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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아. 난 괜찮아…. 너야말로, 몸은 괜찮아? 아픈 데는… 없는 거지?”
- 그러엄. 그동안 연락받지 못해 미안해…. 우리 만날 수 있을까? 집이야?
“이제 들어가는 길. 내가 너희 집으로 갈까?”
- 아니야, 나 이미 너희 동네야. 기다릴게.
다시 만난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소희는 언젠가처럼 유자청을 듬뿍 넣어 따뜻한 유자차를 끓였다. 달콤한 향이 부드럽게 주변을 감쌌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을 기억하는 건 소희가 아니라 유정이다. 둘은 오래 한동네에 살았고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교까지도 전부 동문인데, 알고 보니 유치원도 같이 다녔다고. 유정의 말로는 어느 날 친구와 싸우고 속상해진 그녀가 혼자 놀이터에서 그네를 타고 있는데 소희가 먼저 다가왔다고 한다. 무슨 일 있냐고, 자신과 같이 놀겠냐고 물으면서.
실제로 가까워진 건 초등학교 들어가서부터였지만 유정이에게 떠오르는 소희는 언제나 그네에 앉아 있던 자신에게 조심스럽게 다가오던 6살 소녀의 모습 그대로이다.
“아기, 벌써 많이 컸겠다….”
소희가 아직 조금도 볼록 나오진 않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존재감이 느껴지는 유정의 아랫배를 쳐다봤다. 정말로 보고 싶었던 유정이었는데, 미안하고 걱정스러운 복잡한 심경으로 괴로웠는데. 얼굴을 마주한 순간부터 자꾸만 소희를 힘들게 하는 건 친구의 뒤로 겹쳐 보이는 지겸의 잔상이었다.
지겸은 그녀의 입술을 부드럽게 빨아 당기던 그 입술로 유정에게도 입을 맞췄을까. 자신의 온몸을 어루만지고 아래를 적시던 손끝으로 똑같이 그녀에게도….
베타가 알파와의 관계를 통해 임신하는 건 정말 기적에 가까운 확률이라던데. 그러면 두 사람은 얼마나 많은 시간을 함께한 걸까. 소희는 스스로가 싫어질 정도로 유치하고 저급한 기분에 휩싸였다. 차마 질투라고 부르기조차 어려운 추한 감정이었다. 그러나 이런 감정은 오메가로서의 본능에 휩싸였던 자신의 어두운 단면, 그 시간 때문에 치러야 하는 값일 뿐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야.
“혹시 아기 얘기… 해 봤어?”
친구 유정은 소희에게 정말로 중요한 사람이다. 그러니 소희는 그녀를 위해서 혼란스럽고 개인적인 감정은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지겸의 모든 면을 아는 건 아니지만, 함께 보낸 시간을 떠올리면 절대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니 유정이 임신한 사실에 대해 그에게 솔직히 말하고 대화를 제대로 나눴다면 상황이 달라질 수도 있을 거다. 소희는 어떤 식으로든 유정이가 바라는 대로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마음은 진짜였다.
다만 한국으로 돌아와서 끊임없이 생각했다. 유정은 진짜 지겸의 아이를 밴 걸까. 정말로 두 사람이 사귀는 사이였을까.
그렇다고 하기에 지겸이 소희에게 보여준 감정과 그에 따른 행동들이 너무 진실 같았다. 그 친한 친구를 아무렇지 않게 만나 깊은 관계를 맺고 임신까지 시킨 남자로 보이기에는 자신에게 한결같았던 태도가 자꾸 마음에 걸린다.
아니면 소희 가슴 속 깊이 그렇게 생각하고 싶은 진심이 숨어 있는지도 몰랐다. 이 모든 게 오해이기를. 거짓으로 둘러싼 채 소희에게 다가온 사람이지만, 지겸의 끊임없이 고백하고 낱낱이 보여줬던 그 마음만은 사기가 아니라 사랑이었으면 했다.
“했어. 그 사람에게, 임신했다고.”
