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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강탈-68화 (68/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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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다른 로열 집안이 그렇듯 아주 어릴 때부터 결혼을 약속한 사이였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첫눈에 반했고, 어머니 또한 아버지를 사랑하셨다. 모든 것은 순조로워 보였다. 하지만 구 회장이 열여섯이 되던 해, 그는 로열도 보통의 우성도 아닌 열성에 가까운 알파로 발현했다. 지겸의 어머니가 로열 오메가로 발현한 지 일 년 만의 일이었다.

“우리 아버지, 로열 알파가 아니셔.”

얼마 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네?”

소희가 놀라서 지겸을 쳐다봤다. 성공한 로열 알파 기업인 중 대표적인 사례로 가장 먼저 손꼽히는 게 구 회장이다. 그런데 그가 로열 알파가 아니었다고?

“그런데 작은아버지는, 로열 알파셨거든. 할아버지와 똑같이.”

어머니의 집안은 물론 이 사실을 그다지 탐탁지 않아 했다. 하지만 베논 제약과 사돈이 될 기회를 놓칠 수 없었기 때문에 약혼은 그대로 유지됐다. 문제는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동생, 즉 지겸의 작은아버지가 우성중의 우성인 로열 알파로 발현했다는 데 있었다.

지겸의 할아버지는 가부장적일 뿐 아니라 로열 알파로서의 선민의식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는 큰아들이 로열 알파가 아니라는 데 크게 실망했고, 작은아들이 로열 알파로 거듭나자 무조건 장자를 후계자로 키우겠다던 원래의 계획을 번복했다.

구 회장은 그 후 매일매일을 치열하게 살았다. 타고난 능력의 차이는 노력으로 쉽게 부술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지적인 능력은 물론 신체적 능력에서도 그와 동생은 점점 더 격차를 보였다. 그럴수록 그는 악을 쓰고 성과를 냈다. 박 실장님의 말에 따르면 20~30대의 그는 하루에 2시간 이상은 잠들지 않았다고 할 정도니까.

구 회장이 로열 알파가 아니라는 걸 아는 사람은 가족이 전부였다. 그 사실을 외부에 들키지 않기 위해 그는 더욱 자신을 스스로 몰아붙였다. 원래 제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을 동생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하지만 작은아버지는 베논을 물려받을 생각이 없었어.”

다행인지 불행인지 작은아버지는 회사 경영에는 일절 관심이 없었다. 보통 승부욕뿐 아니라 출세욕이나 과시욕이 강한 알파의 특성상 아버지와 겨뤄볼 만도 한데, 그는 그러지 않았다. 작은아버지는 대학을 졸업한 뒤 만류하는 할아버지와 이사들을 무시하고 사진을 찍으며 국내외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 할아버지는 자신의 둘째 아들을 설득해 보려 갖은 애를 썼지만 작은아버지의 가치관은 확고했다. 그는 사진작가인 자신의 삶에 충분히 만족했다.

“그런데 왜….”

소희가 잘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구 회장이, 지겸의 아버지가 얼마나 치열하게 살아왔는지는 알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게 자신의 아내와 동생의 사이를 의심할 이유가 되는 것은 아니다.

“로열은 로열끼리 맞는다고 생각하셨으니까. 그게 본능이라고.”

지겸이 잠시 참았던 숨을 길게 내뱉었다. 낮게 가라앉은 그의 목소리가 붉은 와인의 떫은 향에 스며들었다.

결국, 모든 건 구 회장의 열등감 때문이었다. 그는 누구보다 욕심이 크고 권력욕이 강한 남자였다. 하지만 타고난 능력이 그의 의지에 못 미쳤다. 더군다나 자신보다 뛰어난 동생과 그를 후계자로 삼고 싶어 하는 아버지 사이에서 좌절했다.

