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 며칠이 흘렀다. 병원에서 함께 밥을 먹고, 각자 책을 읽기도 하고, 하루에 한 번 정도는 주변을 산책했다. 아무 대화도 없이 몇 시간이 흐르기도 했다. 그래도 두 사람 사이엔 어색함이 없었다. 다행히 소희가 곁에 있어서인지 지겸의 상태는 눈에 띄게 호전됐다.
개강일이 다가오자 소희는 강의 준비로 바빴다. 연구년을 간다고 해도 이번 학기까지는 마치고 갈 생각이었기에 할 일이 많았다. 한참을 앉아 강의 계획서를 수정하고 있는데, 그녀에게 뭉근히 와닿는 시선이 느껴졌다.
“어, 뭐… 해요?”
소희가 고개를 돌리니, 소파에 걸터앉은 지겸이 턱까지 괴고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침대에서 쉬고 있는 줄 알았는데 언제부터 저러고 있었대.
“왜 안 누워 있고…. 응? 옷이….”
환자복을 입고 있어야 할 사람이 어느새 말끔한 정장 차림이었다. 검은색 슈트에 검은색 타이까지.
“잠깐 다녀올 데가 있어서. 몇 시간이면 될 거야. 나 때문에 답답하고 힘들었을 텐데 혼자 편하게 좀 쉬고 있어.”
알겠지?
지겸이 가지런한 소희의 정수리를 쓰다듬으려다 참고 일어섰다. 다녀오는 내내 그녀가 눈에 밟힐 것 같아 짧은 순간이었지만 사진이라도 찍듯 그녀의 얼굴 곳곳을 마음에 담았다.
탁. 그때 소희가 그의 팔을 잡아 세웠다.
“혼자 가게요?”
“아니, 당연히 김 실장님이 운전하지.”
“…나는?”
“응?”
지겸이 멈칫했다. 소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자연스럽게 옷장에서 재킷을 꺼내 입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그가 당황하며 물었다.
“소희, 너도… 같이 가게?”
“네.”
당연하지 않냐는 듯한 말투였다.
“아니, 덕분에 많이 좋아졌어. 그리고 잠깐이니까.”
말리려는 지겸을 소희가 흘겨봤다.
“누구 살인자 만들 일 있어요? 그사이 당신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소희가 단호한 말투로 쏘아붙이곤 자연스럽게 앞장을 섰다.
“뭐 해요, 빨리 출발하지 않고.”
잠시 멍하니 서 있던 지겸이 곧 그녀를 따랐다. 참으려 해도 그의 입가에 자꾸만 웃음이 묻어났다.
***
검은색 세단이 미끄러져 도착한 곳은 양평의 한 별장이었다. 큰 호숫가를 뒤에 두고 2층짜리 회색빛 벽돌집이 자리 잡고 있었다. 정원의 잔디와 나무는 누군가 오래 공들여 관리한 듯 깔끔하게 정리돼 있었다. 특히 입구의 아치형 정문을 감싸고 피어난 붉은 장미 덩굴이 인상적이었다.
먼저 차에서 내린 지겸이 소희를 향해 몸을 굽히며 제 손을 내밀었다. 잠시 그가 내민 손을 바라보던 소희가 가볍게 잡고 내렸다. 그는 소희의 발이 땅을 제대로 밟고 설 때까지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마치 어린아이를 다루듯 조심스럽고 섬세한 동작에 소희는 당황했다.
“환자는 내가 아닌데….”
그때 나이가 지긋한 노인이 차 쪽으로 다가왔다.
“어이구, 이게 누구십니까.”
작업복을 입고 면장갑을 낀 노인은 지겸을 향해 푸근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지겸은 스스럼없이 다가가 반갑게 웃으며 노인을 안았다.
“잘 지내셨지요, 박 실장님.”
“도련님도 참. 은퇴한 지가 언젠데. 그냥 할아버지라고 하셔도 될 텐데.”
허허, 웃던 노인이 지겸 뒤에 서 있던 소희를 발견했다. 잠깐 놀란 듯한 눈빛이 그를 스쳤지만 곧 평정을 되찾고는 악수를 청했다.