쿵. 바보같이도 소희의 심장이 발밑까지 떨어져 내렸다. 이어질 유정의 말이 너무 궁금하기도 했고 동시에 듣고 싶지 않기도 했다.
“잘했어, 정말 잘해서 유정아. 그 남자가 뭐라고 해…?”
소희도 모르는 사이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울컥하고 쏟아져 나온 감정이 눈가에 촉촉하게 어렸다.
“소희야.”
유정이 손안에 쥐고 있던 머그잔을 살며시 내려놓았다. 그리고 맞은편에 앉은 소희의 손을 가만히 감싸 쥐었다.
“할 얘기가 있어.”
“응?”
“내가… 속았어. 그동안 만나온 남자, 구지겸이 아니라 구지훈이었어. 네 약혼자.”
“그게 무슨 소리야…?”
유정의 말이 언뜻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사람은 보통 너무 놀라운 소식을 들으면 바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오히려 자신이 지금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의심부터 하게 된다. 유정의 말도 그랬다. 소희의 귀에 바로 들어오지 않고 어디론가 튕겨갔다. 현실성이 없었다.
“내 배 속 아이의 아빠, 구지겸이 아니라 구지훈이었다고.”
유정이 그 말을 한 번 더 반복한 뒤에야 소희는 깨달았다.
“아….”
이상하지. 하늘이 흔들려야 할 충격적인 소식인데. 소희는 하나도 놀랍지 않았다.
그럴 줄 알았어. 그럴 것 같았어. 유정을 임신시킨 사람이 그 사람이, 구지겸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온몸이 파도치는 바닷속에라도 잠긴 듯 울렁거렸다. 그동안 소희의 가슴을 갑갑하게 조이던 감정의 물결이 그 파도를 따라 전신을 파고들었다. 혼란스러움, 억울함, 안타까움, 슬픔, 그리고 안도감. 그래, 안도감.
“소희야. 너, 울어?”
“뭐…?”
“왜 그래. 바보같이. 울려면 내가 울어야지 왜 네가 울어….”
응? 울고 있다고…? 소희가 제 오른손을 들어 뺨을 문질렀다. 자신도 모르게 어느새 흘러내린 눈물방울로 손등이 축축했다. 대체 왜 이러는 거지. 당황하고 있는 소희의 손을 유정이 더욱 꽉 잡았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녀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처럼. 유정의 손은 차가웠지만, 소희의 마음은 뜨겁게 데워졌다.
소희에게 구지겸은 나쁜 사람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려고 노력했다는 편이 맞겠지.
유정을 임신시키고, 매일 다른 여자를 가볍게 만나면서도 자신을 속여 밤을 보낸 사람. 하지만 그럼에도 소희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남자.
하지만 그런 짓을 한 사람이 지겸이 아니라 지훈이었다면, 앞의 사실이 오해였다면, 결국 남는 것은….
싱가포르에서의 어느 밤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면 얼마 전 병원에서 수면 마취가 완전히 깨기 전이었나. 소희의 손을 부드럽게 움켜쥐던 그의 체온이 데일 듯 뜨거웠다. 조금 놀라긴 했지만 꿈에서 덜 깬 것처럼 정신도 몽롱했고 차마 지겸의 손을 뿌리칠 수 없기도 했다. 그 큰 손안에 제 손이 담기면 마치 온몸이 따스한 물에 폭 잠긴 듯 평온해졌다.
연신 그녀의 손가락 끝에 입을 맞추던 지겸은… 울고 있었다. 사위가 어두워서 자세히 보이진 않았으나 젖어 있던 까만 눈동자가 기억이 난다. 그는 왜 울었을까. 지금도 문득문득 자려고 누우면 그 눈빛이 떠올랐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어떤 걸까.
지겸은 그동안 수없이 그녀에게 고백했었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고.
소희는 한 번도 누군가를 사랑해 본 적 없었다. 어쩌면 그럴 필요성을 별로 느끼지 않았다고 하는 편이 맞을지도.
