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신부강탈-61화 (6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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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훈을 만나고 집에 돌아오는 길, 소희는 답답한 마음에 오랜만에 한강 바람이나 쏘여야지 생각했다. 차를 주차하고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 한강 둔치까지 연결된 지하차도로 천천히 걸어 내려갔다. 뺨을 스치는 바람이 제법 차가웠다.

“집에 잘 들어갔지? 밥은 먹었어?”

오늘 아침에 헤어져 놓고서 소희에게 또 연락이 오자 유정이 웃었다. 지금 감시하고 있는 거냐며.

- 당연히 먹었지. 아직 메슥거리는 기분은 남아 있는데, 그래도 입덧 심할 때랑은 비교도 안 돼. 혼자서 소고기 구워 먹었다!

“진짜? 잘했네, 정말 잘했다.”

- 누가 보면 네가 애 아빠인 줄. 소희야. 너야말로 아무 생각하지 말고, 푹 쉬어. 괜히 여기저기 싸돌아다니지 말고.

좀 잦아들었지만 유정은 여전히 사람들 사이에 떠도는 소희와 지겸에 대한 소문을 걱정하고 있었다. 제 자신 추스르는 것만으로 쉽지 않을 텐데, 소희를 먼저 걱정해 주는 친구가 너무 고마웠다.

“알겠어, 그럴게. 너야말로 내 신경 쓰지 말구. 뭐든 필요하면 연락해. 알겠지?”

- 어이구. 누구랑 똑같은 소리하네.

“…응?”

- 아, 아니, 아니야. 소희야 나 졸려서 좀 잘게. 괜히 또 한강 근처에서 어슬렁거리지 말고 집에 들어가!

끊긴 휴대전화 액정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소희가 피식 웃었다.

어떻게 알았지, 귀신이 따로 없네.

소희는 지훈을 만난 얘기를 할까 잠시 망설였지만 참았다. 굳이 유정에게 그 인간의 이름을 또 꺼내 상처를 상기시킬 필요는 없을 거다.

주말이라 그런지 아직 날이 쌀쌀한데도 한강에는 사람이 꽤 많았다. 자전거 타는 사람부터 편의점 앞 테이블에 삼삼오오 모여 술 한잔하는 사람들까지. 소희는 다른 이들 눈에 띄지 않기 위해 괜히 고개를 조금 숙이며 강을 따라 걷다가 중간에 적당한 빈 벤치에 앉았다. 멀리 다리의 조명이 비쳐 붉게 일렁이는 강물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지난여름의 기억 때문인지 그 후로 한강에 올 때면 자연스럽게 그 남자가 먼저 떠오른다. 그게 지훈이 아니라 지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로는 더더욱. 그 첫 입맞춤의 떨림이 오래도록 잊히질 않아서일까. 마치 마법에라도 걸린 사람처럼 지훈인 척하는 지겸에게 휩쓸렸다.

지난밤 유정은 지훈의 이야기를 하며 많이 울었다. 소희는 적당한 위로의 말을 찾지 못하고 제 친구를 그저 꽉 안아줄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자신은 얼마나 못된 친구인지. 유정에게 얘기를 들으며 처음 소희가 느낀 것은 우습게도 안도감이었다. 원래 약혼자 지훈에 대한 배신감을 느끼기도 전에, 유정의 상대가 지겸이 아니었을 뿐 아니라 그동안 지겸을 따라다녔던 난잡한 소문들 모두 오해였다는 게 다행이라는 생각부터 들었다.

사실 한국으로 돌아온 뒤 소희는 단 한 순간도 지훈에 대해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약혼한 사이였는데도. 지겸과의 일이 자신의 머릿속에서 구지훈이란 존재를 완전히 삭제해 버린 것만 같았다.

그런 스스로가 나쁜 사람이라 자책하기도 했다. 자꾸만 떠오르는 지겸의 잔상을 지우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이제는 정말 지훈에 대한 죄책감은 느끼지 않아도 될 것이다.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나자, 혼자 아이를 낳아 키우겠다는 유정의 결심을 더 지지하게 됐다. 지훈이 그동안 유정뿐 아니라 약혼녀인 자신과 제 부모를 속이고 방탕하게 살아왔다는 걸 떠올리면 이렇게 한 번 찾아가 따진 걸로는 사실 부족하다.

