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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밤이 깊었다. 두 사람의 머리 위로는 상현달이 떴다. 곧 보름달이 되려는 듯 반달보다 좀 더 동그랗게 차오른 달이 꽤 밝았다. 지겸은 소희보다 반 발자국 뒤에서 걸었다. 그 미묘한 거리감 사이로 서늘한 바람이 불어 들었다.
“혹시 어지럽거나, 숨쉬기 힘들거나 그런 건 아니지?”
그놈들이 자리를 뜨자마자 지겸은 소희를 샅샅이 살폈다. 혹시 조금이라도 다친 곳은 없는지 걱정하는 그의 얼굴이 너무 심각하고 절실해 보여서, 소희는 아파도 아프다고 얘기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다행히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지겸은 그녀가 괜찮다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깊은 한숨을 뱉어냈다.
지겸은 양 주머니에 손을 넣고 천천히 따라왔다.
그녀의 상태를 확인한 후부터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 그가 어색했다. 살짝살짝 시선을 돌려 훔쳐보던 소희가 마침내 먼저 입을 열었다.
“담배 피우는 줄 몰랐어요.”
“아, 미안. 원래 끊었었는데…. 냄새 괴롭지.”
소희의 아파트 앞에서 기다리며 피워댄 담배 냄새가 아직 제 몸에 배어 있을 터였다. 지겸이 의식적으로 소희에게서 좀 더 비켜서 걸었다. 두 사람의 사이가 조금 더 멀어졌다.
“그런 뜻은 아니었는데. 안 그래도 되는….”
소희가 작게 내뱉던 말끝을 흐렸다.
“응? 뭐라고…?”
“아니, 아니에요.”
“그래.”
지겸은 더 묻지 않았다. 소희도 자꾸 흘끔대던 시선을 거둬 앞만 보며 걸었다. 소희의 발걸음 뒤로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은 채 조용히 따라오는 남자의 발소리만 어두운 골목길에 울렸다. 아니 하나 더. 그 발소리보다도 크게 뛰는 것만 같은 소희 자신의 심장 소리.
따릉. 그때 뒤에서 자전거 벨 소리가 울리는가 싶더니, 지겸의 긴 팔이 불쑥 뻗어와 소희를 끌어당겼다. 좁은 길 한편으로 두 사람이 밀려나며 그의 가슴팍으로 소희의 몸이 살짝 기대어졌다.
“조심.”
아, 그와 스친 곳에서 열이 작게 피어오른다. 이유 없이 척추 부근이 간질거렸다. 기억보다 짙어진 그의 페로몬이 소희를 감쌌다.
지겸은 곧 그녀를 놓아줬다. 그녀를 한순간도 제 품에서 놓지 않았던 때와 비교하면 지나치게 멀끔한 태도. 당연한데도 불구하고 소희의 마음 한편이 허전했다.
집까지는 금방이었다. 입구 앞에 서서 소희는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맞췄다. 지겸이 고개를 살짝 숙여 시선을 피했다. 일부러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이 못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소희야.”
그저 이름이 불린 것뿐인데도 온몸에 힘이 빠진 듯 휘청댈 것만 같다. 빠르게 뛰고 있는 이 심장 소리를 설마 들키지는 않겠지. 그 무엇도 내색하지 않으려고 소희가 얼른 답했다.
“네?”
“당분간 김 실장 붙여줄게. 외출할 때 꼭 동행해. 알겠지?”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하려다가, 소희는 입을 다물었다. 도저히 필요 없다는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남자의 표정이 심각했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어서 들어가.”
“아….”
지겸이 고개를 살짝 끄덕인다. 마치 괜찮을 거라고, 아무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은 것처럼. 조금 놀랐던 가슴은 이미 그와 함께 걸어오는 이 짧은 시간 동안 진정이 됐다.
