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신부강탈-60화 (6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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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희야 너. 싱가포르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나한텐 네 약혼자랑 간다고 했었잖아.”

그제야 소희는 유정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작년에 함께 휴가를 갔던 것도 알고 보니 지겸이었다는 이야기부터, 싱가포르에서 서로 각인까지 하고는 한국으로 돌아와 다시 각인을 풀게 된 것까지 전부.

“정말 바보같았지. 어떻게 그렇게 모를 수 있었을까.”

소희가 계속 그렇게 자조적으로 말하면, 유정이 토닥이며 속인 사람 잘못이지 그녀 탓이 아니라며 위로해줬다.

“그래서 구지겸, 그 사람이 그랬구나.”

소희의 얘기를 다 듣고 난 유정이 그제야 납득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왜?”

“나랑 만났다고 한 날 있잖아. 사실… 그 사람이 내게 널 부탁한다고 했었어. 자기가 큰 잘못을 했다고 하더라. 그때는 좀 뜬금없다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그런 짓을.”

유정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지훈에게 입은 자신의 상처가 함께 떠올라 입 안 여린 살을 연신 깨물었다.

“아무리 널 사랑한다고 해도, 소희야. 거짓으로 시작한 관계는 쉽게 허물어질 수밖에 없어. 내가 참견할 일은 아니지만…. 솔직히 구지훈이나 그 사람이나….”

유정이 말을 더 이어가려다가 자신도 모르게 소희의 눈치를 봤다.

솔직히 제 친구에게 그런 짓을 했다니, 유정은 지겸을 다시 만나 따귀라도 때려야 속이 편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동안의 일을 털어놓는 소희에게서 구지겸을 향한 선명한 분노는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말하는 중간중간 멈춰 어떤 순간을 상기하는 그녀의 얼굴엔 부드러운 미소와 그리움이 서려 있기도 했다.

그리고 그 날 본 그 남자의 눈빛, 소희를 얘기하던 목소리의 떨림 같은 게 다시 떠올랐다. 그 남자는 진짜 소희를 많이 좋아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소희를 위해 이제 아무것도 직접 할 수 없으니까 대신 유정에게 부탁하러 왔구나. 유정은 이제야 자신이 왜 그에게 미묘하게 공감까지 했는지 알았다.

구지겸은 열렬한 짝사랑에 빠진 사람의 눈을 하고 있었던 거다. 마치, 유정이가 내내 그랬던 것처럼.

그래서 유정은 소희를 위해 그 사람을 욕하는 것 대신 궁금한 것을 물었다.

“소희 넌 그 사람… 어떤데?”

“모르겠어, 유정아. 난….”

사실 그동안 그에 대해 무엇도 생각하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애썼다. 유정이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그녀 아이의 아빠가 되어야 할 사람이라고.

스스로도 가늠하기 힘들었다. 구지겸, 그 남자에 대한 이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감정에 어떤 이름을 붙여야 하는지. 그 사람을 떠올리면 왜 자꾸 심장 한쪽이 저리는지도. 커피든 노래든 그게 무엇이든. 일상에서 부딪히는 모든 것들에서 자꾸만 그의 흔적을 찾게 되는지도.

소희는 늘 우등생이었다. 학교에서 배운 것이든, 책에서든 그녀에겐 별로 어려운 개념이랄 게 없었다. 실수하지 않는 한, 이해가 가지 않아 틀렸던 문제는 없었다. 그런데 그녀의 삶에 그 남자가 들어온 후로는 모든 것이 오답투성이다. 모르겠다. 자신의 마음도,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정말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도. 그저 확실한 것 하나는.

“그냥, 유정아. 정말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난. 그냥 자꾸, 그 사람이….”

보고 싶어….

소희의 울음이 잦아들 때까지 유정은 그녀를 가만히 다독여줬다.

그리고 그렇게 밤새, 두 사람은 오랜만에 많은 대화를 나눴다. 한 침대에 누워, 어깨를 나란히 하고서. 어린 시절에 자주 그랬듯이.

