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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에 대한 가십 기사가 보도된 후, 지겸은 매일 밤 소희의 집 앞을 찾았다. 그가 빠르게 손을 쓴 덕분에 기사는 금방 사그라지고 정정 보도도 제대로 나갔다. 하지만 둘에 대한 소문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까지 완벽하게 차단할 수는 없었다. 혹시라도 소희에게 무슨 일이 생기는 것은 아닐까. 자신이 없는 곳에서 상처받거나 힘들어하면 어떻게 하지. 그런 끊임없는 걱정을 반복하다 보면 결국 어느새 소희의 집 앞에 다다라 있곤 했다.
기사를 퍼뜨린 게 지훈의 짓임을 알고 당장 찾아가 반 죽여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일차적 욕구에만 충실한 놈과 무슨 대화가 통하겠는가. 무엇보다 아직 구 회장과의 일이 완전히 마무리되지 않은 지금 자신이 먼저 섣불리 행동할 수는 없었다. 대신 구 회장을 독대했고, 그 또한 기사 자체가 베논 제약의 평판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리라는 것에 동의했다. 다른 거엔 몰라도 회사 손익에 관련된 문제에는 빠릿빠릿한 사람이니까. 지겸이 직접 처리한 게 대부분이었지만, 베논 제약 홍보실에서 신속하게 나선 것도 일부분 도움이 됐다.
“도착했습니다.”
김 실장의 말에 뒷좌석에서 몸을 구겨 앉아 있던 지겸이 겨우 몸을 일으켰다.
“후….”
심장의 통증이 며칠 사이 극도로 심해지고 있었다. 초반에는 아팠다가 아프지 않았다가를 반복하는 등 주기라도 있었다. 아프지 않은 순간이면 잠시라도 편안하게 숨이라고 고를 수 있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주기도 사라지고, 아프지 않은 때가 없다고 할 정도로 끊임없는 고통이 지속했다. 한순간도 잠들지 못한 게 벌써 여러 날이었다.
“지금이라도 입원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입원해서 진통제라도 맞으시면….”
“괜찮아. 무엇보다 지금은, 불안해서.”
그나마 매일 밤 소희의 집에 오는 것만이 그의 낙이 되었다. 지겸은 소희의 방에 불이 꺼지는 걸 물끄러미 바라보고는 한참을 더 서 있곤 했다. 어제는 아예 김 실장을 먼저 퇴근시키고 그 앞 벤치에서 밤을 새우기도 했다. 김 실장 눈에도 그런 지겸은 위태위태해 보였다. 지금 당장 쓰러진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간혹 심장이 조여드는 통증 사이사이, 생각이 멎는 듯한 순간이 찾아온다. 어떠한 이성적인 사고도 불가능해지는 것 같을 때. 결국 지겸이 떠올리게 되는 건 한 여자의 얼굴뿐이다. 말갛고 하얀 뺨이 자신을 받아들이며 붉게 물들던 순간들.
어릴 때, 학교 정문 앞에서 팔던 병아리를 산 적이 있다. 작은 아이의 주먹만 하던 보드랍고 노랗던 생명체. 지훈은 동물에 별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다행히도 꽤 오랜 시간을 지겸 혼자 독차지하며 키울 수 있었다. 병아리는 물과 사료를 챙겨주면 작은 부리로 쉴 새 없이 무언가를 먹어댔다. 얼마 뒤엔 지겸을 어미처럼 생각하는 것 같기도 했다. 손을 내밀면 뽀르르 달려와 몸을 비볐다. 그 사랑스럽고 애틋한 감촉은 지겸이 처음 기억하는 애정의 기억.
딱 하룻밤. 할아버지의 별장에 가족끼리 다녀왔던 날이던가. 며칠을 먹어도 거뜬할 정도의 먹을 것을 챙겨주고 떠났는데도 돌아온 지겸을 맞은 것은 죽어서 차갑게 굳어 있는 병아리의 시체였다. 지겸이 쌓아 놓고 떠났던 물과 사료는 입도 대지 않은 채였다.
- 병아리도 외로우면 죽는대.
그제야 알았다. 병아리도 외로움을 느낀다는 걸. 종일 울었다. 죽은 동물의 사체를 버리지도, 제 손으로 묻어 주지도 못하고 한참을 끌어안고 있었다. 그 작은 생명체가 밥이 없어서가 아니라 자신이 곁에 없어서 죽었다는 게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병아리는 자신을 기다렸을까? 어둡고 추운 방 안에 혼자 남아서 계속 두리번거렸을까….
가슴이 갑갑해져 오고 전신을 파고드는 생경한 통증에 시달릴 때면, 지겸은 가끔 그 병아리를 떠올린다. 그 심경을 이제는 알 것 같다. 자신이 지금 딱 그 병아리 같다. 소희가 없는 곳에서, 그녀 없이 온몸이 딱딱하게 굳어 죽어가고 있는 거다.