지겸이 그렇게 지훈과의 결혼은 안 된다고 했던 이유가 이것이었겠구나. 그는 소희에게 경멸 어린 소리를 들으면서도, 자신이 받고 있을 오해에 대한 적극적인 해명도 하지 않았다. 지훈의 본모습에 대해 차마 입에 올리지 않았던 건 왜였을까. 혹시 소희가 상처받는 게 싫어서였을까.

정말 미련한 사람이다. 모든 걸 솔직히 얘기했다면 자신이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을까. 아니지, 과연 그랬을까? 그가 뭔가를 얘기하려고 할 때마다 못하게 막았던 것은 정작 소희가 아니었나?

이제야 조금씩 더 구지겸이란 사람을 알 것만 같다. 꼭 저 강물 같아. 표면만 보고는 깊이를 가늠할 수 없게 일렁이면서 눈치채지 못한 순간 전신을 파고드는 사람. 소희는 어느덧 자기도 모르게 그 물결 위에 그 남자를 떠올렸다가 서둘러 지웠다가를 반복했다.

그렇게 캄캄한 강물을 바라보며 한참을 앉아 있었다. 어지러웠던 머리가 조금씩 비어가는 것 같았다. 그래, 너무 많은 것을 생각하지 말자. 우선은 차근히, 하나씩.

그때 그렇게 멀지 않은 곳, 가로등 불빛 아래 젊은 남자들의 무리가 보였다. 20대 초반 즈음 되었을까. 대학생들 같았다. 술을 꽤 마신 것인지 얼굴이 벌게져서는 자기들끼리 툭툭 치며 농담을 주고받고 있었다. 그중 한 명과 우연히 눈이 마주쳤다.

분명하진 않지만, 그녀를 발견한 그 남학생의 표정이 조금 달라졌다. 시끄럽던 무리가 한순간 조용해진다. 소희는 괜스레 불안해졌다. 며칠 동안 여러 커뮤니티를 뜨겁게 달구던 소희의 기사가 어젯밤부터는 아예 눈에 띄지 않았지만, 그래도 젊은 사람들 사이엔 대부분 퍼져있어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모양이었다.

소희가 벤치에서 일어나 그곳을 황급히 벗어났다. 아파트 단지 쪽으로 다시 올라가려고 방향을 트는데 아까 그 남학생들이 휘파람을 불며 뭐라 뭐라 떠드는 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려왔다. 너무 신경이 쓰였지만, 뒤돌아보지 않고 곧장 앞으로만 걸었다. 무리의 발걸음 소리가 점점 크게 다가왔다. 소희가 뛰다시피 걸어 지하차도까지 겨우 진입했을 때였다.

“야! 임소희!”

우뚝. 소희가 걸음을 멈췄다.

“와, 맞네. 우리 임소희 교수님.”

소희가 뒤를 돌았다. 익숙한 학교 엠블럼이 박힌 과 잠바가 눈에 띄었다. 재림대 학생들인 모양이었다. 술 냄새에 섞여 진득한 우성 알파의 페로몬이 훅 흘러들었다. 독하고 불쾌했다. 소희가 자기도 모르게 숨을 참으며 손으로 코와 입을 함께 막았다.

“맞아? 난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게 첨이라. 재림대 여신님 존나 예쁘긴 하네.”

한 명이 소희의 얼굴 앞까지 확 다가와 고개를 쭉 내밀고 대놓고 코를 킁킁거렸다.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고 오싹함에 몸이 떨려왔다.

“크, 페로몬 폴폴 풍기는 거 봐라. 미쳤네. 내 여친보다 단데? 로열이라 그런가.”

네 명의 남학생들이 순식간에 소희를 둘러쌌다. 소희가 벽 쪽으로 뒷걸음질 칠수록 그들이 거리를 좁혀들었다.

“에이 교수님, 사랑하는 제자들이 인사드리는데 얼굴이 왜 그러십니까? 누가 보면 우리가 협박이라도 하는 줄 알겠어.”

