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신부강탈-58화 (58/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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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은아, 너 좋아하는 스시 먹으러 가지.”

비싼 거 먹어도 되는데…. 덧붙인 소희의 말에 예은이 손을 내저으며 예의 그 씩씩한 말투로 답했다.

“아뇨, 교수님. 이 브런치 카페가 요즘 엄청 핫플이래서 저 꼭 와보고 싶었거든요. 에그 베네딕트가 끝내준대요.”

새 학기 강의 준비 얘기도 할 겸 소희는 조교 예은을 만났다. 그간 거의 집 밖으로 나가지 않다가 이렇게 멀리까지 나온 건 오랜만이었다.

곧 다가올 봄을 예감하듯 날이 많이 풀렸다. 코트 대신 트위드 재킷을 입었다. 하늘도 청명했다. 군데군데 뜬 흰 구름 사이로 햇살이 넉넉히 비쳤다. 내내 우울하고 답답했던 마음이 조금 트이는 것도 같았다.

핫핑크 색 벽지로 도배되어 있고 가게 이름이 필기체로 적힌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가게였다. 여대생들이 자주 올 법한.

“교수님 저희 저쪽에 앉아요!”

창가 쪽으로 재빨리 달려가 자리를 잡는 예은이 귀엽다는 듯 쳐다보며 소희가 발을 옮겼다. 그때였다. 스치는 테이블에 앉아 있던 여자 둘이 수군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야, 야 저기 임소희 아냐? 쟤 결혼식 취소됐다던데.”

“그래? 어릴 때부터 정해진 남자라 그러지 않았나. 결혼 파투? 그 남자 존나 잘생겼다며.”

“왜 몰라? 그 남자, 구지훈. 걔 쌍둥이잖아. 쟤가 결혼식 직전에 그 쌍둥이 동생이랑 바람나서 난리 났다더라. 그 남자 애까지 임신했다는 소문도 있던데.”

“미친, 진짜? 생긴 거랑 다르게 완전 까졌네. 왜 그랬대? 쌍둥이면 어차피 똑같이 생긴 거 아냐?”

“아니, 그 쌍둥이가 문란한 걸로 유명하다더라, 왜겠냐. 그걸… 잘하나 보지.”

소희의 양 볼이 화끈거렸다. 예은이가 있는 쪽까지 걸어가는데 여기저기서 작은 목소리로 그녀에 대한 뒷담화를 하는 게 느껴졌다. 자꾸 와 부딪히는 시선들이 가시처럼 따갑게 와 박혔다.

“교수님 왜 그러세요? 갑자기 안색이 너무 안 좋아요.”

“아니, 아니야 예은아. 어서 주문하자. 너 먹고픈 걸로 다 시켜.”

신나서 이것저것 메뉴를 고르는 예은 앞에서 소희는 자꾸만 어두워지는 표정을 바로잡으려 애썼다. 죄지은 것 없어. 절대 고개 숙일 필요 없다. 하지만….

며칠 전 아버지가 뉴스를 들이밀며 난리를 치셨을 때도, 소희는 괜찮을 거로 생각해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결혼이 깨진 것은 맞지만 기사 속 사진이나 증거라는 톡 대화도 전부 가짜니까. 게다가 반박 기사도 금방 떴는데…. 역시 사람들은 진실보다는 자극적인 데만 관심이 있는 모양이었다.

나온 음식을 맛있게 먹는 예은에 비해 소희는 거의 한 입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있었다. 자꾸만 힐끔거리는 시선 때문에 물만 마셔도 체할 것 같았다.

정작 밖에 나와 사람들의 반응을 보니 그렇게 가볍게 넘길 일은 아니었던 걸까. 오늘 같은 날 밥을 사달라는 조교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고 외출했던 자신이 조심스럽지 못했던 거다.

“교수님. 그런데요….”

“응?”

“정말이에요?”

예은이 팬케이크 위에 올라가 있던 딸기를 집어 입에 쏙 넣으며 물었다. 호기심이 가득한 눈을 반짝인다.

“뭐가?”