부모님은 그녀를 꾸준히 관리했고, 주변의 시선도 매서웠다. 어차피 누구와 결혼할지 결정되어 있는데 굳이 다른 누군가를 만날 수고를 할 필요는 없었다. 다가오는 사람도 없었을뿐더러, 소희도 특별히 관심 가는 이성이 없었다. 지훈과도 결혼하면 점차 나아지겠다는 생각만이 있었을 뿐, 그를 사랑한다고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 그녀를 자꾸 끌어안고, 녹일 듯이 바라보고, 눈에 닿는 곳은 어디든 입을 맞추던 남자. 사랑한다고, 사랑이 맞다고, 두 사람은 사랑하게 될 거라고. 그의 페로몬과 행동, 말이 모두 애정을 담은 화살이 되어 소희에게로만 직선으로 향했다.
혹시 지겸을 다시 보는 날이 온다면 이렇게 묻고 싶다. 어떻게 자신의 마음을 그렇게 확신할 수 있었냐고. 본능적인 페로몬의 반응에 뇌가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니냐고. 알파와 오메가가 아니라 갖고 싶은데 가질 수 없었던 형의 약혼녀로서가 아니라, 그냥 평범한 한 인간 대 인간으로 두 사람이 만났다면. 그랬대도 자신을 그렇게 사랑했을 것 같냐고.
유정은 소희의 울음이 그치기를 조용히 기다렸다.
“구지겸, 그 사람이 찾아왔었어.”
“너를? 언제?”
아직 목이 멘 채로 소희가 겨우 되물었다.
“며칠 전에. 뭔가 더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던 것 같은데… 하려다 말더라.”
그 남자, 어때 보였어…?
소희는 순간 입 밖으로 꺼내질 뻔한 질문을 애써 참았다. 우스운 일이었다.
지겸이 무슨 얘기를 했는지, 왜 유정을 만났을지. 그런 것보다도 정작 궁금한 건 그 사람이 잘 지내는지, 유정과 만나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 같은 사소한 부분이었다.
“구지겸, 그 사람을 만나고 알게 된 거야? 그동안 만났던 사람이 아니라는 거….”
소희가 더듬으며 물었다.
“처음엔 전혀 눈치 못 챘어. 분위기는 좀 달라 보였지만 생긴 것도 똑같고, 목소리가 거의 같았으니까. 사람들 보통 컨디션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니까, 그런 차이일 거라고. 그렇게만 생각했어. 그런데 결정적으로 다른 점을 발견해서…. 그래서 알게 됐어.”
베이스는 비슷하지만 두 남자의 페로몬은 달랐다. 그런데도 소희는 지겸이 지훈인 척했을 때 제대로 의심 한 번 하지 않았다. 새로운 억제제의 호르몬 작용 때문이라는 말을 믿었다. 어린 시절 이후 지겸을 한 번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존재감을 느끼지 못했던 것도 있지만.
처음 함께 갔던 여행에서, 분명 소희는 그가 평소와 다르다는 걸 느꼈던 것 같다. 그런데도 의심하려 하지 않았다. 대체 왜 그랬을까.
어쩌면 소희는 그저 믿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평소와 다르게 자신에게 집중하고, 안온한 애정을 느끼게 하는 사람이 지훈이라고. 그래서 그와 함께할 미래 또한 이렇게 따뜻하고 편안할 거라고.
싱가포르에서도 마찬가지다. 그에게서 낯선 부분이 조금씩 눈에 띄어도 그냥 넘어갔다. 그렇게 한 번, 두 번. 같은 상황이 반복되자 어느새 소희는 믿고 싶은 대로 믿게 됐다. 다른 가능성은 생각할 여지도 주지 않은 채.
“그런데 알고 나니까 그제야 보이더라. 둘은… 생긴 거 빼고는 모든 게 달라.”
소희도 알았다. 그 남자가 자신의 약혼자 지훈이라고 믿고 싶었을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지겸인 것을 깨닫고 나니까 제대로 느껴졌다. 외형적으로는 별 차이가 없는 두 사람이 실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다른 사람이라는 것도. 특히 누구보다 자신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