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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희는 커다란 안락의자에 몸을 파묻고 지겸이 가져다준 담요에 꽁꽁 싸여 있었다. 아직도 아까의 혼란이 남은 듯 몸이 이따금 가늘게 떨렸다. 다행히 눈물은 멈췄다. 그러나 워낙 감정 소모가 컸던지라 그녀는 멍하니 앉아 있었다.
“조금만 마셔 봐, 응…?”
소희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채로, 지겸은 따뜻한 보리차를 들고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그가 거듭 권하자 그제야 어쩔 수 없이 보리차를 한 모금 마신다. 혹시나 뜨거운 차에 그녀가 데이거나 다칠까 봐 지겸은 소희의 손에서 잠시도 눈도 떼지 못했다.
“이제 좀 괜찮아요….”
소희의 말에 지겸은 정말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어쩔 줄 모르는 남자의 모습이 제 발밑에 앉아 처분을 기다리는 큰 개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일까. 자기도 모르게 팔을 뻗어 그의 정수리를 스윽 쓰다듬었다.
지겸은 그녀가 만지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가만히 소희에게 눈을 맞춰 왔다. 궁금했다. 그의 저 고요한 까만 눈동자는 지금….
“무슨… 생각해요?”
소희의 목소리는 여전히 어딘가 뾰로통하다. 지겸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린다. 두근. 그녀를 향해 달싹이는 남자의 입술이 또 주책맞게 찬양이나 퍼부을 것 같아서 소희의 뺨이 미리 붉게 달아올랐다.
“음… 얼굴 많이 부었네, 하는 생각?”
“…뭐?!”
그녀가 머리카락을 만지작대던 손을 홱 거두며 그를 노려봤다.
하하. 그의 입에서 낮고 기분 좋은 울림이 번졌다.
실은, 그런데도 예쁘다니 신기하다는 생각.
그제야 소희가 귓불까지 화르륵 달아올랐다.
지겸은 그런 그녀의 얼굴을, 솜털이 보송한 귓가를 제 손끝으로 매만지고 싶었지만 애써 참았다. 사실 그의 눈앞에 소희가 다시 와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적 같았다.
소희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그는 한참을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차 안에서 그녀와 나눈 대화가, 제 곁에서 가깝게 그녀의 체향을 느끼는 게 정말 마지막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도저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후회했다. 심장이 터져 죽든 말든 그녀가 잠시 곁에 있어 준다고 할 때 끝까지 거절할걸. 소희와 다시 함께 있으며 알았다. 행복하다는 기분이 어떤 것인지. 그녀와 별것 아닌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고, 같은 시간을 공유한다는 게 얼마나 빠듯하게 제 가슴을 채우는지.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 욕심이 났다.
끊임없이 고민했다. 다시 소희에게 달려가서 붙잡고 애원해 볼까. 자신을 사랑해 주지 않아도 좋았다. 그녀에게 남은 게 증오의 감정이어도 상관없었다. 그저 일 년에 두 번, 아니 한 번이라도 보게 해 달라고 빌어야겠다고. 지겸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자신을….
“정말…이야?”
혹시나 꿈을 꾼 건 아닐까. 지겸은 당장 되묻고 싶었지만, 일부러 소희가 조금이라도 더 진정될 때까지 기다렸다. 그 기다리는 동안이 꼭 억겁과 같았다.
“뭐가? 아.”
소희가 조금 전 남자의 품에 안겨 터트려버린 제 고백을 떠올리고 얼굴을 붉혔다.
“못 들었으면, 됐어요.”
흐음. 지겸의 눈매가 가늘게 좁혀들었다. 소희는 차마 그를 마주하지 못하고 애꿎은 컵에 든 차만 홀짝였다. 제대로 된 목소리로 다시 한 번 듣고 싶었지만 일단 참기로 했다. 부끄러워하는 소희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의 공간 안에 편안히 들어와 있는 여자에게서는 이전처럼 자신에 대한 경계심은 느껴지지 않았다.
“배 안 고파?”
이런 상황에서 그럴 리…. 꼬르륵. 야속하게도 몸은 솔직했다. 잔뜩 긴장했던 게 풀어지자마자 솔직한 욕구가 고개를 들다니.
