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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겸은 정작 소희를 앞에 두고도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소희도 굳이 먼저 말을 걸지 않았다. 그렇게 숨 막힐 듯한 정적이 몇 분 더 흘렀다.
발이 원래 저렇게 작았던가. 지겸이 제 슬리퍼를 대신 신은 소희의 발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맨살이 드러난 흰 발목이 너무 추워 보였다. 지겸은 순간 무릎을 꿇어 그녀의 발목을 보드라운 무언가로 따뜻하게 감싸주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다. 역시, 정상은 아니야. 지겸이 자조감 섞인 한숨을 낮게 뱉어냈다.
“꿈이… 아니었구나.”
아까 그녀와 벌였던 논쟁은 실제였던 거다.
“응. 아니었어요.”
그제야 지겸이 눈을 들었다. 소희의 눈동자가 주춤하지 않고 똑바로 부딪쳐 온다. 지겸은 그녀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잘 알았다.
“난 괜찮아 소희야. 그러니까 정말 신경 쓰지 않아도….”
“누굴 살인자로 만들 작정이에요?”
소희가 단순한 원망도 걱정도 아닌, 그 모두가 조금씩 섞인 복잡한 감정을 그대로 드러냈다.
“사람이 얼마나 더 이기적으로 굴 거예요? 대체 무슨 생각으로 혼자 각인을!”
아까도 더 따지고 싶었지만 지겸이 약에 취해 꿈으로 착각하고 있는지라 계속하지 못했다. 그의 얼굴을 보고 제대로 한마디 하고 싶었다. 소희의 목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죽을 수도 있다잖아. 왜 이렇게 고집을 피워요? 뭐가 괜찮다는 거야, 당신한텐 그렇게 다 쉬워요?”
소희로서도 누군가에게 이렇게 폭발적으로 감정을 드러낸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지겸의 앞이라 가능했다. 저 사람은 이 모든 일에 책임이 있으니까. 그녀가 아무리 화를 내도 그는 받아 줘야만 하는 사람이니까. 지겸은… 소희의 삶을 뒤흔들어 버린 죄인이니까.
“…쉽지 않아. 소희야.”
지겸의 눈동자가 묘하게 흔들렸다.
“쉽지 않아서, 이러는 거야.”
소희가 연갈색 눈동자가 그런 그와 다시 눈을 맞췄다.
그녀의 저 눈. 이제 지겸에겐 그게 전부다.
사람은 보통 삶의 이유 하나쯤은 가지고 살아간다. 힘든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게 하는 힘. 넘어졌다가도 다시 일어서게 만드는 원동력. 삶의 목적 같은 것. 억지로 만들어서라도 그런 거창한 의미를 하나쯤 붙들고 싶은 건 누구나 하루하루를 이겨내는 게 힘에 부치기 때문이겠지.
어릴 땐 그저 어머니의 웃는 얼굴이 보고 싶었다. 공부도, 운동도 그래서 최선을 다했다. 학교에서 돌아온 지겸이 종알대는 친구들 이야기에 어머니가 행복해하면 그는 다음날 애들에게 더 잘했다. 늘 미소만 지어주셨던 어머니인데도 그는 어머니의 불행을 본능적으로 감지했던 것 같다. 그래서 매일매일 더 안간힘을 썼다. 결국 자신으로는 턱없이 부족했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지겸은 그마저 있던 삶의 이유도 빼앗겼다. 어차피 아버지도, 그 누구도 자신에게서 뭔가를 기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스스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고 나니 오히려 쉬웠다. 그저 아버지가 하라는 대로 살았다. 삶 자체에 대한 강한 열망이 없으니 어떻게 되든 관심도 없었다. 어느 날 갑자기 죽어도 아무렇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지겸에게 소희는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다. 그림자 가득했던 마음에 내밀어진 작은 초. 불조차 붙이지 않았던 그 분홍 초가 그에게는 한 줄기 빛이 되었다. 한순간 큰불을 밝히기보다는 그저 그의 삶에 스며들 듯이 천천히 타올랐다. 시간이 흘러 커져 버린 제 맘을 깨달았을 때 이미 소희는 그에게 특별한 의미 이상의 무언가, 삶의 목적 그 자체가 되어 있었다.
