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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수하고 나온 지겸이 병실 창문 옆에 비스듬히 기대섰다. 커튼 사이로 스미는 햇볕이 아직 잠든 소희의 위로 은은하게 부서졌다. 이 세상에 오직 그녀 하나만 남아 있는 느낌이었다. 아니지, 자신과 그녀려나.
순간 그런 생각을 했다. 정말로 세상이 멸망하고, 알파든 오메가든 베타든 모든 인간이 죽고 자신과 소희만 남았으면 좋겠다. 그러면 그녀가 한 번쯤은 다시 자신을 돌아봐 주려나. 너무 외로울 테니까. 남은 사람이 자신밖에 없다면 그때는 그래도…. 이런 상상 자체가 자신이 그녀 곁에 머무를 수 없는 존재라는 걸 스스로 확인하는 것만 같아서 지겸의 입 안이 썼다.
“…그만 쳐다봐요.”
소희는 이미 일어나 있었다. 다만 제게 꽂히는 남자의 시선이 어색해 눈뜰 타이밍을 놓쳤을 뿐.
“…깨 있었어?”
“알고 있었으면서.”
그냥 알았다. 그런 게 있었다. 저 남자와 같은 공간에 있으면 말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전해지는 것들. 단순히 페로몬의 영향이라고 말하기에는 부족한, 조금 다른 묘한 기분이 들게 하는 신호.
피식, 그녀의 볼멘 목소리에 지겸이 낮게 웃었다. 그 나직한 웃음소리가 소희의 가슴께를 간질인다. 그러고 보니 저 웃음소리도 참 오랜만에 듣는구나.
소희가 눈만 슬쩍 떠서 지겸이 서 있는 쪽을 쳐다봤다. 환자복마저 잘 어울릴 줄이야, 황당해. 흰색 바탕에 하늘색 줄무늬, 펑퍼짐한 차림이 누가 입어도 추레해 보일 수밖에 없는 디자인이다. 그런데 그걸 대충 걸쳐 입고 팔을 쓱 걷어붙인 모습과 방금 씻고 나와 앞머리가 살짝 젖은 것까지…. 소희는 눈앞의 남자가 솔직히 멋지다고 생각하는 제 뇌의 사고를 멈춰버리고 싶었다.
“잘 잤어?”
지겸은 이미 그런 소희의 생각을 다 안다는 듯한 표정이다. 그게 괜스레 얄밉게 느껴졌다.
“어제 분명 소파에 누웠는데… 왜 내가 여기 있죠?”
소희가 대답 대신 쏘아붙였다. 안 자겠다는 그를 억지로 침대에 눕혀 재우고 그녀 또한 소파에서 잠깐 눈을 붙였는데, 막상 일어나 보니 자신이 침대에 누워 있어 황당했다.
그런 소희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지겸이 한쪽 어깨를 가볍게 으쓱하고는 답했다.
“난 원래 침대에서 안 자.”
“…거짓말. 누가 거짓말쟁이 아니랄까 봐.”
하. 이젠 입만 열면 시비네. 어쩐지 불만스럽다는 듯 내뱉었지만, 지겸의 목소리나 표정엔 귀여워 죽겠다는 투가 묻어났다.
“그날… 개에 물렸을 때. 새벽에 이런 병실에서 혼자 눈을 떴어. 지방 병원이었는데 나름 베논 제약 아들이라고 어찌나 큰 VIP룸을 내줬던지.”
소희가 이불을 좀 더 끌어당겨 안았다. 지겸이 그의 옛날 얘길 하는 건 처음이었다. 고요한 아침, 조용히 울리는 그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온몸은 갈기갈기 찢어질 것 같고, 목구멍은 부어서 물은커녕 침 삼키는 것도 못 하겠는데… 아무도 없더라고. 온통 하얀 천장, 벽, 이불…. 누군가 내 몸 위에 타서 목을 조르는 느낌이었달까.”