“잠깐만 쉬고 있어, 뭐라도 좀 간단히 만들어 줄게.”
볼이 빨개진 소희와 달리 그는 언제나처럼 여유로운 미소를 띠었다.
지겸이 주방으로 걸어가 냉장고에서 재료를 몇 개 꺼내더니 인덕션을 켜고 자연스럽게 요리를 시작했다. 그녀가 앉아 있는 거실에서 그가 요리하는 모습이 정면으로 보였다. 청바지에 흰 반소매 티셔츠. 아무것도 바르지 않아 부드럽게 내려온 앞머리. 지겸이 도마에 재료를 올려놓고 칼로 썰 때마다 조밀하게 짜인 팔 근육이 같이 움찔댄다. 무슨 광고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아서 소희가 자기도 모르게 멍하니 그를 응시했다.
“파스타 괜찮지?”
“아, 네!”
그를 물끄러미 보던 게 들킨 것만 같아 당황한 소희에게서 소리 지르듯 대답이 뱉어졌다. 지겸이 그런 그녀와 눈을 맞추더니 피식, 웃어버렸다. 두근. 심장이 고장 났나 보다. 제 마음을 인정하자마자 그의 모든 행동과 표정이 그녀를 간지럽힌다.
“크림 소스로?”
끄덕끄덕. 여전히 그녀에게 눈을 고정한 채 지겸이 되묻는다. 소희는 홀린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베이컨 싫어하지?”
끄덕끄덕.
“그래, 그럼 브로콜리랑 새우 넣으면 되겠다.”
끄덕끄덕. 역시, 소희의 입맛을 그녀보다도 더 잘 아는 남자다.
순식간에 완성된 파스타를 접시에 담아 아일랜드 식탁에 세팅해 둔 그가 다시 소희 쪽으로 걸어왔다. 남자가 가까워질수록 심장박동도 다시 조금씩 빨라진다.
“다, 다 됐어요? 부르면 내가 갈 텐… 앗! 내, 내려줘요!”
지겸은 소희를 가볍게 안아 들고 부엌 쪽으로 가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혔다.
“알아. 먹고 힘 생기면 그땐 혼자 걷게 해 줄게.”
또 또 이러지. 그는 툭하면 자신을 환자 취급한다. 아니면 애 취급하거나. 소희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채 지겸은 그녀가 포크로 면을 돌돌 말아 입에 쏙 넣는 장면을 긴장한 얼굴로 쳐다봤다.
“음…….”
소희가 음식을 오물오물 씹어 삼키는 모습은 역시 그에게 묘한 충족감을 불러일으킨다. 먹지도 않아도 배가 부르다는 건 이런 거겠지. 꿀꺽. 드디어 그녀가 처음 한 입을 삼켰다.
자신에게서 어떤 평가가 나올지를 기다리는 남자의 은근한 눈빛에 소희는 오히려 체할 것만 같다. 그래도 소희는 남을 기분 좋게 하려고 마음에 없는 말을 지어내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좋게 말하자면 솔직하고,
“소금 좀…?”
나쁘게 말하면 눈치가 없지.
“아, 역시 싱거웠구나.”
당황한 지겸이 얼른 소금을 건넨다. 소희가 소금 병을 톡, 톡 여러 번 쳐서 크림파스타에 간을 추가했다. 그 소리가 무슨 사형 선고라도 되듯 지겸이 옆에서 작게 움찔댄다. 이 남자는 아무래도 그녀의 음식을 만들 때면 이유식이라도 만든다고 생각하고 요리하는 모양이다. 뭐랄까… 바보 같아. 바늘로 찔러도 구멍 하나 날 것 같지 않았던 지겸의 의외의 모습에 종일 긴장하고 지쳤던 소희의 마음이 녹아내렸다. 간이 덜 된 파스타는 여전히 맛이 없었지만, 그의 정성으로 채워진 속은 그 어느 때보다 따뜻하고 든든했다.
***
“이 집에선 어디에서든 한강이 보이네요….”
지겸이 챙겨주는 과일에 디저트까지 배불리 먹고 나서야 소희는 집 안을 천천히 둘러봤다. 남자 혼자 살기엔 큰 복층의 펜트하우스. 거실의 통창은 물론, 1층의 서재를 통해서도 한강이 가득 눈에 들어찼다. 고속도로를 바쁘게 지나가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와 다리마다 놓인 붉은 조명이 반짝이며 야경을 수놓았다.