그녀의 흔적을, 이 각인조차 지우고 나면 자신은 또다시 삶의 이유를 잃게 될 것을 안다, 누구도 목적 없는 삶을 제대로 이어 나갈 수는 없다. 죽는 게 쉬운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다만 죽음 같은 삶을 유지하느니 의미 있게 죽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할 뿐이다.
“의사 선생님 말씀대로 각인, 지워요.”
소희는 어느 때보다 단호했다. 본 적 없었던 단단한 표정에 지겸의 마음 한편이 시리다. 어쩌면 그녀의 안에서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눈동자를 천천히 바라봤다. 그 안에 자신의 모습이 비친다. 그조차 죄를 짓는 기분이라 지겸은 고개를 숙였다.
그래, 그녀의 말이 맞다. 사실 이 모든 건 제 이기심에 불과하다. 자신이야 어찌 되어도 상관없다. 하지만 이제 소희가 각인에 대해 알게 됐으니 그에게 문제가 생기면 조금이라도 죄책감을 갖게 될 것이다. 그녀에게 그런 짐조차 지울 수는 없다.
지겸이 고개를 들었다. 소희를 마주하면 모든 게 어려워진다. 특히 가늘게 몸을 떨며 서 있는 저 여자를 당장이라도 품에 안고 싶은 본능을 거스르는 게 가장.
“약속해요. 당장.”
“만약 내가 여전히….”
순간 소희가 뭔가를 결심했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옆에 있어 줄게요.”
“…뭐?”
“지금 당신 몸 상태가 엉망이라고 들었어요. 내가, 음. 당신 옆에 있으면 빨리 회복할 수 있다는 것도. 의사 선생님이 부탁하셨을 때는 단칼에 거절했었는데. 내가 도와줄게.”
아무리 미운 사람이라도 죽기를 바라는 건 아니니까.
소희는 그렇게 스스로에게 변명을 해 보았다. 지겸에게 마음이 있는 건 아니다. 정말로 아니야.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을 거다.
의사 선생님께 지겸의 상황에 대해 들었을 때 처음엔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쓰러질 정도로 몸을 혹사하면서까지 자신과의 각인을 유지하고 있을 줄 상상도 못 했었다. 그뿐인가. 계속 이런 식으로 두면 생명이 위험해질 수도 있다니. 그걸 뻔히 알면서도 끝까지 고집을 피우는 지겸을 소희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자꾸만 궁금해진다. 이렇게까지 행동하는 이유가. 이 남자가 말하는 그 사랑이란 감정이.
지겸이 조금 멍해진 표정으로 소희를 찬찬히 살폈다. 마른세수를 반복하더니 깊은 한숨을 내쉰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어. 네가 힘들어하는 일을 억지로 시키기 싫어. 다른 방법이 있을 거야.”
“와… 고집은 또 어찌나 센지. 나도 쉽게 내린 결정 아니에요. 두 번 말하게 하지 말래요?”
소희가 이렇게 단호하게 말할 줄 아는 사람이었던가? 그녀의 낯선 모습에 지겸이 조금 움찔했지만 싫지는 않았다.
“어서 약속해요. 몸 회복될 때까지 옆에 있어 줄 테니, 혼자 있는 게 가능해지면 바로 제거술 받겠다고.”
지겸에게 이만큼 달콤한 유혹이 또 있을까. 그래도 안 된다고 말하려다가, 그가 제 입을 다물었다. 솔직히 끝까지 안 된다고 할 자신이 없었다. 눈앞의 소희를 보고, 목소리를 듣고, 한 공간에 다시 함께할 기회인데. 물론 제 몸이 회복되면 각인도, 그녀도 영영 제게서 사라지겠지만….
“고민…해 볼게.”
후. 이제야 안심이라는 듯 소희가 표정을 풀었다.
“그리고, 장난해요? 환자가 왜 거기 그러고 있어요.”
“아.”
소희가 소파에 어정쩡하게 앉아 있는 지겸을 위아래로 훑었다. 잠든 소희를 침대에 눕혀줬다고 저러는 모양이다.
“어서 다시 누워요.”
소희가 팔짱을 끼고 서서 말했다.
“많이 자서 괜찮아. 이젠 별로….”
“빨리 회복해야 수술도 받죠. 안 그래요?”