“원래 교수님 약혼자보다 그 쌍둥이 동생이….”

큭. 뭔가를 생각하던 예은이 피식 웃더니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니, 아니에요. 교수님.”

아, 그제야 예은이 뭘 물었던 건지를 깨달았다. 예은도 그 뉴스에 대해 알고 있었구나. 제 밑에 둔 학생 앞이라 괜히 더 부끄러워졌다. 소희가 조용히 팬케이크를 잘라서 입에 한 조각 넣었다.

“그저 친구들이 궁금해하길래. 그럼 그때 학교에 교수님 데리러 왔던 사람, 그럼 그분이 그 동생분이셨던 거죠? 그간 약혼자분은 연구실 한 번도 오신 적 없잖아요.”

“아, 그건 그렇긴 한데….”

“헐 대박. 저 이거 친구들에게 말해도 되죠? 직접 현장을 봤다고 자랑해야지이.”

입 안의 딸기를 마저 오물오물 씹으며 예은이 신나게 어디론가 톡을 보냈다.

소희는 예은을 막으려고 팔을 뻗었다. 예은에게 악의는 없어 보였지만 뉴스 자체가 자신뿐 아니라 지겸과도 연관이 있으니 그 사람에게까지 피해가 가는 것도 걱정이었다.

“예은아, 그 이야기는 너만 알고 있었으면 좋겠구나.”

“앗. 어떡하죠? 이미 단톡에 보냈는데.”

혀를 날름 내밀고 죄송한 척 난처한 표정을 짓는 예은이 평소와는 묘하게 달라 보였다. 원래도 어디로 튈지 모르는 매력이 있는 아이였지만, 이렇게 예의가 없다고 느껴질 정도는 아니었는데. 당황한 소희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그때였다. 냅킨으로 제 입가를 쓱 닦은 예은이 몸을 일으켰다.

“교수님, 그럼 저 이제 가 봐도 될까요?”

“응? 벌써? 다음 학기 강의 얘기는 아직 하지도….”

“아, 저 휴학계 냈어요. 유학 가려고요.”

“…뭐?”

놀라서 소희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

“안 그래도 집에서는 유학 가라고 성화였는데, 교수님이 로열 오메가시니까 제가 그 밑에 있어 보고 싶다고 떼썼던 거거든요.”

예은이 재빨리 핸드백을 챙기며 말했다. 소희가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예은의 얼굴에 비소가 잠시 서렸다 사라졌다.

“그런데 부모님께서 뉴스 보시더니, 구설에 휘말린 교수님 아래 있는 거 불편하다고 하셔서요. 이해해 주실 수 있으시지요?”

“예은아, 그래도 이렇게 의논도 없이. 학교는 어디로 정했고?”

본래 똑 부러지고 제 할 일은 잘하는 편이었다. 언어학 쪽에 재능이 있어 나중에라도 유학을 권해 주고 싶어 소희도 알아보던 참이었는데.

“그런 거야 저도 알아서 가능해요, 교수님. 그래도 직접 말씀드리는 게 예의라고 생각해서 나온 거예요.”

많은 사람을 곁에 두는 성격이 아닌지라, 소희는 한 사람의 인연도 가벼이 여기지 않아 왔다. 그런데 자신이 아끼던 학생이자 후배가 이렇게 행동하니, 이제는 실망스럽고 화가 났다.

“박예은.”

돌아나가려던 예은이 멈춰 서 고개를 돌렸다.

“네?”

“다시 앉으렴.”

“저요?”

“여기 너 말고 또 누가 또 있니.”

소리 높이지 않았지만 묘한 힘이 실린 말투에 예은이 저도 모르게 자리에 다시 앉았다. 대부분 권위를 내세우는 교수들 사이에서 소희는 단연 돋보이는 사람이었다. 다정하고 때론 친언니 같기도 한 그녀 아래 있다는 게 예은에게 자랑인 적도 많았다.

“예은아. 사람들이 내 소문에 대해 떠드는 건, 신경 쓰지 않아. 모르고들 하는 소리니까. 하지만 넌… 물었어야지.”