소희의 눈동자가 조금 흔들렸다. 그때 그녀가 일곱 살이었으니까 지겸은 겨우 열 살. 그런 상황을 무심히 넘기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
“그 후로 침대에서 못 자. 깨어나면 꼭 그 병실로 다시 돌아가 있을 것만 같아서.”
아. 너무 담담해 어떠한 감정조차 들어 있지 않은 그의 얼굴에 묘한 그늘이 덮었다. 외로웠겠구나. 아주 오랫동안, 이 남자는 그렇게 홀로 하얗고 어두운 시간을 혼자서 버텨온 거구나. 싱가포르에서 그와 동창이었던 의사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지겸은 그저 외로운 사람이라고 했었지.
이럴 때는 뭐라고 얘기해야 하지. 고민하던 소희는 문득 어젯밤이 떠올랐다.
“어, 그런데 어제는 분명….”
침대에서 잘 잠들지 않았던가? 약 때문에 괜찮았던 건가? 질문인지 혼잣말인지 모호한 말이 뱉어졌다.
“그러게.”
“응? 그게 무슨…?”
알쏭달쏭한 표정의 소희를 바라보는 지겸의 눈매가 조금 가늘어졌다. 그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스몄다. 솔직히 힘들었다. 침대에 누워 동그랗게 눈을 뜨고 꼼지락대는 소희를 지켜만 보는 것. 지겸이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커다란 그림자가 희미한 빛을 등지고 소희와의 거리를 좁혀들었다. 느긋한 걸음이 옮겨질 때마다 소희의 심장박동도 조금씩 빨라졌다. 온몸에 힘이 바싹 들어간다. 가까이 오지 말라고 말하고 싶은데 목소리조차 잘 뱉어지지 않는다.
“추워.”
하지만 다가온 지겸의 큰 손은 소희의 이불을 그녀의 턱 아래까지 바짝 당겨준 후 말끔하게 떨어진다. 그리고 침대 옆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로부터 안온한 체향이 스민다.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왜 이렇게 이 남자의 일거수일투족에 예민하게 반응하게 되는 건지. 소희는 그런 자신을 원망하면서 부러 천장만 뚫어지라 보고 있었다. 혹시나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그와 눈이라도 마주치면 당황하는 제 속마음을 그에게 들킬 것 같았다.
“유정 씨는… 괜찮아?”
그 묘한 정적을 먼저 깬 건 지겸이었다.
“아…. 노력하고 있어요. 씩씩한 척하는 게 제 맘이 더 안 좋지만.”
그렇구나. 작게 읊조리는 지겸의 표정이 어두웠다.
그녀의 눈이 그제야 지겸을 향했다. 두 사람의 눈동자가 잠시 서로를 마주했다. 유정의 일은 소희가 지겸을 밀어내게 했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였다. 지겸도 이젠 그걸 안다. 그리고 소희도 안다. 오해였었다는 걸.
“혹시, 전에도 알고 있었어요…?”
“유정 씨 일?”
소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그럼 지훈 오빠가 그….”
소희가 차마 제 입으로 뒤를 더 얘기할 수 없어서 망설이고 있으니 지겸이 대신 답했다.
“내 이름으로 다른 여자들 만나고 다니는 거, 응. 그건 알고 있었어.”
유정 씨까지 건드렸을 줄은 몰랐지만. 그의 말에 놀란 소희가 몸을 일으켰다.
“그걸 다 알면서 왜 가만히 있었어요? 그것 때문에 당신에 대해 얼마나 질 나쁜 소문들이 퍼져 있는데.”
이 남자는 원래 저렇게 무감한 건가? 아니면 생각보다 멍청한 걸까? 자신의 명예가 달린 일도 아니었지만 소희는 어쩐지 화가 났다. 그 모든 걸 알면서도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는 게 이해할 수 없었다.
“기자쟁선(棄子爭先). 사소한 손해는 감수해야 했어. 그래야 내가 선수를 칠 테니까.”