지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는 소희는 전혀 물러설 기색이 없어 보였다. 지겸은 어쩔 수 없이 그녀의 말에 따라 침대로 가 누웠다.
“눈.”
따라온 소희가 옆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뭐?”
“눈 감아요. 더 자야지. 아직 이른 아침이에요.”
“음, 소희야.”
소희가 지켜보는 옆에서 잠을 청하는 것도 어색하지만 진통제에 취해 하루를 내리 잔 터라 정말 졸리지도 않았다. 지겸이 난색을 보이며 소희를 쳐다봤다.
“왜, 설마 자장가라도 불러줘요?”
이 상황에서 소희가 자장가까지 부른다면…. 지겸의 귀 끝이 조금 붉어졌다. 그런 상황을 만들 수는 없지.
“그래, 더 잘게.”
어쩔 수 없이 지겸은 눈을 감았다. 시야가 차단되고 나니 옆에 앉은 소희의 숨소리나 작은 움직임이 더욱 신경 쓰였다. 게다가 아찔할 정도로 달큼한 그녀의 페로몬에 온몸이 이유 없이 저릿하다. 다시금 심장이 묵직해져 오는 건, 각인으로 인한 통증 때문일까 아니면 그녀를 향하는 제 마음 탓일까.
그 안온하고 따스한 감각을 느끼며 지겸은 자기도 모르는 새 다시 잠이 들었다. 그가 가장 끔찍해하는 병원 침대에서. 단지 소희가 곁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
하나도 졸리지 않는다더니 지겸은 곧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들었다. 확실히 핼쑥해진 그의 뺨이 예전보다도 더 날카로워 보였다.
과연 잘한 결정이 맞을까. 소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래 생각해서 내뱉은 말은 아니었다. 어쩌면 다분히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의사 선생님의 말을 들었을 때 처음엔 당황했고, 지겸에게도 너무 화가 났다. 각인 때문에 자신의 몸을 이렇게까지 혹사하다니 그녀의 상식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행동이었다.
살아갈 의지가 엿보이지 않는 남자의 새까만 눈동자를 마주 보고 있자니 숨이 턱턱 막혔다. 답답하고 복잡한 생각을 정리했을 때 순간 소희의 머릿속에 그런 결심이 떠올랐다. 잠시 곁에 있는 것 정도야 해 줄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만 하면 이 사람이 이렇게 아프고 고생할 필요가 없다는데. 사람 목숨 한 번 살리는 셈 치고, 딱 눈감고 며칠만.
저 자신이 그의 곁에 더 머무르고 싶은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은 의식적으로 멀리했다. 여전히 혼란스럽기도 하고 걱정스러운 마음도 들었지만, 이미 한 결정인 이상 번복하거나 미리 후회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 잘한 거다. 괜찮을 거야.
소희도 모르게 또 한숨이 새어 나왔다.
“왜 그렇게 자꾸, 한숨을 쉬어.”
어. 언제 깨어 있었던 건지 지겸의 눈이 소희를 향해 있었다.
“아, 그게….”
남자가 몸을 일으켜 세웠다.
“소희야. 네 말대로 할게.”
그녀를 향한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빨리 회복해서 수술받을게. 고집 그만 피우고.”
얼굴은 웃고 있는데 눈동자는 외로워 보여서, 어쩐지 그 모습이 더욱 쓸쓸하게 느껴졌다.
“잘 생각했어요.”
다부진 소희의 대답에 지겸이 피식, 조금 소리 내어 웃었다.
“못 본 사이 조금… 달라진 것 같네.”
“칭찬인가요?”
“아마도…?”
소희와 마주한 지겸의 눈에 다시 이채가 감돌았다. 두근. 오랜만이었다. 싱가포르에서 내내 느끼곤 했던 남자의 저 눈빛.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갖가지 애정의 빛깔을 다 끌어모아 담아둔 것만 같은 무수한 반짝임.
정말 잘한 결정이 맞는 걸까, 이 남자 옆에 조금이라도 더 머물기로 한 것.
어쩌면 다시 후회하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묘한 예감이 들었지만, 소희는 애써 외면했다. 그리고 지겸을 향해 정말 오랜만에 살짝, 아주 조금 웃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