소희가 얼굴을 가렸던 손을 내리고 한 명 한 명을 똑바로 노려보며 말했다.

“우리 학교 학생들 같은데, 너희 술 너무 많이 마셨어. 아무리 캠퍼스 밖이라지만, 예의 좀 갖추자. 응?”

“예의요? 대박. 야 들었냐. 예의래. 어쭈 야린다? 존나 꼴리네.”

“임소희 교수님이 예의 타령하니까 웃겨서요. 약혼자 동생이랑 붙어먹은 거 소문 다 났는데, 그건 예의 있는 행동인가?”

“너네. 우리 학생들이니까, 경찰 안 부르고 조용히 보내주고 싶어. 후회할 행동들 하지 말렴. 알겠니?”

겁이 났다. 하지만 그런 티를 내지 않도록 온몸의 긴장을 놓지 않았다. 소희가 휴대폰을 손에 꼭 쥐었다. 여차하면 112를 바로 누르자. 가방 어딘가 후추 스프레이도 있었던 것 같은데.

“야, 너 때문에 우리 교수님 오해하시잖아. 잘 설명을 해 드려야지.”

“그런가? 아니, 우린 그냥 교수님께 한 수 배우고 싶어서 그러죠.”

지금껏 한마디도 하지 않고 뒤쪽에 서 있던 모자 쓴 남학생이 소희에게 한 발 더 가까이 다가왔다. 공격적인 알파 페로몬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뭐, 뭘?”

온몸이 달달 떨리지만, 최대한 아닌 척하며 소희가 겨우 되물었다.

“아. 형제를 한 번에 쌈 싸 먹는 그 실력이 어떤 건지, 우리도 좀 가르쳐 달라는 거지.”

“뭐라고?”

믿을 수 없이 모욕적인 상황이었다. 소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그런 그녀의 얼굴을 보며 그들은 오히려 재밌다는 듯 낄낄 웃었다.

“아니, 우리 거가 크기는 그 형님들만 못해도 젊은 좆인데. 아 씨발, 저 페로몬. 진짜 못 참겠네.”

퉤. 침을 뱉은 남학생이 소희의 얼굴 바로 앞까지 다가와 손을 뻗었다. 손목이 낚아채는 것 같은 순간, 소희가 휴대폰과 함께 꽉 주먹 쥔 손을 휘둘러 눈앞 남자의 억굴을 가격했다. 눈은 질끈 감은 채였다.

“으헉!”

제대로 때린 건가? 둔탁한 소리와 함께 남학생의 신음이 들렸다. 눈을 뜨니 저기 멀리 제 배를 부여잡고 뒹구는 모습이 보였다. 벗겨진 모자가 땅바닥에 함께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자신의 손이 아프지 않았다. 때려서 쓰러진 게 맞다면 제 오른손이 아파야 하지 않나? 게다가 자신이 때린 정도로 저렇게 쓰러질 정도의 타격을 줄 수 있을까?

덜덜 떨리는 손을 들어 여기저기 확인하는데 분명 아무런 느낌이 없다. 그럼 저 남학생은 자신의 주먹에 맞은 게 아닐 텐데.

“아, 아흑. 사, 살려…. 윽.”

자세히 보니 쓰러진 남학생은 자신을 짓누르는 누군가의 발목을 붙잡고 애원하고 있었다. 그 남학생의 목을 짓밟고 있는 까만 구둣발을 따라 시선을 올렸다. 매끈한 수트를 입고 입에 담배를 물고 있는 키 큰 남자의 존재감이 어둠 속에서도 형형했다.

“아.”

혹시나 헛것이 보이는 건 아닐까. 오늘만 해도 내내 떠오르던 저 얼굴을 애써 지워 버렸던 그녀다. 소희가 일부러 눈을 꽉 감았다. 이 상황이 꼭 꿈만 같아서. 눈을 다시 떴을 때, 그 사람이 여전히 앞에 있을까. 그가 아니었으면 좋겠다. 아니, 그가 맞았으면 좋겠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는, 마침내 소희가 두 눈을 떴다.

그리고 다리에 힘이 풀린 소희가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 남자였다. 구지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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