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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소희구나.
의식이 채 깨어나기도 전에 온몸의 감각이 먼저 그녀의 존재를 눈치챈다. 보드라운 숨소리, 특유의 다디단 꽃향기. 혹시 자신이 틀린 건 아닐까, 이대로 평생 눈을 뜨지 않을 수 있다면 좋겠다. 그저 소희가 옆에 있겠구나 기대하면서, 그녀가 더 이상 제 곁에 없다는 현실을 회피하면서. 지겸은 겁이 나서 천천히 눈을 떴다.
누운 그의 옆에 거짓말처럼 소희가 있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지. 그녀가 입술을 말아 꽉 깨물고 있다. 저러다 입술이라도 터지면 어쩌려고. 지겸이 손을 뻗어 그녀의 아랫입술을 쓰다듬었다.
탁. 소희가 그의 팔을 쳐냈다.
무척 화가 난 것 같다. 저런 표정은 처음 보네. 지겸은 생각했다. 꿈에서 깬 줄 알았는데 아마 여전히 꿈속인가 보다. 현실에서 임소희, 그녀가 제 곁에 이렇게 앉아 있을 리 없으니까.
“당신이 미친 사람인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인 줄은 몰랐어요.”
소희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힘을 들어가 있다. 그를 노려보는 눈꼬리가 살짝 떨린다. 그조차도 이렇게 예뻐 보이는 걸 보면. 정말 자신은….
“응, 미쳤다고 했었잖아. 평생 미친놈의 오메가가 될 뻔한 걸 풀어줬더니, 왜 자꾸… 꿈에….”
나타나. 그런데도 제 꿈에 오지 말라는 말은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질 않는다.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 거의 매일 밤 소희는 지겸의 꿈에 찾아온다. 어떤 날은 오늘처럼 증오의 말을 쏟아내고, 어느 날은 다정하다.
그렇게 아침에 눈을 뜨면 지겸은 한동안 멍하니 있게 된다. 꿈속에서 마구 휘몰아치던 감정은 모두 휩쓸려 내려간 뒤에도 여전히 그의 가슴에 남아 상처를 후벼판다. 그녀가 나오는 꿈은 결국 어떤 식으로든 상실감을 남긴다. 오기를 부려 억지로 그녀의 각인을 품고 있는데도, 이미 심장 한구석은 크게 도려내진 상태인 것 같다.
“각인, 왜 안 풀었어요?”
아, 오늘은 그것 때문에 화가 났구나. 지겸이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나한테 남은 유일한 네 흔적이니까. 그걸 내가 어떻게.”
하. 지겸의 답에 소희가 깊은 한숨을 내쉰다. 어이가 없겠지. 그녀의 저런 반응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그런 자신이 섬뜩하지나 않으면 다행이겠지.
“이 정도면 사람이 미련한 게 아니라 역시….”
꿈이라 그런가. 소희가 무슨 말을 하려다 말았는지 다 알 것 같은 지겸이 낮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대신 답한다.
“미친 게 맞겠지.”
“와….”
화가 난 소희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진다.
“죽을 수도 있었대요. 당장 심장마비가 와도 이상하지 않을 수준이래.”
“그랬겠지.”
최근 일주일은 정말 통증의 수준이 그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제 몸이 버티는 한계가 오고 있음을 그 자신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럼 왜 안 돼.”
소희의 눈이 동그랗게 커진다. 경악과 놀라움에 질린 얼굴이 지겸을 내려 본다.
“뭐, 뭐라고요? 설마 이러려고 나한테 그런 거예요? 이러다 콱 죽어서 나한테 죄책감 안겨주려고?”
지겸이 손을 뻗어 화를 내며 부들부들 떠는 소희의 손을 덜컥 잡았다.
“목소리 들으니까… 좋다.”
그냥 제게 무슨 말이라도 걸어 주는 그녀가 좋았다. 자기 일에 일말의 감정이라도 실어주는 소희가 벅찼다. 화를 내더라도, 긍정적인 종류의 감정이 아니어도 그녀의 화가 제게 향한다는 게 기뻤다. 이렇게, 꿈에서라도.
“더 화내 줘. 아예 때리던가….”
“진짜… 변태! 미친…!”
응, 미친놈.