사실 소희도 그에게 묻고 싶은 게 있었다. 잘 지내고 있는지. 아픈 곳은 없는지. 무엇보다… 어떻게 그곳에 나타난 건지. 소희는 오늘의 일이 우연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동안 지겸은 얼마나 자주 자신의 동네에 들렀던 걸까. 가끔 집 근처에서 스치듯 지겸의 페로몬과 비슷했던 향을 느꼈던 걸 떠올려 봤다. 그때마다 제 눈이 닿지 않는 곳에서 그는 자신을 보고 있었을까.
“오늘, 고마워요…. 들어갈게요.”
소희가 입구를 지나 엘리베이터를 탈 때까지. 지겸은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 직전, 뒤를 돈 소희가 그에게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겸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투명한 입구의 문 너머, 그녀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후우. 지겸이 오래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주머니에 깊게 박아 두었던 손을 그제야 꺼냈다. 자기도 모르게 자꾸 소희에게로 뻗어지려는 손 때문에 내내 주머니에 넣고 걸을 수밖에 없었다. 소희가 보이지 않게 되자마자 그의 손이 가늘게 떨린다. 그녀 옆에서만은 멀쩡했던 심장의 통증이 다시 스멀스멀 그의 몸뚱어리를 타고 침입한다. 지겸이 마른세수를 몇 번 반복했다.
괜찮아.
그녀가 무사하니 그걸로 됐다.
소희가 부탁해 오늘은 어쩔 수 없이 그냥 보내 줬지만, 그놈들을 이대로 편히 둘 마음은 없다. 어디, 감히. 저런 녀석들이랑 소희가 한 학교에서 또 마주치게 둘 수는 없지. 어떤 놈들인지 제대로 알아본 후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퇴학이라도 시켜야 직성이 풀릴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며 차로 향했다. 소희가 곁에 없다고 다시 몸이 아우성친다. 심장이 뻐근하게 조여든다. 두들겨 맞은 듯한 통증이 찾아온다. 이제는 이 아픔이 없는 게 더 어색할 정도로 익숙해진 감각.
괜찮아. 그래도 소희를 봤으니까.
오랜만에 그녀의 체향으로 온몸을 절인 듯한 기분이다. 이 기분이 오래 잊히지 않을 것 같았다.
“오셨습니까.”
차 앞에 나와 지겸을 기다리고 있던 김 실장이 뒷문을 열었다. 지겸이 차에 타려고 차 문을 잡았다.
뭐지. 갑자기 밤안개라도 낀 건가. 그의 눈앞이 순식간에 흐려졌다. 그러더니 밤하늘이 빙그르 한 바퀴 돌았다.
“도련님? 도련님!”
김 실장이 애타게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지겸의 귓가에 윙윙대다 점점 멀어졌다.
***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오는 내내, 복도를 걷는 걸음마다, 현관 안에 들어와서도 지겸의 체향이 소희를 떠나지 않았다.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그는 일부러 거리를 두고 걸었다. 손을 주머니 속 깊숙이 찔러넣은 탓에 그의 손끝조차 그녀에게 닿지 않았다.
우습게도 그런 그에게 한 발자국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건… 소희 자신이었다.
어서 씻자. 그의 체향이 사라지고 나면 자꾸 떠오르는 생각과 혼란스러운 마음도 좀 진정이 되지 않을까. 후. 소희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내쉬었다. 이상하게도 그의 페로몬이 더 짙게 파고들었다.
그제야 소희는 자신이 그의 재킷을 지금껏 걸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곧 현관문을 나서 엘리베이터까지 뛰듯이 걸어갔다.
재킷을 돌려주기 위함인지, 아니면 다시 한번 그의 얼굴을 보고 싶어서인지. 소희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굳이 구분하려 하지도 않았다. 우선은 그저, 당장은 몸이 가는 대로 행동해야만 할 것 같았다.
그렇게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 소희가 발견한 것은 쓰러진 지겸과 그를 부축하고 있는 김 실장의 뒷모습이었다.
“김 실장님? 이 사람… 지겸, 구지겸 씨!”