“어릴 때 모습 그대로시네요. 재림재단 따님이시죠?”
“아, 네…. 안녕하세요.”
소희를 바라보는 노인의 눈빛이 따뜻했다.
“할아버지 때부터 우리 집안일 봐주신 실장님. 내가 제일 존경하는 분.”
지겸이 그렇게 애정을 담아 누군가를 소개하는 건 처음이었다. 그 말을 듣던 노인의 입가에 자글자글하던 주름이 부드럽게 호선을 그리며 펴졌다.
“별 쓸데없는 얘기를 하십니다. 오늘 오실 줄 알고 준비해 두고 있었습니다. 바로 시작할까요?”
“잠시만, 한 시간 정도 후에 준비해 주시겠습니까. 그리고 오늘은… 둘이 하겠습니다.”
지겸이 소희 쪽으로 눈짓하며 답했다. 박 실장이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희야, 우리 좀 걸을까.”
“응, 그래요.”
그를 따라 소희가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별장 뒷문을 나서니 끝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커다란 호수가 나타났다. 양쪽으로는 완만한 산이 둘러싸고 있어 고요하고 포근했다. 어느덧 해가 질 때가 됐는지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아래 야트막한 산 위로 붉은 노을이 걸렸다.
“실은 오늘 우리 작은아버지 기일이야. 아버지 동생.”
“앗… 그런 거면 미리 얘기 좀 해 주죠. 옷을 더 갖춰 입는 건데.”
소희가 청바지에 얇은 니트 위에 재킷을 걸친 제 차림새를 점검하듯 훑었다. 심지어 운동화까지 신고 왔는데. 지겸과 병원에 머무는 동안은 최대한 편한 옷차림으로 있느라 격식을 갖출 만한 옷이 없었다. 투덜대는 그녀를 보고 지겸이 피식 웃었다.
“괜찮아. 우리 작은아버지는 그런 모습, 더 좋아하셨을 거야.”
제 작은아버지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지겸의 목소리는 다감했다. 친아버지인 구 회장에 대해 말할 때와는 완전히 다른 온도의 표정과 말투에서 은근한 애정이 묻어났다.
“그분이랑 많이 친했어요?”
“작은아버지? …응. 아버지는 회사 일로 늘 바빴고, 시간이 있어도 형이랑 보냈지. 엄마는 외출도 잘 못 하셨고. 작은아버지가 방학 때마다 날 여기 데려오셨었어. 낚시도 하고, 둘이서 야구도 하고.”
둘이? 소희가 애매한 표정을 지으며 돌아보자 지겸이 덧붙었다.
“아, 형은 작은아버지를 싫어했어. 우리 아버지가… 작은아버지를 달가워하시지 않았거든.”
대체 어떤 속사정이 있었던 걸까. 소희는 어딘가 쓸쓸해지는 그의 얼굴을 보며 제 가슴 한편도 같이 먹먹해지는 걸 느꼈다.
지겸은 호수 경치가 잘 보이는 곳에 소박한 제사상을 차렸다. 많이 해 봤는지 익숙한 솜씨였다. 과일과 전, 치즈와 몇 가지 마른안주, 그리고 레드와인. 제사상이라기엔 서양식 주안상에 가까웠다.
“응? 청주가 아니고요?”
지겸이 크리스털 와인잔에 붉은빛 액체를 따르자 소희가 놀라 물었다.
“작은아버지가 와인을 더 좋아하셨거든. 이 호숫가에 앉아 같이 낚시를 할 때면 꼭 와인을 마시곤 하셨지. 나는 와인잔에 포도 주스를 따라주시고.”
지겸이 향을 피웠다. 호숫가에 마치 나뭇가지가 타들어 가는 듯 쌉싸름하고 오묘한 냄새가 퍼져갔다. 코끝이 조금 매웠다.
그가 무릎을 꿇고 앉아 가볍게 묵념을 할 동안 소희도 옆에서 같이 고개를 숙였다. 잘은 모르겠지만 이 제사상의 주인공이 지겸의 외로웠던 어린 시절을 따뜻하게 데워준 거의 유일한 사람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호수에서 건졌다고 들었어. 작은아버지의 시체.”