이별의 상처에 힘들어 허덕일 때, 지나친 스트레스가 지속될 때 실제로 사람의 몸은 아픔을 경험한다. 가슴과 명치가 조여드는 느낌, 신경성 호흡 곤란, 두통, 불면증, 어지럼증….
자극받고 힘든 건 뇌일 텐데 왜 몸이 반응할까. 마음이 아프면 실제로 심장도 아프다. 꼭 심장에 마음이 달린 것처럼. 물론 이는 두뇌가 시달리면서 인간의 자율 신경이 과민해지고 그 여파로 이상 신체 반응들이 나타날 뿐이다.
하지만 의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이 종종 사람의 몸 안에서 일어난다. 알파와 오메가의 각인처럼.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도 결국 심장에 새겨지는 게 맞나 보다. 그녀에게 새겨졌던 각인이 사라진 지금, 홀로 이별을 감내하는 제 심장이 쪼개질 것 같은 걸 보면 말이다.
지겸은 소희의 집에서 좀 떨어진 곳, 벤치에 앉아 하염없이 담배를 태웠다. 이렇게 집 앞에서 서성이다 보면 가끔 운 좋게 스치듯 남은 그녀의 체향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아주 잠시 통증이 멎었다. 각인의 본능이겠지. 상대의 흔적에 지겸의 몸도 반응하는 거다.
지겸이 담배를 다시 입에 물었을 때였다. 주차한 차에서 내리는 소희가 보였다. 집에 들어가려고 하는 것 같더니 그녀가 방향을 틀었다. 어디 가는 거지. 날이 아직 제법 쌀쌀한데. 감기도 잘 걸리는 애가. 어서 들어가지…. 담배에 불을 붙이는 것도 잊은 채 소희를 바라봤다.
지겸은 한강 둔치 쪽으로 난 지하차도를 따라 내려가는 소희의 뒤를 멀리서 조용히 밟았다. 혹시나 그녀가 알게 된다면 불쾌할 수도 있을 것 같아 참아 보려 했지만, 어두운 밤길을 홀로 걷는 소희가 너무 걱정됐다. 그도 모르게 몸이 먼저 움직였다. 강바람이 제법 차가울 텐데, 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처럼 불안한 뒷모습을 눈에 담았다.
소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강을 따라 조금 걷더니, 이내 한참을 벤치에 앉아 있었다. 어깨가 원래 저렇게 말랐던가. 손으로 움켜쥐면 바스러질 것만 같았다. 이상하게 초조한 기분에 지겸은 담배에 불을 붙이지 않고 필터만 씹어댔다. 연기조차 닿을 리가 없는 먼 거리였지만, 그녀 주변에 조금이라도 해로운 공기가 맴도는 게 싫었다.
벌떡. 소희가 빠르게 몸을 일으켰다. 걷는 것도, 움직이는 것도 늘 천천히 하는 편인 여자인데. 무슨 일이 있는 걸까. 그녀 주변을 살피는데, 아니나 다를까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학생들이 소희 쪽을 연신 쳐다보며 웅성대는 게 보였다. 소희가 움직이니 따라가는 모양새가 불안했다.
지겸이 적당한 거리를 두고 천천히 그들을 따라갔다.
밤이 늦어지면서 공기가 조금 더 차갑게 가라앉았다. 남자들 무리에서부터 피어오른 무모한 혈기와 알파 페로몬이 지겸에게까지 느껴진다. 술은 또 얼마나 마신 건지 그게 그놈들의 체향인지 알코올 냄새인지도 헷갈릴 정도였다. 지겸이 계속 물고 있던 담배에 천천히 불을 붙였다. 슥. 니코틴 향이 훅 그의 폐부를 채웠다.
후…. 그 역겨운 냄새를 음미라도 할 듯 천천히 들이마셨다 뱉어냈다.
무리 중 모자를 쓴 놈이 소희에게 가깝게 다가가는 게 보였다. 지겸이 제 오른 주먹을 꽉 쥐었다.
퍽! 그 남자의 팔이 소희 쪽으로 뻗어지는 걸 보자마자 이성이 날아갔다. 지겸은 놈의 뒷덜미를 낚아채 면상에 주먹을 날렸다. 소희를 둘러싸고 있던 다른 세 명이 눈이 휘둥그레져 지겸에게 맞는 친구를 쳐다봤다.
“아, 아흑. 사, 살려…. 윽.”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도 모르고 바닥을 기던 남자의 몸을 툭 차 똑바로 돌린 뒤 지겸이 그 배를 몇 번 더 세게 찼다. 놈이 쿨럭이며 신음하는 걸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목을 꽉 짓밟았다.