그녀와 조금 전 헤어질 때까지만 해도 멀쩡하지 않았던가. 몇 분 사이에 어떻게 사람이 이 지경이 된 거지. 아니면 혹시 자신의 옆이라 줄곧 참고 있었던 걸까?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정신을 잃은 남자를 소희는 자기도 모르게 애타게 부르고 또 불렀다.
***
날씨는 어느덧 완연한 봄. 아직 추웠던 것 같은데 언제 저렇게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지. 주변에 은은한 벚꽃 내음이 가득하다. 아 또 그 꿈인가.
지겸은 알파로 발현한 다음 해 몰래 소희를 찾아 한국에 왔던 이 봄의 기억을, 그 후로도 자주 꿈에서 만났다.
조금만 이렇게 나무 아래 서 있으면 뒤에서 달큼한 향이 퍼지겠지. 그리고 곧 교복을 입은 소희가 지나가….
“지겸 오빠?”
아, 분명 그녀의 향이다. 지겸이 자연스럽게 뒤를 돌았다. 바람에 조금씩 흩날리는 갈색 머리칼, 봄 햇살을 머금고 반짝이는 큰 눈…. 소희가 맞다. 하지만 교복 차림이 아니다. 지금의 그녀다. 이상하네. 이 꿈속의 그녀는 늘 고등학생이었는데…. 게다가 아주 어린 시절 빼고 그녀가 그를 이렇게 지겸 오빠라고 부른 건 처음이다. 조금 당황한 지겸이 그녀를 지그시 응시했다.
“많이 기다렸어요?”
“…아, 아니.”
무엇보다 그에게 말을 건 적도 없다. 늘 친구와 까르르 웃으며 스쳐 지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게 전부였던 꿈.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소희의 입꼬리가 지겸을 향해 부드럽게 올라간다. 아무 거리낌 없는 미소. 그를 향해 곧게 뜬 시선. 다정하게 접힌 예쁜 눈꼬리에 심장이 간질거린다. 그녀가 지겸에게 저렇게 웃어준 적이 있던가.
“갈까.”
그도 모르게 뱉어진 말. 싫다고 하지 않을까. 그녀의 반응을 기다리는 겨우 몇 초가 초조하다. 순간 조금 더 가까이 다가온 소희가 그의 팔에 자연스럽게 팔짱을 꼈다. 놀란 지겸이 움찔했지만, 제 몸에 와닿는 그녀의 머리카락과 숨결이 너무 따스하고 좋아서 아무 생각도 하지 않기로 한다.
“소희야.”
꼭 하고 싶었던 말이 있다.
“…미안해.”
“응?”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소희가 고개를 갸우뚱한다. 그러다 살며시 지겸의 팔에 제 머리를 기댔다. 기분 좋은 무게감. 누군가 자신에게 기대온다는 것이 이렇게나 마음이 충만해지는 것이었나.
“다… 전부 다. 미안해.”
솔직히, 후회해.
후회하지 않을 거라고 매일매일 스스로를 다그쳐.
하지만 다시는 너를 되찾을 수 없을 걸 알아서.
이러다 어느 날 죽어버릴 걸 알아서.
후회하지 않아서, 나는 후회하고 또 후회해.
“…알아요.”
아. 심상한 소희의 답에 지겸이 입술 한쪽을 깨문다. 제 속마음이 그녀의 입을 통해 대신 들린 걸까. 하긴 꿈이니까.
자신이 그녀에게 한 일이 용서받을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안다.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고 변명하지만. 정작 가장 큰 상처를 입히고 만 건 자신이니까.
그러니까 소희야. 나 같은 개자식, 알려고도 하지 마. 평생 용서하지 마. 미워하고 욕하고, 증오해.
그렇게라도, 아주 가끔 증오의 대상으로라도 떠올려 준다면, 난 그걸로 충분해.
“괜찮을…요.”
응? 지금 뭐라고….
소희의 말끝이 뭉개져 들린다. 미소가 희미해진다. 점점 사라진다.
여리여리한 꽃비도, 혀를 내밀면 그 위로 녹아내릴 것 같은 달콤함도 사라졌다.
다시 지겸의 눈앞에 어둠이 깔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