돌 몇 점을 버리더라도 선수로 다른 큰 곳을 차지해 이득을 취해야 한다는 뜻이었던가. 소희는 어릴 때 아버지 권유로 바둑을 배웠을 때 들었던 바둑용어를 떠올렸다. 그럼 지겸이 그의 평판을 진창에 구르게 하면서까지 얻어야 했던 큰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이번에 물어본다면 그는 솔직히 답해 주려나.
“하지만 후회해. 미리 바로잡았다면, 네가 적어도 그런 오해는 하지 않았을 텐데….”
생각이 짧았던 거지. 자조적인 말을 내뱉는 그의 목소리가 사뭇 떨렸다. 하지만 소희는 알았다. 쌓여버린 오해는 결코 그의 잘못만은 아니었다.
“나야말로, 용기가 안 났어요. 유정이 일을 물어보고, 사실이 맞냐고 따져 물어야 했는데 못 했어. 그냥 넘겨짚어 버렸죠. 당신을 완벽하게 나쁜 사람으로 만들고 싶었으니까.”
그래야 그에게 몸뿐인지, 혹은 마음까지였는지 지금도 알 수 없지만… 그렇게 쉽게 넘어가 버렸던 자신을 덜 증오하고 그나마 남은 자존심을 방어할 수 있었으니까. 지겸을 잔인한 거짓말쟁이에 문란하고 가벼운 남자로 몰아가고 싶었다. 작정하고 다가와 그녀의 눈과 귀를 가리고 속였으니까, 자신도 속을 수밖에 없었던 거라고. 하지만 과연 그럴까.
이렇게라면 소희는 내내 궁금했던 걸 물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번엔 피하지 말자.
“날 아직도 사랑해요?”
그가 답 없이 소희를 응시했다.
사실 물을 필요도 없다는 걸 그녀 자신도 안다. 저 남자의 눈동자만 봐도 느낄 수 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저런 눈빛을 뜻하는 거겠지. 이 세상에서 오직 그녀 한 사람만이 의미 있다는 듯한 표정. 다른 건 아무것도 개의치 않겠다는 결심. 혹여 그 마음이 그를 가장 괴롭히고 아프게 할지라도.
“응.”
예외 없이 돌아온 분명한 대답. 생각해 보면 그는 한 번도 제 마음을 내보이는 걸 망설이지 않았다.
후우. 소희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겨우 그 소리에 지겸의 심장이 철렁 가라앉는다.
“당신이 말하는 그, 사랑한다는 건 어떤 감정이에요?”
소희는 내내 궁금했다.
“늘 말했죠. 사랑한다고. 하지만 잘 모르겠어요. 당신이 그 고백이… 와닿지 않아요.”
지겸의 눈동자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그도 안다. 소희가 그렇게 느끼는 건 당연하다. 자신은 그녀에게 구지훈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더 나쁜 놈이다. 아무리 깊은 진심을 품었다 한들, 거짓을 뒤집어쓰고 만났으니까.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의 고백은 아무리 절실해도 덧없는 장난처럼 들릴 뿐이겠지.
“그럴 수밖에 없을 거야. 나를 믿지 못할 테니.”
“음… 아니라고는 말 못 해요.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에요. 조금 달라. 당신이 말하는 그 사랑이라는 게, 그 감정 자체가 뭔지 잘 모르겠어.”
그녀는 무엇이 궁금한 걸까. 지겸은 소희의 이어지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당신이 정말 날 사랑하는 걸까요? 다른 감정을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건 아닐까? 내가 모르는 어떤 문제가 베논 제약에 있다는 건… 알겠어요. 거기 우리 아버지까지 연관돼 있다는 것도.”
본가에서 식사했던 날, 아버지는 집에 돌아가려던 소희를 붙잡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지겸에게 따로 들은 얘기는 없냐고. 평소와 달리 어딘가 초조해 보이는 모습에서 소희도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이후 그녀가 아는 게 없다고 답하자 아버지는 눈에 띄게 안심했다.