“크, 크극!”
신음하던 남자가 지겸의 발을 밀어내려 버둥거렸지만 나무뿌리처럼 박힌 다리와 발을 빼내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아…. 흑.”
긴장이 풀려 그랬는지 순간, 놀란 소희가 자리에 주저앉는 게 보였다. 지겸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때 멀뚱히 서 있던 남학생 중 한 명이 욕을 뱉으며 뛰어왔다. 그나마 무리 중 체격이 가장 큰 녀석이었다. 달려오며 속도를 실어 주먹을 뻗었지만 지겸이 가볍게 피했다. 제 속도를 감당하지 못한 놈은 앞으로 고꾸라져 굴렀다.
지겸이 여전히 발에 힘을 줘 바닥에 깔린 남자를 누르며 겁이 잔뜩 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는 남은 두 명을 느릿하게 응시했다.
“해 보게?”
두 남학생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눈을 깔고 숨만 씩 씩 뱉어냈다.
“왜. 나도 좀 가르쳐줘 보지? 좆도 나보다 니네가 더 쌩쌩하다며.”
“아, 그, 그게. 저희는 그, 그냥… 교, 교수님이….”
거친 숨을 겨우겨우 가라앉힌 소희가 그제야 지겸을 바라봤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난 것도 아닌데, 소희는 제 눈앞의 남자가 너무 낯설게 느껴졌다. 살이 조금 빠진 건지 눈매나 턱선이 더욱 날렵해지고 이목구비 사이사이 그림자가 깊어 보였다. 그 탓에 지겸 특유의 차가운 이미지가 도드라졌다. 소희가 그의 입에 물린 담배에 빨갛게 불이 붙었다가 사그라드는 것을, 뻗어 나오는 연기를 멍하니 응시했다.
그제야 지겸이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입에 물었던 담배를 비벼 꼈다. 그녀 앞에서 추한 모습이라도 보였다는 듯. 소희의 시선은 곧 그의 몸과 다리를 따라 내려와 괴로워하는 아까의 남학생에게로 옮겨갔다. 곧이어 얇게 떨리는 듯, 하지만 분명하게. 지겸이 수없이 머릿속에서 꿈속에서 듣고, 더 듣고 싶어 괴로웠던 그녀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제, 괜찮아요.”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지겸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로서는 여기 네 명 모두를 고자로 만들어도 시원치 않을 것 같은데. 자신이 오늘 이 자리에 없었다면 정말 무슨 일이 생길 수도 있었던 것 아닌가.
지겸이 알아듣지 못하는 것으로 보이자 소희가 좀 더 큰 소리로 말했다.
“재림대, 학생들이에요. 그냥….”
“임소희.”
지겸의 목소리에 소희를 향한 책망이 있었다. 그녀에게 이런 짓을 한 놈들은 어떻게 그냥 넘어가냐는 뜻이겠지. 하지만 소희로서는 이미 난잡한 가십에 소문 하나를 더 얹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소희가 지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조용히 고개를 좌우로 내저었다.
후…. 그녀의 눈빛을 본 지겸이 입술 한쪽을 지그시 물더니, 그의 발아래 깔려 있던 남학생을 놓아주었다.
“꺼져.”
“가, 감사합니다!”
소희와 지겸을 향해 죄송하다, 감사하다는 말을 반복하며 연신 고개를 숙이던 놈들은 헐레벌떡 사라졌다. 지겸이 오른 주먹을 계속 쥐었다 폈다 했다. 제대로 걷지도 못할 정도로 때렸어야 했는데. 이놈들한테 둘러싸여서도 떠는 척도 하지 않으려고 부러 더 눈을 똑바로 뜨고 소리치던 소희의 모습이 떠올랐다. 다시 화가 치솟았지만, 놀랐을 그녀를 생각하며 참았다.
“…괜찮아?”
지겸이 소희를 부축해 일으키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소희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놀랐던 게 아직 완전히 진정되지 않았는지 어깨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가 자신이 입고 있던 재킷을 벗어 둘러줬다. 어깨를 살짝 쥐었다 풀어주는 손길이 따뜻했다.
“걸을 수 있겠어?”
“네.”
걷기 힘들겠다고 하면 당장이라도 둘러업을 것 같아서 소희는 더 세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지겸을 본 순간부터 갑갑하게 옥죄여 오던 소희의 가슴이 조금씩 편안해졌다. 그의 곁에 서서 걸으니 익숙한 페로몬에 마음마저 다독여진다.
낯선 담배 향이 섞여들어서일까. 묘한 타닌 향이 풍기는 남자의 짙은 체향에 소희의 심장이 다른 이유로 조금씩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조차, 바보 같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