차렸던 상을 정리하며 지겸이 담담하게 말했다. 놀란 소희가 그를 돌아봤다.
“자살로 처리됐지만. 글쎄…. 믿지는 않아. 내가 기억하는 작은아버지는 삶에 열정적인 분이셨으니까.”
붉은 해가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고 어스름이 사위를 감쌀 때까지 지겸은 한참을 더 서 있었다. 소희가 그 곁을 가만히 지켰다. 호수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가 유독 짙게 가라앉아 보였다. 아직 잎사귀가 제대로 나지 않은 초봄의 나뭇가지들이 호숫가를 맴도는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흩날렸다.
노을을 삼켜낸 수면은 이제 초저녁의 하늘을 담고 있었다. 검푸른 물결은 잔잔하게 흘렀지만, 빛이 빠져나간 호숫가는 쓸쓸함을 넘어서 어딘가 생경하고 조금 무섭기까지 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하늘에 비구름이 몰려들었다. 지겸과 소희의 뺨 위로 빗물이 하나둘 떨어져 내렸다.
***
빗줄기는 초봄답지 않게 굵고 거칠었다. 곧 천둥과 번개까지 번쩍이며 요란하게 울려댔다. 별장이 산자락에 있는지라 이런 거친 날씨에 산길을 운전하는 건 무리였다. 두 사람은 어쩔 수 없이 비가 잦아들 때까지 이곳에 몇 시간만 더 머물기로 했다. 지겸은 소희를 신경 쓰며 원하면 언제든 돌아가도 괜찮다고 거듭 강조했으나 도리어 그녀 쪽에서 무리할 필요 없다고 답했다.
사실 소희는 궁금했다. 지겸의 어린 시절 추억이 묻어 있을 별장 여기저기를 좀 더 살펴보고 싶기도 했고, 말도 별로 없는 사람이 은퇴하신 박 실장님 앞에서는 넉살 좋게 바뀌는 모습도 재미있었다. 무엇보다 그의 작은아버지에 대해 더 듣고 싶었다.
박 실장은 오랜만에 별장을 방문한 손님들의 접대가 즐거운지 끊임없이 고기를 굽고 음식을 내왔다. 더는 먹을 수 없을 정도로 든든하게 먹고, 지겸은 소희에게 별장 여기저기를 구경시켜 줬다. 2층에는 작은 응접실이 있었는데, 꽤 큰 와인셀러가 눈에 띄었다. 옆에 놓인 장식장에는 액자들이 가득했다. 지겸이 그중에 하나를 꺼내 소희에게 건넸다.
“작은아버지랑 나.”
와… 생각보다 귀여웠네. 소희가 자기도 모르게 작게 속삭였다. 분명히 어린 시절에 한두 번 봤던 얼굴인데도 묘하게 낯설었다. 활짝 웃고 있어서 그러려나. 사진 속에는 초등학생 지겸이 커다란 물고기를 들고 흥분한 모습이 찍혀 있었다. 그리고 옆에 한 남자가 흐뭇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사람이구나. 어딘지 모르게 지금의 지겸을 떠올리게 하는 얼굴이었다. 특히 곧은 눈썹이나 눈매, 은근하게 미소를 머금은 입가에서 풍겨 나오는 분위기가 그러했다.
“커피 줄까?”
“응, 좋아요.”
지겸이 커피를 내리는 동안 소희가 장식장 속의 사진들을 차근히 훑었다. 그 안엔 온통 지겸뿐이었다. 야구 글러브를 끼고 있거나, 잔디에 누워 있거나, 호숫가에서 물놀이를 하는 그의 얼굴은 하나같이 평화롭고 즐거워 보였다.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코끝을 찡긋하고 있는 사진은 새끼 강아지같이 보이기도 했다. 흐음, 아기… 시베리안 허스키?
“자.”