남자의 낮은 웃음이 대답에 나른하게 섞여 들었다. 혼자 중얼거리다 다시 스르륵 눈을 감는 지겸을 보고 소희가 더 욕하려던 입을 다물었다. 강한 진통제 때문인가. 눈앞의 이 남자는 모든 게 꿈속인 줄만 아는 모양이었다. 그런 사람 앞에서 괜히 더 화내 봤자 아무 소용 없겠지.
후. 어제는 내내 그렇게 말 한마디 안 걸더니.
잠시 후 그의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바뀌었다. 다시 잠든 것 같았다. 잠든 남자를 물끄러미 보고 있자니, 그의 입가에 미소가 잠시 어렸다 사라진다. 꿈이라도 꾸는 건가. 소희의 손을 잡은 그의 손에 힘이 더 들어갔다.
시간이 조금 흐르고, 소희가 손을 빼내려고 했으나 지겸이 얼마나 꽉 쥐고 있는지 잘 빠지지 않았다. 어쩔 수 없지. 그녀가 일어나려다 말고 다시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전부터 느꼈지만, 덩치가 산만 한 남자가 자고 있을 때는 꼭 소년같이 말간 얼굴로 되돌아간다. 눈썹이 참 짙고 촘촘하다. 항상 일자로 긴장된 눈썹이 자고 있을 때는 어쩐지 부드럽게 풀려 있네. 속눈썹이 생각보다 길었구나.
소희는 지겸의 잠든 모습을 자기도 모르게 오랫동안 옆에서 지켜봤다.
***
깜빡깜빡. 머리 위를 커다란 바위가 짓누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무겁고 어지러워. 눈을 뜨니 보이는 흰 천장, 왼팔에 놓인 링거. 병원이구나.
그제야 지겸은 자신이 소희를 데려다주고 오다가 쓰러졌던 걸 기억해 냈다. 병신같이. 주차장에서. 혹시나 그녀가 보면 어떻게 했으려고.
“윽….”
입술 새로 새어 나오는 신음을 최대한 참아내며 지겸이 몸을 일으켰다.
순간 그의 동작이, 아니 숨조차 멎었다.
침대 한편에 엎드린 채 소희가 잠들어 있었다. 그럼 그 대화는 꿈이 아니었던 걸까. 자신이 쓰러졌던 건 심장의 통증 때문이었을 테고, 소희가 여기에 있다는 건 그녀가 모든 걸 알았단 소리다. 후… 최악인데. 들키지 말았어야 했다. 그는 답답함에 제 머리칼을 헤집었다.
그러다 지겸이 꿈결처럼 잠든 소희를 지그시 바라봤다. 혹시나 깰까 봐 제 숨소리조차 죽이면서. 그녀가 고르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쉴 때마다 여린 어깨가 살짝 들썩였다. 뺨으로 흘러내린 색이 옅은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귀 뒤로 넘겨줬다.
그는 정말로 이 여자의 잠든 모습이 좋았다. 어딘지 모르게 천진하게 처진 눈과 입매, 고양이처럼 갸릉대는 숨소리. 제 옆에 잠든 그 순간만은, 온전히 편안해 보이는 그 얼굴이. 어딘가 그에게 의지해 오는 듯한 안온감이 지겸에게 빠듯한 충족감을 일으켰다. 그는 할 수만 있다면 아마 온종일이라도 소희의 잠든 모습을 보고 있을 수 있을 터였다.
그래도 역시 깨워버리고 싶기도 하다. 아무 표정을 짓지 않아도 입꼬리가 올라간 입술 덕에, 소희는 늘 웃는 인상이었다. 그러다 눈가를 부드럽게 접으며 환하게 웃어 줄 때면, 자신을 둘러싼 무채색의 세상이 색을 되찾는 기분이 든다. 수증기에 꺾이고 반사된 빛이 무지개를 만들어 내듯이. 그러나 다시는 소희의 그 웃음이 자신을 향하는 일은 없겠지.
그렇게 한참을 바라보던 지겸이 조심스럽게 소희를 안아 제 침대로 옮겨 눕혔다. 이불까지 꼼꼼히 덮어준 뒤, 자신은 링거를 가지고 옆 소파 쪽으로 옮겨 대충 기대어 앉았다.
드르륵. 그때 회진을 돌던 의사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일전에 지겸과 소희의 각인 제거를 담당했던 의사였다.
“어, 구지겸 환자분? 깨어나셨네요.”
“…네.”
의사는 환자복을 입고 소파에 불편하게 걸터앉은 그를 위아래로 훑으며 눈을 찌푸리더니, 침대에 누운 소희를 보고서야 표정을 풀었다. 이제는 말하지 않아도 다 알겠다는 듯. 의사로서 뭔가 더 잔소리하려다가 참는 모양새였다.