예쁘다. 소희의 입에서 자기도 모르게 탄성이 새어 나왔다. 눈을 반짝이며 창밖을 보는 그녀를 지켜보는 지겸의 눈에 이채가 깃들었다. 그의 집이었지만 모두 제 옆의 있는 이 여자 한 명을 위해 마련한 공간이었다. 휑하니 비었던 집이 이제야 주인을 찾아 온기로 가득 찬 느낌이었다.
“나… 올라가 봐도 돼요?”
소희가 나무계단을 가리키며 조금 망설이다 물었다. 지난번부터 느낀 거지만 이 남자 앞에선 어느 순간부터 꾸밈이 없어졌다. 그저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말하고 싶은 대로 하게 된다. 그녀가 어떻게 행동하든 지겸은 변치 않으리란 믿음 때문일까.
“그럼.”
지겸이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여 준다. 왠지 비밀스러운 공간으로 들어가는 기분이라, 소희는 내딛는 걸음마다 조금씩 떨렸다. 모던하고 깔끔했던 1층에 비해 2층은 좀 더 아기자기하고 따뜻한 분위기였다. 방문이 여러 개. 꼭 토끼굴에 따라 들어갔던 앨리스가 된 기분이다. 어떤 문을 열든 상상하지도 못했던 무언가 튀어나올 것만 같아. 소희가 두 번째 방문 앞에 섰다.
“여기도?”
열어봐도 되냐는 질문에 지겸이 순간 멈칫했다. 그 모습을 보니 소희는 괜히 더 장난기가 발동했다. 뭐 이상한 거라도 숨겨둔 걸까? 망설임 없이 손잡이를 돌리고 문을 열었다. 1층에도 분명 서재가 있었는데, 여기도 서재가 또 있다. 가운데 원목 책상과 양옆을 둘러싼 책장에 책이 한가득….
“어?”
꽂힌 책들을 살펴보던 소희의 눈이 커진다. 대부분 의학 원서가 가득하던 1층과 달리 이곳엔 온통,
“여기 설마.”
영문학 서적들뿐. 넬라 라슨의 ‘패싱’을 비롯해 그녀의 박사 논문 주제였던 오메가 작가의 문학부터 시대별 작가별 원서들과 국내 번역서가 빼곡했다.
게다가 서재와 연결된 옆방으로 들어가니 커다란 드레스룸이 나오는데, 가득 들어찬 옷과 가방은 모두 여자의 것이었다. 정장부터 캐주얼까지, 소희가 즐겨 입는 브랜드 제품도 있었고 국내에서 구하기 어려운 해외 브랜드 옷들까지 다양했다. 모두 태그까지 달린 완벽한 새 옷뿐. 게다가 장식함을 가득 채운 시계와 액세서리까지.
“설마… 아니죠?”
소희가 가지런히 걸린 옷을 손끝으로 가볍게 쓸어보다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봤다. 지겸은 구석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었다. 부러 그녀의 눈을 피하는 듯, 가볍게 제 턱을 쥐고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구지겸 씨. 솔직히 말해 줘요. 이게 다 뭐에요? 이 집….”
그러고 보니 그의 집 전체가 묘하게 익숙하고 편안했다. 흰 대리석 바닥에 공간 자체는 모던하지만, 웜톤의 벽지와 빈티지한 원목 가구는 완벽하게 소희의 취향이었다. 게다가 모든 방의 포인트 컬러 벽지들은 주로 초록색 계열이었다. 소희가 가장 좋아하는 색. 무엇보다 2층에 이 서재와 누가 봐도 여자의 것이 분명한 드레스룸까지. 그뿐인가. 한강을 조망하기에 가장 좋은 집의 위치까지.
그의 고개가 느릿하게 그녀 쪽으로 돌아온다. 나긋한 목소리가 그녀에게 믿기지도 않는 답을 건넸다.
“응. 너랑… 살 집.”
미쳤어.
소희 입술 새로 탄식이 샜다. 이 남자는 정말이지… 미친 게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