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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쪼로롱 하고 새가 울었다. 소희가 아직 눈도 뜨지 못한 채 잠에서 덜 깬 귀를 쫑긋 세웠다. 한없이 고요한 가운데 어디선가 바람이나 물이 흐르는 잔잔하고 다정한 소리가 밀려왔다. 평소와는 다른, 낯선 기분인데. 여기가 어디더라.
끄응. 몸을 일으키는데 소희도 모르게 신음이 튀어나왔다.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속도 좀 거북하고.
“괜찮아?”
무거운 눈꺼풀을 겨우 들어 올리니 그녀가 누운 침대에서 좀 떨어진 소파에 앉아 있던 지겸이 벌떡 일어난다.
“속 많이 쓰려?”
“아, 아니요….”
소희는 그제야 자신이 어제 지겸을 따라 양평 별장에 왔었고, 와인을 마시다 잠들어 버렸다는 걸 깨달았다. 윽 쪽팔려. 혹시 이상한 얘기를 한 건 없겠지. 민망함에 차마 지겸과 눈을 맞추지 못했다. 조심스레 가물가물한 어젯밤의 기억들을 더듬어 봤다.
필름이라도 끊겼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슬프게도 소희는 자신이 했던 말들이 토씨 하나 빼놓지 않고 떠올랐다. 결국 그녀는 이불을 일부러 끌어당겨 제 머리끝까지 덮어버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지겸에게서 피식, 웃음이 터져 나와 소희의 위로 흩어졌다.
“임소희… 소희야. 아침 먹자, 우리.”
그의 손이 소희가 덮은 이불 위를 살며시 짚었다 떨어졌다. 순간 짧게 머물다 간 온기가 못내 아쉬웠다.
지겸이 방을 나가는 걸음 소리를 듣고 나서야 소희는 겨우 이불 밖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침대 옆에는 정갈하게 놓인 숙취 해소제와 물 한 컵이 보였다. 소희는 제발 제 기억이 잘못된 것이기를 빌고 또 빌며 약을 입에 털어 넣었다.
***
1층 식당으로 내려가니 조용했다. 소희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다른 분들은 다 어디 가셨지. 그런 그녀의 의문을 눈치챈 지겸이 먼저 답해 준다.
“박 실장님은 작은아버지 기일 때문에 오셨던 거라, 어젯밤 퇴근하셨어. 댁이 여기서 20분 거리 정도라. 김 실장님은 내가 부탁한 일 처리 때문에 일찍 서울로 가셨고.”
그와 함께 있으면 매번 이런 게 신기하다. 지겸은 채 묻기도 전에 소희가 무엇을 궁금해하는지 귀신같이 알아채고 먼저 답을 해 온다. 마치 그녀 머릿속을 이미 읽고 있기라도 하듯이.
“앉아.”
몇 가지 밑반찬과 새우젓으로 간을 한 콩나물국. 깔끔하게 차려진 아침상은 보기에도 꽤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이걸 직접… 차린 거예요?”
“뭐… 대충.”
쑥스러운지 지겸이 제 입가를 가리더니 슬쩍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잘 먹겠습니다아.”
원래는 아침에 밥을 잘 안 먹는 소희였지만 속이 쓰리니까. 해장은 해야겠지. 소희는 국을 먼저 크게 떠서 입에 넣었다.
“음…?”
뭔가 이상한데. 한 입, 또 한 입. 연신 국만 먹는 소희를 물끄러미 보던 지겸의 눈가에 긴장의 빛이 맴돌았다.
“맛없어?”
“어… 그게 맛이. 없어.”
지겸의 표정이 순간 굳는 게 느껴졌다.
“미안. 못 먹을 정도야? 이리 줘. 다시 해 줄게.”
“그런 게 아니라. 이거 콩나물국 아니에요?”
콩나물이 엄청 많이 들어 있는데. 새우젓도 보이고.
“응, 맞는데….”
그의 얼굴에 점점 그늘이 졌다. 소희는 국을 몇 번 더 떠먹다가 정말 신기하다는 투로 덧붙였다.
“어떻게 이렇게… 아무 맛도 안 나지? 콩나물 냄새도 안 나. 맛이 없다는 게 그 뜻이 아니라 진짜로 맛이… 없어. 무맛이에요.”
“…콩나물을 너무 많이 씻었나?”
지겸이 조금 풀이 죽은 말투로 말했다.
“몇 번이나 씻었길래요?”
“스무 번 정도? 아니다 한 서른 번? 잘 기억 안 나.”
그냥 너 먹을 건데, 나쁜 거 묻어 있을까 봐….
“새우젓은 얼마나 넣었어요?”
“티스푼보다 작게…?”
부엌 쪽을 흘끔 보니 거의 들통만 한 냄비에 국을 끓인 모양인데 새우젓을 티스푼보다 작게 넣었다고?
“왜 그렇게 간을 조금 했어요?”
“싱거운 게 몸에 좋잖아.”
소희 너 먹을 거니까.
“소금 좀 가져올까?”
“음… 그럴까요?”