유정은 처음 지훈을 만났던 때부터 어떻게 지겸으로 오해하고 만났는지. 또 그 사람이 지훈인 것을 알고 찾아갔을 때 그가 어떻게 행동했는지까지 전부 털어놓았다. 소희는 너무 화가 나서 중간중간 자기도 모르게 분노와 눈물을 터뜨렸다. 본인이 더 억울하고 분했다.

- 난 이제 괜찮아. 오히려 실체를 알고 나니까 속이 시원해. 혼자서도 괜찮아. 그런 아빠가 있는 것보다 엄마 혼자라도 제대로 사랑해 주고 아껴주면서 키우는 게 내 아이에게도 좋지 않을까?

물론 소희도 동감했다. 제 친구의 용기 있는 결정을 응원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친구로서 유정의 가족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또 앞으로의 커리어는 어떻게 해야 할지 많은 것이 걱정스러웠다.

다음 날 아침 소희가 출근하는 유정을 배웅하러 주차장까지 따라 나왔다.

“뭘 여기까지 나와. 알아서 가는데.”

“그냥 그러고 싶어서. 너 홑몸도 아닌데, 운전 괜찮아?”

유정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웃으며 소희를 바라봤다.

“얘는, 임신한 여자는 혼자 아무것도 못 하는 줄 아나. 걱정 마!”

괜히 더 밝은 표정으로 웃어주는 유정에게 소희도 똑같이 대했다. 때론 웃는 얼굴이 우는 얼굴보다 보는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오늘 유정의 얼굴처럼.

소희는 유정의 차가 멀어져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바로 휴대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

오랜 시간을 지훈의 약혼녀로 지냈는데도, 그의 집은 처음이었다.

“네가 먼저 연락할 줄은 몰랐는데.”

문가에 서 있는 소희를 위아래로 훑는 지훈의 얼굴이 심상했다. 그의 시선이 제게 닿을 때마다 소희가 움찔거렸다. 유정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그동안 그를 만날 때마다 자신이 불편해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신사적인 말과는 다른 고압적인 말투와 표정. 위선적인 태도와 거짓말들. 그리고 여전히 괴로운, 그 특유의 페로몬.

“계속 그렇게 서 있기만 할 거야? 들어와.”

“잠깐 얘기만 하고 갈 거라서요.”

사실 다시는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사람이다. 하지만 용기를 내어 여기까지 온 것은, 마지막으로 직접 얼굴을 보고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였다.

“와- 임소희. 파혼했다고 완전 모르는 사람 취급하네? 이러면 나도 좀 서운한데.”

겉옷을 벗지도, 안쪽으로 들어오지도 않는 소희를 향해 지훈이 비꼬듯 말했다.

“제가 약혼자로서 존중받지 못했던 걸 떠올리면 이 정도로 서운하실 일은 아닌 것 같은데요.”

조곤조곤한 소희의 말투에 지훈의 눈썹 한쪽이 신경질적으로 휘었다.

“뭐? 씨발. 약혼자 동생이랑 붙어먹은 주제에 그런 소리 하면 같잖은 거 알지?”

“그, 그건…!”

“그냥 까놓고 말해 봐. 너희 원래 그렇고 그런 사이였던 거 아냐? 구지겸, 그 새끼가 옛날부터 너 좋아하는 거, 나도 다 알고 있었거든?”

지겸에 대한 이야기에 잠시 흠칫했던 소희가 다시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은 오빠 같은 사람이니까 가능한 건가 봐요.”

다시 날을 세운 소희의 말에 지훈이 혀를 찼다.

“성깔 부리는 거 봐라. 지금까지 어떻게 그렇게 내숭을 떨었대?”

거친 단어와 말투를 사용하는 지훈을 보며 소희는 너무 놀라 심장이 마구 뛰었다. 이게 구지훈이라는 남자의 실체였는데, 그동안은 꿈에서조차 몰랐다. 유정에게 미리 듣지 않았다면 다리가 후들거려 제대로 서 있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소희는 그런 지훈을 노려보다 오늘 이곳에 온 진짜 목적을 꺼냈다.

“유정이, 정말 이렇게 아무 상관도 하지 않을 생각이에요?”

“뭐…?”

