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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겸에겐 여전히 연락되지 않았다. 소희가 후문 밖까지 뛰쳐나왔을 땐, 이미 차량 본체는 수거해 간 뒤였고 당연히 사고 당사자들도 병원으로 이송된 뒤였다. 목격자를 조사하는 경찰들의 모습과 여전히 모여 웅성대는 사람들의 말소리. 무엇보다 현장에 남은 처참하게 깨진 차체 조각과 진하게 남은 바닥의 스키드 마크를 보며 얼마나 끔찍한 사고였는지를 가늠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설마, 아닐 거야.
‘검은 세단이 중앙선을 넘었더라. 이 대낮에 자살하려던 게 아니면 왜….’
동료 교수의 말이 자꾸 귓가를 맴돌았다. 소희는 마지막으로 보았던 지겸의 표정을 떠올리려고 애써봤다.
‘내일 오전에 받기로 했어. 각인 제거술.’
‘미안해….’
혹시 그건 그가 그녀에게 남기는 마지막 작별 인사 같은 것이었을까? 수술을 받을 거라고 안심시키고 실은 다른 마음을 먹고 있었나?
‘죽을 수도 있다잖아요!’
‘…그럼 왜 안 돼.’
지겸은 정말로 죽음까지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그녀의 질문에 너무나 의연했다.
아니야. 그 사람이라면, 아무리 그런 결심을 했다고 해도 그녀의 학교 바로 앞에서 이런 식으로 행동할 리는 없다. 언제나 소희가 짐작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이 그녀를 배려했던 남자니까.
머리로는 아닐 거라 생각하면서도 자꾸만 다리에 힘이 풀리고 몸에 피가 잘 통하지 않는 듯 손끝이 저렸다. 택시를 타고 우선 각인 제거술을 받았던 병원으로 향했다. 다행히 재림대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소희는 바들바들 떨며 김 실장님에게도 연락해 봤지만, 그도 전화를 받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다. 원래는 교수 회의가 끝나면 김 실장님이 데리러 오기로 되어 있었다. 예정대로라면 3시간 정도 후에 만나기로 한 거지만. 그조차도 연락이 되지 않으니 자꾸만 더 나쁜 쪽으로 상상하게 됐다.
차가 빨간 신호에 걸려 정차할 때마다 애가 탔다. 심장 여기저기를 누군가 꾹꾹 누르고 찌르는 것만 같았다. 숨조차 제대로 쉬어지지 않아서, 소희는 제 가슴에 손을 얹고 자꾸만 호흡을 가다듬었다.
최대한 냉정하게 생각을 가다듬어 보았다. 지겸은 분명 병원으로 간다고 했다. 평소라면 그녀의 연락을 놓칠 사람이 아니지만, 병원에서 검사 중이라면 연락이 되지 않는 게 당연했다. 그래, 그럴 리가 없어. 그 시각 후문을 지나던 검은 세단이 지겸의 차 한 대뿐일 리가.
하지만 만약에, 정말… 사고라면?
큰 트럭과의 추돌사고라고 했다.
그건 지겸은 아닐 거다. 절대. 그럴 리가 없어. 그럴 수는 없다. 그래서는 안 된다.
하지만 사고 난 사람이 지겸이라면. 혹시라도 그가 크게 다치거나… 만약 죽는다면?
이 세상에서 그 남자가 사라진다면?
다시는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다면….
“아, 아아… 아흑….”
눈에서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모르겠다.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렀다. 도저히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들이 머릿속에서 서로 뒤엉켜 부풀어지다 순간 펑 하고 터져 버렸다.
소희는 무서웠다. 그의 죽음을 가정하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화가 났다. 이게 그녀를 불안하게 만든 남자를 향한 격한 분노인지, 아니면 내내 바보같이 군 자신을 겨냥한 건지도 구분하기 어려웠다. 이럴 줄도 모르고, 2시간 남짓의 드라이브와 차 안에서의 덤덤한 인사가 그와의 마지막일 수 있다는 것도 모르고.
소희는 지겸과 눈 한번 제대로 마주치지 않았다. 그녀가 사라질 때까지 오래도록 그 자리에서 자신을 지켜보는 시선을 느끼면서도 뒤돌아보지도 않았다. 일부러 그랬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외면하면 모두 없던 일이 될 것 같아서, 완전히 정리하고 싶어서. 이 잘못 시작된 관계를. 거짓으로 얼룩져 이름 붙일 수도 없는 감정을. 그녀를 혼란스럽고 힘겹게만 하는 사람을.
지이잉-.