벌떡 일어나서 부엌 쪽으로 들어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소희가 쳐다봤다. 그의 귓바퀴가 약간 빨갛게 물든 듯 보인다면 착각일까. 이상하게 소희의 입가에 자꾸만 미소가 감돈다.
마주한 1층의 통창으로 아침의 햇살이 은은하게 비춰왔다. 괜히 눈이 부셔서 소희는 눈을 자꾸만 깜빡였다.
***
일부러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리려 해도 운전하는 지겸의 옆모습으로 자꾸 시선이 갔다. 그가 핸들을 잡고 부드럽게 돌릴 때면 셔츠 아래 드러난 팔뚝에 갈라진 핏줄이 길게 불거져 올랐다. 그걸 보고 있자니 자꾸만 어느 밤의 잔상이 떠올랐다. 자신도 모르게 척추 부근에 힘이 들어갔다.
“너무 느리게 가는 거 아니에요? 나 늦으면 안 되는데….”
지겸이 얼마나 조심조심 천천히 운전하는지 옆에 탄 그녀가 다 속이 탈 지경이었다. 소희는 자기가 대신 운전대를 잡으면 안 되냐고 몇 번이나 물어보려다 참았다. 애초에 보조석에 앉으려는 그녀를 사고 나면 제일 위험한 자리라며 뒷좌석에 앉히려고 해 불필요한 실랑이도 벌였다.
오늘은 개강 전 교수 회의가 있는 날이라 지겸이 그녀를 학교까지 데려다주기로 했다. 차 안엔 은은하게 그의 체향이 배어 있다. 이제는 눈만 감아도 선명히 떠오르는데 이걸 지훈의 것이라고 착각했다니 스스로가 우습다. 소희는 창문을 조금 열었다. 답답하기보다는 그의 페로몬에 괜히 기분이 조금 이상해져서. 지겸이 최선을 다해 억제하고 있었지만, 이미 모든 걸 아는 소희에게는 그 미묘한 정도도 영향을 미쳤다.
“노래 들을까?”
창문을 열고 밖을 주시하는 그녀가 지루해 보였는지 지겸이 음악을 틀었다.
“어… 엘가?”
수수께끼 변주곡이었다. 오랫동안 첼로를 배운 소희가 가장 좋아하는 작곡가 중 한 명이었다. 영국의 대표적인 낭만주의 작곡가.
“얘기한 적 있어, 전에.”
“내가요?”
“응, 첼로 협주곡 좋아한다고. E 단조, 아다지오-모데라토.”
그러고 보니 그랬지. 어렸을 때부터 첼로를 연주해 왔던 소희였지만 재림대에서 강의를 시작한 이후부터는 손에서 놓은 지 오래였다. 본인조차 잊고 있었던 사실을 이 남자는 어떻게 이렇게 잘 알까.
“확실히 알레그로(빠르고 경쾌하게)보다는 아다지오(아주 느리게)가 어울리지. 너 걷는 것도 엄청 느리잖아.”
“아니 이거랑 그거랑 무슨 상관이에요?”
소희의 볼멘소리에 여전히 전방을 제대로 주시하면서도 그는 피식, 하고 웃었다.
“요즘은 왜 연주 안 해? 좋았는데.”
“내가 첼로 켜는 거 들은 적 있어요?”
“응. 한 번. 아주 오래전에.”
어느 여름날. 그러니까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그 날. 지겸이 정원으로 나가는 어린 소희를 따라나섰던 건 그녀의 첼로 연주를 들은 직후였다. 엘가의 ‘사랑의 인사(Salut D’Amour)’.
지겸도 많이 들었던 선율이었다. 워낙 유명한 곡이기도 하고, 특별할 것도 없는 말랑말랑한 클래식 곡. 그런데 소희의 연주는 뭐랄까… 아주 진중하고 조심스러웠다. 단순히 긴장한 건 아닌 듯했다. 소심해 보이던 소녀가 사람들 앞에 나섰을 때는 오히려 떨지도 않았으니까. 그냥 타고난 성격인 듯했다.
거의 자기 몸만 한 악기를 매만지는 조그마한 손은 귀여운 동물을 쓰다듬듯 다정했다. 소희가 손끝으로 하나하나 짚어내고 현으로 짓치며 끌어내는 음들은 하나같이 사랑스러웠다. 그렇게 번져 난 음들이 두둥실 떠돌다 공중에서 서로를 끌어안고 춤을 추는 것만 같았다. 아름답고, 포근했다. 꼭 그녀처럼.
“사랑의 인사, 엘가가 부인 앨리스를 위해 작곡한 노래인 거 알아요?”
지겸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희가 좋아하는 작곡가라는 걸 안 이후로 그의 모든 노래를 찾아 들어 왔으니까.
“서로 너무 사랑해서, 가족들이 반대해도 소용없었대요. 그렇게 부인이 먼저 세상을 뜨자 엘가는 이후 14년 동안이나 아무것도 작곡하지 못했고.”
응, 그러다 죽었지.