“무엇보다 어린 시절부터 구 회장님이 당신에게 얼마나 혹독했는지 이제는 알아요. 개에 물린 아이는 당신이었는데 그런 아들을 혼자 병실에 버려둘 정도로. 혹시 그런 결핍된 관계에서 오는 허무함이나 아픔을 나와의 관계에서 보상받고 싶은 건 아닐까요?”
“그런 생각을 했어…?”
지겸의 얼굴에서는 어떠한 감정도 읽히지 않았다. 도리어 소희야말로 쫓기는 사람처럼 덧붙였다.
“그것도 아니면… 난 오랫동안 당신 형의 약혼녀였으니까. 사람은 그렇잖아요.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하면 더 갖고 싶고, 계속 생각나고 그러다가 없으면 죽을 것 같고.”
“맞아.”
“네, 네?”
조용하던 그가 이 대목에서 순순히 긍정하니 오히려 소희는 당황해 버렸다.
“없으면 죽을 것 같아. 다른 건 다 틀렸지만.”
“아….”
“글쎄. 너에 대한 내 감정을 수백, 수천 가지의 예시로 설명할 수는 있겠지. 네 어디가 좋냐는 질문에도. 하지만 그런다고 해도 네가 설득되지는 않을 거야.”
“왜요?”
그녀는 진심으로 궁금했다. 알고 싶었다. 지겸이 가진 마음을 파악하면 그를 향한 자신의 이 혼란스러운 감정의 정체도 정리될 것만 같았다.
“감정은 머리로 알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꺼내서 보이지도 못하는 걸 다른 사람에게 가르쳐줄 수는 더욱 없겠지.
그의 답에 소희는 누군가에게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쿵 맞는 기분이 들었다. 지겸은 소희의 질문에 명쾌한 해답을 주진 못했다. 다만 스스로 깨닫게 했다. 어쩌면 그녀의 질문 자체가 잘못됐을지도 모른다고.
“만져지지도 않고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들을 수도 없잖아. 심지어 알파와 오메가들은 제 감정을 페로몬이 판단하도록 두지.”
나도 뭐, 그런 한 마리 짐승에 불과하고. 지겸의 그 말은 조금 자조적이기까지 했다.
“난 오히려 내가 오메가라서 좋았는데…. 페로몬 때문이든 본능의 작용이든 뭔가 확실하게 손에 잡힐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그 마음이.”
소희를 향해 지겸이 낮게 웃었다. 그런 생각을 해 온 그녀가 순진하다는 듯.
“그런 건 없어. 누구보다 확신하지만 동시에 늘 자책해. 이건 사랑일까, 아니면 사랑을 가장한 집착일까. 널 정말 좋아하는 걸까, 아니면 단순히 갖고 싶은 걸까. 하지만 분명한 건….”
지겸의 눈이 똑바로 소희를 향했다.
“난 너만을 생각해. 내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고민과 결정의 근거는 너야. 그 감정의 이유도, 해결책도 몰라.”
그녀의 몸을 감싸 안는 듯한 따스한 목소리. 또다시 절절한 사랑 고백을 듣게 됐기 때문일까. 소희는 순간 나지막하게 말소리를 내뱉는 그의 입술에 닿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자신도 모르는 새 손이 뻗어졌다. 그녀의 손끝이 그의 아랫입술을 스쳤다.
움찔, 놀란 지겸이 그녀의 손을 조심스레 잡았다. 남자의 뜨거운 체온이 소희를 감쌌다. 그가 소희의 손바닥을 펴 아주 천천히, 살살 제 입술을 눌렀다. 입술을 통해 그의 떨림이 그대로 전해졌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뭔지 궁금하다고 했지만… 솔직히 나도 잘 몰라, 소희야.
그냥 너라는 사람 자체가, 임소희라는 이름이 내게는 사랑의 다른 말일 뿐이라서.
그의 마지막 고백은 공기가 아닌 그녀의 손안에서 흩어졌다. 손바닥이 간지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