응접실에 놓인 동그란 대리석 테이블에 두 사람이 마주 앉았다. 지겸은 커피와 함께 어디서 가져온 건지 초콜릿 마카롱을 꺼냈다. 상자의 로고를 보니 그녀가 정말 좋아하는 가게였다. 재림대 근처에 딱 한 군데 있는 걸로 아는데. 언제 사 왔지.
소희가 한 입 베어 무니 마카롱의 코크가 입 안에서 부서지며 달콤한 맛이 혀끝에 번졌다. 맛있다. 소희의 눈이 반짝이는 순간을, 지겸은 놓치지 않았다.
그녀가 커피를 몇 모금 홀짝이며 마카롱을 2개쯤 먹었을까. 지겸이 와인셀러에서 레드와인 한 병을 꺼내 제 앞의 잔을 채우기 시작했다.
“작은아버지가 즐겨 드시던 거. 요즘은 구하기 어렵더라.”
“흐음….”
지겸이 와인잔 베이스를 긴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살살 돌리는 모습을 소희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응시했다.
“왜?”
팟. 순간 소희가 지겸의 손에서 와인을 빼앗아가더니 몇 모금을 연달아 마셨다. 당황한 지겸이 와인을 삼킬 때마다 울컥대며 움직이는 그녀의 목을 멍하니 쳐다봤다.
“…소희야?”
“아픈 사람이 무슨 술을 마셔요. 오빠는 커피 마셔요. 이건 내가 마실게.”
피식, 그녀의 말에 지겸이 웃으며 답했다. 뭘 그런 걱정을.
“이 정도는 괜찮아, 네 덕분에 많이 좋아졌잖아.”
지겸이 그녀의 손에서 제 잔을 빼앗으려 손을 뻗자 소희가 그를 피하며 슬쩍 흘겨봤다.
“그럼 내일 당장 각인 제거술 받으면 되겠네요? 선생님께 전화 드릴까?”
단호한 소희의 응수에 지겸이 입을 다물었다.
“그럴 거 아니면, 그냥 내 말 잘 들어요.”
소희가 조금 전까지 마시던 제 커피잔을 지겸의 앞쪽으로 밀었다. 하하. 낮게 웃은 그가 대신 커피잔을 들었다. 항복선언이었다. 소희가 마시던 잔이라서인가. 평소보다 더 향긋하게 느껴졌다.
“딱 한 잔만 마셔. 곧 서울로 출발해야 하니까. 알겠지?”
뭐가 그리 신나는지 소희는 고개를 연신 끄덕거리며 웃었다.
지겸은 그런 그녀를 걱정스럽게 쳐다볼 뿐이었다. 지난번에 보니 술도 잘 못 마시는 것 같던데. 벌써 볼부터 살며시 붉게 달아오르려 하는 게 눈에 띄었다.
“작은아버지… 언제 돌아가신 거예요?”
소희가 잔 위쪽 얇은 림 부분을 손끝으로 매만지며 물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몇 달 뒤. 나… 미국 가기 직전이었으니까.”
지겸이 답하며 커피를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그녀 취향에 따라 우유를 듬뿍 넣은 커피는 입 안에서 부드럽게 녹아내렸다.
“그런데 왜 오늘 같은 날… 혼자. 사이가 많이 안 좋으셨어요…?”
다른 가족 아무도 없이 지겸 혼자 작은아버지의 제사를 지내는 모습은 소희가 보기에도 어색하고 쓸쓸한 광경이었다.
“응. 그랬지.”
지겸이 턱을 괸 채 고개를 살짝 돌려 자신의 사진이 가득한 장식장을 쳐다봤다. 그가 기억하는 젊은 시절 작은아버지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 봤다. 작은아버지가 살아서, 지금 제 아버지의 나이가 되었으면 어땠을까. 할아버지의 염원대로 그가 아버지 대신 베논 제약을 맡았다면 이런 일은 없지 않았을까.
“아버지는 끝까지 의심하셨거든. 어머니와… 작은아버지 사이를.”
그의 말에 놀란 소희가 와인을 마시려다 말고 손을 내려놓았다. 붉은 액체가 둥글고 투명한 잔 안에서 금방이라도 밖으로 넘칠 것처럼 거세게 출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