지겸이 무심히 말하자 소희가 그를 노려봤다. 어딘가 제 옆의 남자와 저 낭만적인 작곡가 사이에 닮은 구석이 있어 보였다. 그게 그다지 맘에 들지 않았다.
“바보들 같아요.”
“…뭐?”
반문하는 그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묻어났다.
“그리운 사람을 생각하며 더 멋진 곡을 많이 만들었어야지. 내가 앨리스였다면 하늘에서 하나도 기쁘지 않았을 거야.”
그래, 그렇네. 지겸은 계속 고개만 끄덕였다. 아까부터 소희가 뭐라고 말하든, 어떤 질문을 하든 그저 끄덕이기만.
“소희야.”
차는 어느덧 목적지에 도착했다. 천천히 차를 세우고, 지겸이 그녀를 불렀다.
“내일 오전에 받기로 했어. 각인 제거술.”
아. 소희가 그를 돌아봤다. 그동안 잠시 잊고 있었는데…. 지겸의 얼굴은 편안해 보였다. 이제야 모든 걸 받아들이기로 한 사람처럼. 그 평온함이 이상하게 그녀를 건드렸다. 목에 가시라도 걸린 것처럼 목구멍 안이 까슬거렸다.
“지금 병원 가면 검사 먼저 받겠지만, 이 정도 회복됐으면 가능할 것 같다고 하네.”
잘했어요. 라고 답해야 하는데 이상하게 입 밖으로 내뱉어지지 않았다.
“고마워. 전부 다…. 그리고 작은아버지 제사도.”
지겸의 눈동자가 빈틈없이 그녀를 향했다.
“처음이었어, 작은아버지 기일에 누군가와 함께 있었던 것.”
어느덧 차 안에 흐르는 노래는 사랑의 인사로 바뀌어 있었다. 익숙한 첼로의 선율이 피아노의 음색과 어우러져 두 사람을 감쌌다.
지겸이 망설이는 듯하더니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한숨처럼 제 진심을 뱉어냈다.
“미안해…. 아무 의미 없는 거 알아. 이제 와 이런 사과가 아무 소용없다는 것도. 하지만 소희야.”
사랑해.
그는 그녀를 나직하게 부르더니 더는 말하지 않았다. 미처 소리가 되어 나오지도 못한 진심을 알아들은 건 소희였다. 순간 그녀는 제 몸속에서 아주 천천히 산소가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명치 부분이 묵직해지더니 가슴이 갑갑해져 오고 마침내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이제, 괜찮아요. 괜찮을… 거예요.”
진심이었다. 지겸이 한 짓을 전부 용서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얼마나 자책하고 괴로워하는지를 이젠 그녀도 안다. 그러니까 괜찮다는 말 정도는 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걸로 조금이라도 그의 숨통이 트이기를 바랐다.
잘 지내요. 다급하게 작별 인사를 뱉어내고 소희가 차 문을 열고 나왔다. 뒤돌아보지 않고 걸었다. 그에게서 멀어지는 동안, 지겸이 한참 동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느꼈다. 소희는 자신이 없었다. 숨이 막혔다. 괴로웠다. 지겸의 짙게 가라앉은 눈을, 온몸으로 드러내는 고백을 받아들일 수도 외면할 수도 없어서.
회의실에 들어와서도 그녀는 애꿎은 숨만 자꾸 몰아쉬었다. 마치 장거리 달리기라도 뛰고 온 것처럼 왼쪽 가슴이 뻐근했다. 후…. 후우….
“어머 임 교수, 얼굴이 왜 그래?”
그렇게 거친 숨을 다독이며 앉아 있는데, 마침 들어오던 동료 교수가 그녀의 안색부터 살폈다.
“아! 자기도 봤구나! 억, 정말 끔찍하더라.”
“네? 뭘….”
“아니 나 오늘 택시 탔거든. 후문에서 내렸는데, 그쪽에 교통사고 엄청나게 크게 났더라고. 그거 본 거 아니야?”
“아닌데….”
두근. 소희는 괜히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설마, 그럴 리가 없을 텐데도.
“아. 엄청났어. 검은색 세단이 트럭이랑 부딪친 모양인데 산산조각이 났더라고. 나 그런 거 처음 보잖아. 오늘 잠 못 잘 듯.”
몸을 부르르 떨며 호들갑을 떠는 동료를 보던 소희의 얼굴에 점점 핏기가 가셨다.
“보니까 세단이 중앙선을 넘은 것 같던데. 이 대낮에 술 취했을 리는 없고.”
설마 남의 학교 앞에서 자살 시도 뭐 이런 건 아니겠지?
쾅. 그때 소희가 벌떡 일어났다.
“임 교수? 뭐야, 어디가! 이제 곧 회의 시작인데.”
지겸. 구지겸. 당신…. 설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어떤 생각이나 판단을 할 겨를도 없었다.
소희가 회의실을 나와 달리기 시작했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지겸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이나 미끄러질 뻔한 손끝에 겨우 힘을 줘 번호를 눌렀다. 오래 이어지던 신호가 뚝 끊어졌다. 계속 걸어도 똑같았다.
그는 답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