“…네?”

나긋하지만 힘 있는 질책에 방금 전까지만 해도 대책 없이 해맑던 예은의 목소리가 조금 떨려 나왔다.

“함께한 시간이 있잖아. 소문만으로 속단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아, 교수님 저, 전 그렇다기보다는.”

소희가 예은의 말을 끊으며 사뭇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

“예은아.”

“네….”

“대학원 입학 면접 때, 네가 했던 말 인상 깊었었어.”

처음 면접에서 예은을 마주했을 때 왜 문학을 공부하고 싶냐는 소희의 질문에 그녀는 답했었다.

절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은 다른 사람에 대한 조금이라도 더 이해하고 싶어서라고.

“어디서 유학을 하든 무엇을 하고 살아가든 네 그 첫 마음,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예은이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먼저 나가도록 해. 나는, 마저 먹고 갈게. 건강 조심하고.”

“죄, 죄송해요. 교수님. 안녕히 계세요….”

주춤하던 예은이 고개를 꾸벅 숙이더니 종종걸음으로 사라졌다. 소희에게 들은 꾸짖음 같지도 않은 꾸짖음 때문일까. 예은은 부끄러움에 두 뺨이 붉어져 있었다.

아버지는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에 어머니는 유명한 피아니스트. 그런 집안에서 곱게 자란 우성 오메가답게 예은은 직설적이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되어야 직성이 풀리는 아이였다. 축 처져서 나가는 예은의 뒷모습을 소희가 쳐다봤다. 입 안이 씁쓸해졌다.

이제 보니 약속장소를 일부러 여기로 바꾼 건 아니었을까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예은이 나가고 난 뒤. 소희는 자기가 한 말을 곱씹어보았다. 조교에게 화를 냈지만 사실은 스스로에게 하는 비난이었는지도 모른다. 직접 묻지도 않고 들은 말로만, 소문으로만 판단한 것은 사실 본인 아니었던가. 다른 사람의 말로만 판단했다. 눈앞에 보이는 걸 믿지 않았다. 구지겸, 그 사람에 대해서. 그것이 못내 소희의 마음에 남아 지금까지도 괴롭히고 있었다.

***

제대로 먹지도 못했는데 벌써 속이 더부룩하고 불편했다. 예은이 간 뒤에도 사람들의 집요한 시선이 소희에게 따라붙었다. 소곤거리던 음성은 예은이 나가니 아예 대놓고 커지고 있었다. 당장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었지만 그러면 뭔가 잘못을 인정하는 기분이 들었다. 어떻게 보면 거짓 뉴스는 아니었다. 지겸과의 일 때문에 지훈과 결혼하지 않게 된 건 사실이니까.

하지만 그녀는 죄인이 아니었다. 지훈을 배신하고 의도적으로 지겸과 방탕하게 군 적도 없다. 그러니까 소희는 일부러 더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접시에 남은 음식을 천천히 씹어 삼켰다. 자신이 주변을 의식하고 낮은 자세를 보일수록 더 허황하고 더러운 말들이 돌 게 뻔하니까.

소스에 적셔진 부드러운 수란마저도 입 안에서 까끌까끌하며 겉돌았다. 그럴수록 더욱 꼭꼭 씹었다. 접시를 깨끗하게 비운 뒤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앞만 바라보며 걸어 나왔다. 결국 카페 화장실에 가서 먹은 걸 전부 토해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정말 아무 일도 없었던 거라면 좋겠다고.

집에 돌아가는 길, 소희는 약국에 들렀다. 소화제를 사서 나오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너무 오랜만에 보는 이름. 유정이었다. 기쁘고 그리운 마음이 반, 묘한 죄책감이 나머지 반을 채웠다. 혹시 뉴스를 보고 연락하는 걸까. 숨을 한번 크게 들이마신 뒤, 소희가 조심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유정아?”

- 소희야. 잘… 지냈어?

서로 떨리는 목소리가 오갔지만, 다행히 유정은 소희의 가장 친한 친구의 모습, 원래 그대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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