그때 소희의 휴대폰이 울렸다. 김 실장님이었다.
“실장님? 흐, 흑. 실장님… 그 사람, 구지겸 씨는요?”
통화가 연결되자마자 인사도 없이 대뜸 그 사람의 이름부터 외쳤다. 하도 울어서 뭉개진 목소리가 뱉어지는 탓에 몇 번이나 훌쩍이며 목을 가다듬었다.
수화기 너머 김 실장이 당황하며 답했다.
“괜찮으세요? 무슨 일 있으신 겁니까? 아니 회의는 분명 5시 즈음 끝나는 거로….”
“구지겸 씨는요? 그 사람은 어디 있냐구요! 괜찮아요? 안 다쳤어요? 병원인가요?”
소희의 목소리에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김 실장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 다치다니, 도련님이요? 아닙니다. 방금 집에 모셔다드리고 나오는 길입니다만….”
아….
스륵. 소희가 자기도 모르게 들고 있던 휴대폰을 놓쳤다. 휴대폰이 탁, 하고 무릎을 치고 차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온몸의 긴장이 한순간에 풀어지면서 손아귀의 힘도 덩달아 빠졌기 때문이었다. 아프지도 않았다. 순간 모든 감각이 마비된 기분이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지금 바로 모시러 갈까요?”
수화기를 타고 멀리서 김 실장의 다급한 목소리가 울렸다. 소희가 숨을 크게 들이마신 뒤, 전화를 주워들었다. 그런 그녀의 손은 여전히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 사람한테 사고 같은 거, 없었다는 거죠…?”
“네. 혹시 무슨 얘기 들으셨습니까?”
“아니, 아니에요. 아니에요. 저, 그 사람… 집 주소… 좀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아직도 훌쩍임이 남은 목소리로 제대로 발음하기 위해 소희가 말 한마디 한마디에 힘을 줬다.
그의 집은 가까웠다. 소희가 있는 곳에서 다리 하나만 건너면 거의 바로인 곳.
택시 방향을 돌려 그에게로 가면서 소희는 멈추지 않고 거듭 흐르는 눈물을 닦고 닦다가 결국 포기해 버렸다.
스스로 생각해도 황당했다. 동료 교수가 알려줬던 건 후문에서 사고 난 차량이 검은색 세단이라는 정보뿐이었다. 그게 지겸일 거라는 증거도, 그렇게 의심할 만한 근거도 제대로 없었다. 그런데도 소희는 넋이 나간 채 뛰어나왔다. 혹시 모르니까. 다친 사람이 그 사람일 수도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미웠다. 구지겸 그 사람이 정말로 미웠다.
어떻게 사람을 이 지경으로 뒤흔들어 놓을 수 있지.
흔히 놀라운 일을 겪었을 때 심장이 발끝까지 쿵 떨어지는 것 같다고들 한다. 정말로 그랬다. 답이 없는 전화기를 붙들고 그가 괜찮기를 비는 자신의 마음은 가을 낙엽처럼 바스락대며 시시각각 타들어 갔다. 겨우 몇십 분. 그사이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온 것만 같았다.
끊임없이 떠올려 봤다. 그 사람의 표정과 그녀를 바라보던 눈빛을. 최근 함께하는 동안 나눴던 이야기들을. 자신이 놓쳤던 것은 없을까. 그저 농담처럼 가볍게 지나갔던 대화도 곱씹고 또 곱씹어 봤다. 그게 마지막이었을 수도 있었다고 생각하니, 몸속의 핏줄이 시리게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그녀가 그의 말에 다르게 대답했다면, 한 번이라도 더 웃어줬으면, 그랬다면 결과가 달라졌을까. 지겸이 무사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찼다.
택시에서 내려 엘리베이터를 타고, 그의 집 현관 앞에 도착하고 나서도 두 다리는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밉다고. 이 문을 열고 나올 남자가, 구지겸이 정말로 미워서 죽을 것만 같다고.
초인종을 누르려고 하는 찰나, 벌컥 하고 문이 열렸다. 외출하려던 중이었는지 밖으로 나오려던 지겸이 소희를 발견하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소희야! 무슨 일이야. 안 그래도 김 실장님 연락받고 나가려던…. 아니 울었어? 어디 아픈 거야? 혹시 다쳤어?”
“내 전화… 왜 안 받았어요?”
소희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래도 눈물은 또 흘렀다. 눈앞이 흐려서 제 앞의 남자가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미안. 검사 중에 꺼놓고 다시 켜는 걸 잊어서…. 회의 중인 너한테 연락 올 줄 몰랐어. 전화 많이 했었지. 미안해, 미안해 소희야.”