“좀 어떠십니까.”
“멀쩡…합니다.”
지겸이 링거를 맞고 있는 팔을 살짝 드는 시늉을 했다. 의사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말을 덧붙였다.
“단순히 처방받은 약 때문만이 아닙니다.”
지겸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의사의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지금은 임소희 씨가 옆에 있어서 안정적인 겁니다.”
“아.”
그러고 보면, 한강 둔치에서 소희를 마주쳤던 날도, 주차장에서 마주쳤던 날도. 소희와 함께 있었던 순간엔 심장의 통증을 느끼지 못했었다.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그녀가 제 각인의 주인이니까.
“각인이 남아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증상이라, 각인한 상대와 있을 때는 자연스럽게 완화되는 겁니다.”
“설마 그런 얘기까지.”
소희에게 하셨습니까. 끝마치지 못한 지겸의 질문을 알아들은 의사가 답을 했다.
“네. 전부 다 말씀드리지는 않았지만 대충 다. 의사인 저한테는 환자의 건강이 최우선이니까요. 솔직히 그렇게 엉망인 몸으로 이제야 병원에 실려 왔다는 게 전 더 신기할 지경입니다.”
여전히 그녀가 알게 된 것이 지겸은 곤란했다. 모질지 못한 성격에 신경 쓰고 힘들어할 텐데. 그게 아무리 자신을 향한 걱정이라도, 지겸은 소희가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받게 하고 싶지 않았다.
“환자분, 냉정하게 말씀드리면 이대로는 안 됩니다. 자살행위예요. 언제 심장이 멎어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의사가 마주한 지겸의 까만 눈동자는 여전히 무감했다. 몇 주 전, 각인 제거술을 받지 않겠다고 했을 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무조건 각인 제거술 받으셔야 합니다. 이제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에요.”
표정 변화 없이 담담한 제 환자 앞에서 의사는 더 조바심이 났다. 마치 텅 빈 사막의 밤하늘 같은 눈빛을 보며 의사는 직업적인 위기감까지 느꼈다.
병원에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절실한 눈동자를 하고 있다. 살려 달라는 눈빛. 어떻게든 자신을 잠식하는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은 간절한 욕망. 하지만 이 남자는 오히려 반대다. 삶에 대한 의지나 큰 미련이 보이지 않는 눈동자는 소름이 돋을 정도다.
지겸은 대답이 없었다. 그저 무언가를 가늠하듯 가늘어진 눈매로 의사의 얘기에 집중했다.
“다만 지금 당장은 수술을 받을 수도 없습니다. 심장에 너무 무리가 간 상태라. 몸이 회복되는 게 먼저입니다. 최소 3일, 길게는 일주일 정도 생각하셔야 합니다.”
“그럼….”
“네, 지금은 임소희 씨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녀의 이름이 나오자 그제야 심상하던 지겸의 눈동자에 반응이 생겼다. 잔잔한 수면에 돌을 던졌을 때처럼 작은 파동이 일어나 마구 일렁이는 게 보였다.
“아니요. 진통제로 버텨 보겠습니다.”
소희에게 그의 곁에 있어 달라고 부탁할 수는 없었다. 자신이 어떤 마음으로 그녀를 놓았는데. 그녀에게 억지로 부담을 씌우고 이런 식으로 구차하게 잡아둘 수는… 도저히….
“구지겸 환자분, 절대 안 됩니다. 진통제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혹시라도 지금 이 상태로 두 분이 다시 떨어져 있게 되면….”
의사가 끔찍한 상황이라도 예상된다는 듯 고개를 재차 흔들었다.
“제가 임소희 씨께는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선생님, 아무리 그…!”
지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때였다.
“선생님.”
소희였다. 언제 잠에서 깼는지, 침대에서 걸어 나온 그녀가 두 사람의 곁으로 다가왔다.
“제가, 얘기해 볼게요.”
당황한 의사가 조금 주춤하며 물러났다. 그리고 지겸과 소희를 번갈아 쳐다봤다.
“아, 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의사가 서둘러 병실 밖으로 나갔다.
소파에 앉아 있는 지겸의 앞에 소희가 마주 보고 섰다.
어두운 새벽녘의 건조하고도 차가운 공기가 두 사람 사이를 메웠다. 어딘가 모르게 그리움이 묻어나는 적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