“당신 아이잖아요. 오빠, 그렇게 무책임한 사람이었어요?”

“그 애가 내 애가 맞는지 어떻게 알아. 신유정, 그 년을 어떻게 믿고.”

소희가 입 안쪽 여린 살을 잘근 씹었다. 친구가 제 아이의 아빠로부터 이런 모욕적인 말을 들었을 거로 생각하면 더욱 화가 났다.

“이 세상 사람이 다 오빠같진 않아요.”

벽에 비스듬하게 기대어 서 있던 지훈이 몸을 똑바로 일으키더니 물었다.

“그래. 그럼 그렇다 쳐. 신유정이 내 애 가졌다 치고. 그래서 뭐? 내가 그 베타 년이랑 결혼이라도 해 줘야 하나?”

“그건 유정이가 결정할 문제죠. 유정이가 당신을 원할 리도 없지만.”

“뭐야? 임소희. 적당히 까불어.”

그의 위압적인 언사에도 소희가 멈추지 않고 더 힘을 주어 말했다.

“당신이 그동안 저지른 잘못을 진심으로 사과하고, 유정이가 아이를 키우고 싶어 하면 합당한 양육비를 제공해야 한다고 봐요.”

하하하하하.

마지막 소희의 말에 지훈이 배를 부여잡고 과장되게 깔깔 웃어젖혔다. 기괴하게까지 여겨지는 모습에 소름이 돋았다.

“야. 이렇게 순해 빠져서 이 험한 세상 어떻게 살려고 그러냐? 내가 베타가 낳은 아이를 인정해 줄 거 같아? 알파나 오메가라고 해도 우성이 아니면 치워버릴 판에?”

놀란 소희의 눈이 크게 떠졌다. 요즘 같을 때 저런 구시대적인 발상이라니. 그녀의 아버지나 별 차이 없는 선민의식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구지훈은 생각보다 더 쓰레기 같은 사람이었다. 더는 대화를 나눌 가치가 없게 느껴졌다.

후…. 소희가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오늘 괜히 왔네요. 적어도 사람 대 사람으로서 정상적인 대화가 통할 거로 생각했었는데… 제가 착각했어요. 다시는 볼 일 없겠네요.”

“이렇게, 그냥 가게?”

순간 구지훈이 소희의 한쪽 팔을 움켜줬다. 소희가 놀라며 그의 팔을 팍, 쳐냈다.

“함부로 만지지 마요.”

“하. 아직도 비싸게 구네. 이미 구지겸이 홀랑 먹어버린 거 내가 다 아는데. 씁. 그럴 줄 알았으면 진작 따먹을걸”

“말… 정말 가려서 안 해요?”

소희가 아래로 내려뜨린 양손을 꽉 쥐었다. 팔이 바들바들 떨렸다.

“뭐, 어때. 어차피 얼굴도 똑같잖아? 그냥 그 새끼라고 생각하고 한번, 어때?”

찰싹.

도저히 참지 못하고 소희가 그의 뺨을 때렸다.

“아. 이 씨발년이…!”

열받은 지훈이 자기도 때리려고 오른손을 번쩍 들었다. 놀란 소희가 몸을 움츠리는데, 그걸 본 지훈이 지난번 지겸의 경고를 떠올렸다. 그동안 자신이 지겸의 이름으로 무슨 저질스러운 짓을 해도 한마디 않던 녀석이다. 그런데 제 입에서 소희의 이름이 나오자 지겸의 얼굴이 얼마나 독기어린 맹수의 것으로 바뀌었던가. 정말 자기를 죽이려 한다면 죽일 수도 있는 놈이라는 걸, 지훈은 안다.

그가 손을 거두자, 소희가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구지겸, 그 사람은… 오빠랑은 달라요.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아요.”

“…뭐?”

소희의 말에 황당한지 지훈이 입을 멍하니 벌렸다.

그런 그를 두고 소희가 재빨리 뒤를 돌아 그 끔찍한 공간을 벗어났다. 자신의 입에서 방금 어떤 말이, 무슨 진심이 뱉어져 버렸는지 깨닫지도 못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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