그 결핍이 사랑하는 여자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졌다. 구 회장은 아무런 근거 없이 동생과 아내 사이를 의심하고, 옭아맸다. 아내가 집안일 때문에 의례상 동생에게 연락한 것조차 바람의 증거라며 몰아붙였다. 나중엔 그녀가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게 감시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아버지를 사랑하셨어, 아주 많이.”

어린 시절 지겸이 기억하기에 분명 그랬다. 아버지를 바라보던 어머니의 눈빛엔 끝까지 원망이나 증오는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변해 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안타까워하고 가슴 아파하는 여자의 눈. 강도만으로 치자면 아버지로부터 다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큰 사랑을 받고 있었지만, 그건 사랑이라기보다는 폭력에 가까웠다. 사랑의 이름으로 포장된 감옥에 갇힌 어머니는 매일 조금씩 시들어 갔다.

이상하게 자꾸만 목이 탔다. 소희는 지겸의 이야기를 들으며 연신 와인으로 제 목을 축였다. 어디선가 무거운 돌덩어리가 굴러와 그녀의 가슴을 묵직하게 짓누르는 것 같았다. 소희는 뭐라 쉽사리 답할 수 없어 입술을 달싹였다.

고개를 들었을 때, 지겸은 소희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언제나 저 눈동자가 문제라고 생각했다. 조금 전 비구름이 몰려들기 전의 호수같이, 그도 아니면 달빛이 일렁이는 강물같이. 이 세상의 슬픔도 기쁨도 다 무의미하다는 듯 건조하고 담담한 눈빛의 수면 아래 뜨겁고 촉촉한 욕망이 고요하게 숨겨져 있다.

소희는 그 물속에 몸을 담가본 적이 있다. 그녀를 안고, 파고들어 마침내 가질 때. 그럴 때면 남자의 눈동자에 자신이 통째로 삼켜지는 기분이 들곤 했으니까. 이제는 완전히 그곳에서 빠져나왔다고 생각하는데도, 여전히 촉촉하게 젖은 물기가 채 마르지 않았는지 그의 눈동자는 소희의 마음을 무겁게 가라앉힌다.

“그러니까 도망가, 너도.”

“…네?”

두 사람의 눈동자가 허공에서 마주쳤다. 물기 어린 지겸의 눈가가 어느덧 붉어졌다.

“내가 언제 그렇게 변할지 모르니까. 그 아버지의 아들이잖아, 나라고 다를 바 있겠어? 벌써 봐. 내가 너한테 무슨 짓을 했었는지. 그러니까 최대한 멀리 떨어져, 소희야.”

각인 제거술 받고 나면, 그런 내 근처에는 오지도 마….

이상한 일이었다. 절대 다가오지 말라고, 자신에게서 도망치라고 거듭 말하는 지겸의 말이 오히려 제발 떠나지 말아 말라는 애원처럼 들렸다. 벌써 취한 건가…. 소희는 머리가 조금 어지러운 듯도 했고, 눈꺼풀이 사뭇 무겁다고도 생각했다.

털어놓기 가장 힘들었을 이야기를 해 준 남자를 토닥이며 위로해 주고 싶기도, 동시에 몹시 질책하고 싶기도 했다.

“… 개 같아.”

소희의 입술 새로 중얼거리며 뱉어진 말에 지겸이 흠칫 놀랐다.

“소희야…?”

“구지겸 당신요오…, 개 같아요. 그거 알고 있어요?”

아, 이 여자 지금 취했구나.

지겸이 테이블 위에서 와인 병을 슬쩍 치워 바닥에 내려놓았다.

아버지에 관해 이야기를 하느라 미처 눈치를 못 채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소희의 눈이 묘하게 흐릿하다. 자꾸만 입꼬리를 올리며 웃는 통에 보조개가 쏙 들어갔다 말았다를 반복했다.

“그 추우운 나라에서 썰매 끄는 개 있잖아요. 꼭 늑대같이 생긴 애들.”

“허스키?”