왜 이렇게 울어. 대체 무슨 일이길래….
지겸이 몸을 낮춰 그녀를 바라봤다. 퉁퉁 부은 얼굴과 뺨에 가득한 눈물 자국에 당황하면서도 소희가 싫어할까 봐 차마 제 손으로 직접 닦아주질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 모습이 어쩐지 소희를 더 화나게 했다.
“뭐가 맨날 그렇게 미안해. 네? 미안할 짓은 애초에 하질 말아야죠! 정말…. 하으. 당신은 정말 나쁜 사람이야. 흑. 미워요. 진짜로 미워!”
소희가 되는 대로 주먹을 휘둘렀다. 지겸은 제 가슴과 뺨과 팔뚝에 부딪히는 작은 주먹을 피하지 않고 묵묵히 맞았다. 그저 걱정하는 표정으로. 울먹이는 소희를 맘껏 달래 주지도 못하는 걸 억울해하면서.
“내가 어떻게 할까? 응? 무슨 일인지만 말해 줘. 뭐든 할게, 뭔지 알아야 도와주지.”
왜 이렇게 자꾸 울어….
지겸의 눈가가 희미하게 흔들렸다. 제 앞에서 펑펑 우는 여자를 제대로 안아줄 수도 없어서. 무엇보다 그게 슬프고 억울해서.
“나, 나 처음이에요. 이렇게 누가 미웠던 적이 없었어요. 당신 정말 끔찍해요. 나한테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가 있어요? 싱가포르에서도 한국에 와서도! 나한테 이런 기분을 느끼게 해요? 당신이 뭔데? 대체 왜…!”
눈을 꽉 감고 주먹을 휘두르던 소희가 균형을 잃고 넘어질 뻔했다. 지겸이 바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며 부축했다.
“소희야….”
아무 힘도 남지 않은 그녀가 쓰러지듯 지겸에게 기댔다. 소희가 결국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눈물샘은 원래 이렇게 끝이 없는 건지 울어도 울어도 계속 눈물이 나온다는 게 신기했다.
그의 심장 소리가 들렸다. 평소보다 더 크고 빠르게 뛰는 것 같은 남자의 심장이 소희의 귓가에서 울려댔다. 그가 살아 있다. 뜨거웠다. 지겸의 품 안에 안겨 있으니 그제야 눈물이 잦아드는 것 같았다. 칼로 쿡쿡 쑤시는 것만 같던 가슴의 통증도 천천히 줄어들었다.
미워, 정말 미워. 밑도 끝도 없는 증오를 반복해 중얼거리던 소희가 고개를 들었다. 지겸의 뺨을 양손으로 쥐고 새까만 눈동자를 자신에게 맞췄다. 그는 순순히 그녀의 손길을 따랐다.
이 눈을 다시는 못 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괴로웠다. 이 남자의 눈동자가 정확히 무슨 색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푸른색이 섞인 까만색이었는지, 아니면 회색빛이 돌았는지도. 영영 모르게 될까 봐 너무 무서웠다.
하지만 여전히 잘 모르겠다. 소희는 그저 그의 눈동자에 담긴 제 모습만 발견했을 뿐이다. 그의 눈동자를 꽉 채운 바보 같은 여자의 얼굴은, 그녀만을 사랑하는 남자의 진심 그 자체였다.
아. 그 순간 소희는 알았다. 지겸이 전에 그녀에게 했던 말의 의미를.
절대로 머리로 알 수 없는 것. 설명한다고 설득되지 않는 것.
하지만 정말로 그 감정이 찾아왔을 땐, 누구도 모를 수 없다.
소희는 지겸을 미워한 게 아니었다.
어쩌면 한 번도 진짜로 미워한 적은 없을 것이다.
그녀를 휘몰아치고, 이성을 잃게끔 했던 격한 감정의 정체는 미움이라기엔 너무 절실하고 강렬했다.
“당신을….”
그의 가슴에 안긴 채 소희가 뭐라고 속삭였다.
지겸의 눈이 크게 떠졌다.
“뭐…? 소희야, 지금 뭐라고….”
그는 잘못 들은 거라고 확신했다. 자신이 드디어 미쳐버린 거라고. 하지만 소희의 입술이 다시 열리며 좀 더 분명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좋아해요. 나… 당신을 좋아하는 것 같아.”
흘러내린 눈물에 언 땅이 녹아내린 듯 산산이 부서져 내린 고백이었다.
그러니까 소희는, 지겸을 미워한 게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