자를 소금에 찍어 호호 불어먹었다. 휴게소에선 무조건 감자를 먹어줘야 한다며. 꼭 자기 같은 것만 먹지. 그녀를 바라보는 남자의 눈꼬리가 자꾸만 부드럽게 휘어진다.

“학교를 미국에서 나와서 모르겠지만, 원래 강원도는 감자라고요.”

한쪽 볼이 가득 차게 오물오물 먹으며 소희가 뭐라고 자꾸 실없는 소리를 한다. 피식. 그녀 입가에 묻은 알갱이를 엄지로 떼어 제 입에 넣으면서 지겸이 웃음을 감추질 못했다.

“…나도 그 정도는 알아.”

“아.”

열심히 음식을 씹어 삼키던 입술이 움직임을 멈췄다. 초등학교 때 배우던가.

하하. 결국, 그런 그녀를 보고 지겸의 웃음이 터져 버렸다. 시원하게 웃는 남자의 모습을 소희가 지그시 봤다. 저렇게 웃을 수도 있는 사람이었구나. 방금 먹은 감자 때문인가. 괜히 목이 막혔다.

“이번엔… 여기야?”

소희가 지겸을 데리고 간 곳은 허름한 강릉 시내의 장칼국수 맛집.

“네. 원래 강릉은….”

“장칼국수라고?”

지겸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는 소희를 못 말리겠다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근데 이거 꽤 매울 텐데… 먹어는 봤어?”

“아니요.”

그런데도 저렇게 자신감이 넘친다. 지겸은 자신을 따라 3단계 매운맛을 시키겠다는 소희를 달래고 달래서 1단계로 합의 봤다. 매운 거 잘 못 먹는 거 빤히 아는데, 뭘 또 이런 데서 도전의식을 남발하는 건지. 걱정스러운 표정의 지겸과 달리 소희는 신이 난 얼굴이다.

원래 소희는 먹는 거에 욕심이 없는 타입이다. 소화 기능이 약한 편이기도 하고. 그런데 이상하게 지겸과 함께 있으면 자꾸 식욕이 돋는다. 이것저것 먹고 싶어지기도 하고, 그동안 먹어보고 싶었던 것도 생각나고. 자신이 뭘 먹으면 자꾸 물끄러미 쳐다보는 그의 눈빛이 조금 부담스러우면서도 싫지 않았다.

“흐….”

이건 매워도 정말 너무 매워!

칼국수 몇 젓가락을 후루룩 먹더니 소희가 얼굴은 물론 목까지 빨개져 동동거렸다. 물을 몇 컵이나 들이켜도 매운 통증이 가시지 않는 모양이었다. 지겸이 미리 시켜 둔 복숭아 맛 나는 음료수에 빨대를 꽂아 건넸다. 그걸 받아 마시고서야 조금 진정이 된 듯 소희가 겨우 숨을 몰아쉬었다.

“속 쓰려요….”

눈가에 눈물까지 울멍울멍 맺혀 있다. 마주한 지겸의 눈매가 좁혀 든다.

“거봐, 내가 뭐랬어. 그 생각하고 있죠. 지금.”

“아닌데.”

뜨끔한 지겸이 제 앞의 국수를 단숨에 비우더니 소희의 그릇까지 가져가 버렸다.

“어어! 난 그럼 뭘 먹으….”

“여기 바지락 칼국수 1인분 나왔습니다.”

가게 아주머니가 소희 앞에 바지락이 가득 든 칼국수를 내려놓고 갔다. 빨간 국물의 장칼국수와 다르게 맑은 하얀색 국물. 소희가 지겸을 쳐다봤다. 이걸 언제 시켰지? 미리 시켜 둔 건가? 궁금한 표정을 하자 지겸이 그저 어깨 한쪽을 으쓱한다. 그 모습이 얄미우면서도 괜스레 심장이 간질거렸다.

“그거나 먹어, 어서.”