아 정말, 개. 그런 뜻이었구나. 지겸이 나직이 웃었다. 작은아버지에, 어머니 생각까지. 갑갑하던 가슴 한구석에 조금 숨결이 불어 넣어진다. 우습게도 그녀의 술주정 한마디에. 이 모든 게 소희 덕분이다.

끄덕끄덕. 소희가 힘차게 고개를 위아래로 주억거렸다.

저러다 턱이라도 박겠네. 당황한 지겸이 제 손을 그녀의 얼굴 아래쪽으로 슬쩍 뻗어 상 위에 뒀다.

“걔네 막 날카롭고 무섭게 생겼잖아요. 근데 실은 엄~청 온순한 댕댕이래요. 주인한테는 무조건 복종! 충성심도 뛰어나고. 인내와 끈기도….”

아, 인내와 끈기. 당신은 그건 아니던가.

소희가 눈을 가늘게 뜨고 지겸을 위아래로 훑었다. 그 모습에 지겸은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보려 노력했지만 결국은 멍청하게 입가 가득 미소를 띠고 말았다. 혹시나, 혹시나지만. 다음이라는 것이 있다면 이제 소희에게 술은 절대 못 마시게 해야겠다고 다짐하며.

“당신 정말 나쁜 사람이에요. 진짜 진짜 진짜 나빠.”

소희가 이번엔 삿대질을 시작한다. 지겸이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겨우 참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맞아. 나쁘지.”

“그중에서도 제일 나쁜 게 뭔지 알아요?”

어떻게 모르겠어. 널 속인 것. 사랑한다면서 기만한 것. 지겸의 입 안에 남은 커피 향이 지독히도 썼다. 그의 입가가 희미하게 떨렸다.

“아니! 모를걸요. 그 얼굴. 그게 정말 나쁘고 짜증 나.”

“응…?”

지겸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소희의 얼굴이 온통 붉었다. 두 뺨도, 자꾸만 종알거리는 입술도. 그녀가 마신 와인의 빛깔을 닮아갔다.

술이 많이 오른 모양인데… 어서 쉬게끔 해 줘야 할 텐데. 생각하면서도 지겸은 그녀를 향한 제 눈을 뗄 줄 몰랐다. 아주 조금만, 조금만 더…. 이렇게 지켜봐도 괜찮겠지. 이젠 그조차 헷갈린다. 지금 취한 게 소희인지, 아니면 자신인지.

“너어무 잘생겼어…. 그게 마음에 안 든다고요. 아니 지훈…. 여튼 똑같이 생겼는데 왜 더 잘 생겨 보이지. 내 눈이 이상한가? 눈이 그새 나빠졌나? 으응….”

소희가 정말 이상하다며 제 눈을 마구 비볐다. 지겸의 시선이 촉촉하게 젖은 그녀의 눈동자를 향했다가 천천히 내려와 작고 도톰한 입술에 걸렸다. 그간 그의 곁에서는 각별히 더 조심하던 그녀가 술에 취해서인지 편안하게 오메가 페로몬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달콤한 꽃향기가 지겸을 아찔하게 감싼다. 분홍빛의 여린 꽃잎이 그의 가슴 속에 팔랑이며 하나둘 쌓여간다. 두근. 어찌할 새도 없이 그의 심장이 뛰는 속도가 빨라진다. 하긴 안 그러는 게 더 이상하지. 그녀가 제 심장의, 각인의 주인이니까.

툭.

지겸의 큰 손이 소희의 두 눈을 가만히 덮었다.

그 눈동자를 조금이라도 더 마주하고 있으면, 키스하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아서.

파드득. 당황한 소희의 숨결이 지겸의 손목을 간질이다 잦아든다. 그녀를 감싼 손의 온기도, 그의 손에 와닿는 숨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뜨겁기만 하다.

지겸은 튀어 오르는 제 심장 박동을 막아 누르듯 소희의 눈가를 그렇게 한참 동안 감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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