그래도 강릉까지 왔으니까 장칼국수가 먹어보고 싶었는데. 툴툴거리니까 눈앞에서 쓰읍, 하고 혀 차는 소리가 들린다. 그의 반응에 소희가 어쩔 수 없이 눈앞의 접시에 젓가락을 집어넣었다.

“맛있다….”

곧 편안한 표정으로 식사를 이어가는 소희를 지겸이 나중엔 턱까지 괴고 지그시 봤다. 그렇게 지켜보는 데도 소희는 칼국수 한 그릇을 싹 다 비웠다. 바지락에 애호박에 당근과 양파. 특별한 것도 없었는데도 소희가 태어나서 먹어본 중 가장 맛있는 칼국수였다.

***

아직 완연한 봄이 아니라 해 질 녘의 바닷바람은 제법 차가웠다. 하지만 지겸의 곁에서 걷고 있어서 그런가. 맨발을 간지럽히는 모래의 감촉만큼이나 소희는 모든 순간이 보드랍고 설렜다. 그와 팔이 조금씩 스칠 때마다 복숭아뼈 근처가 움찔거렸다. 자꾸만 발이 푹푹 빠져 멈칫하는 그녀를 지겸은 조심스럽게 잡아주었다가 놓기를 반복했다. 걸음이 늦어지면 차분히 기다리며 속도를 맞춰 걸어주었다. 아예 계속 잡아주어도 좋을 텐데…. 소희는 자기도 모르게 그런 은근한 마음을 품었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서해 쪽으로 갈 걸 그랬나. 해 지는 거 보게.”

“으으응, 아니요. 그래도 바다는 동해가 좋더라.”

“…왜?”

두 사람이 나란히 서서 같은 곳을 바라봤다. 끝없이 펼쳐지는 물결.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 쏴아아 하고 부딪쳐 오는, 바다의 소리.

“깊어서요.”

파랗고, 까맣고. 차마 가늠할 수도, 함부로 속조차 훔쳐볼 수 없는 저 깊이가 좋아요. 꼭 당신 눈처럼. 아니, 그 속마음처럼.

소희가 바다에서 지겸을 보고 있을 때, 정작 그는 그런 소희를 바라보고 있었다. 긴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릴 때마다, 짜고 짙은 바다 내음 사이사이 그녀의 달큼한 체향이 묻어났다. 이곳에 오는 내내 지겸은 몇 번이나 숨을 참아야 했다. 다시는 함께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한 여자의 옆에 다시 서 있다. 어쩌면 이건 정말 그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 다시는 지난번처럼 헛되이 멍청하게 날려 버리지 않을 거다.

손을 뻗으면 닿을 정도로 가까웠지만, 지겸은 내내 그녀와의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그건 스스로에 대한 경고이자 다짐이기도 했다. 소희 앞에서 지겸은 이미 날 것의 본능을 드러내 보았다. 물론 그것도 그의 입장에서는 많이 인내한 수준이었다 해도, 아무리 절절한 진심이 바탕이었다 해도, 알파로서의 본색에 충실함으로써 저질렀던 과오를 반복할 수는 없었다.

바닷가를 걸으며 그녀와 이따금 손등이 스쳤다. 그럴 때마다 아슬아슬한 떨림이 마치 전기가 오르듯 그의 척추뼈를 타고 전해졌다. 소희도 당황한 듯 순간순간 작게 움찔대는 게 소금기 가득한 공기를 통해 와닿았다. 심장 한편, 그녀의 각인이 새겨진 바로 그 자리가 뻐근하게 차올랐다.

소희가 곁에 없을 땐 정말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이 여자가 제게 불러왔던 삶의 열망과 같은 건 다시는 찾을 수 없을 테니까. 하지만 다행히 지금 그는 이렇게 살아 있다. 사랑스러운 여자가, 소희가 제 곁에 머물러 주어서. 여전히 그녀를 사랑해서.

사랑할 수 있어서, 살아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