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그래서, 구 교수는 어디 가고 왜 너 혼자야.”
“여보.”
싱가포르에서 한국으로 돌아온 뒤로 처음 갖는 가족 식사였다. 엄마는 굳이 올 필요 없다고 더 쉬라고 했지만 소희가 오겠다고 했다. 언제까지고 피할 수만은 없는 일이니까.
엄마는 소희가 온다고 갖가지 음식을 정성껏 준비하셨지만 그 많은 음식이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숟가락으로 국만 몇 번 떠먹다 말았다 반복하고 있으니 엄마가 걱정되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아버지의 질문에 소희는 의외로 담담하게 답했다.
“아버지, 당분간은… 혼자 있을 생각이에요.”
탁. 아버지가 숟가락을 상 위에 신경질적으로 내려놓았다. 그로 인해 순식간에 식탁 위 공기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너는… 도대체가 정신이 있냐? 결혼식도 직전에 파투를 내서 주변 사람들 다 곤란하게 만들어 놓고. 그나마 구 교수도 베논 제약 아들이니까, 내 별말 안 했더니.”
“그 일은 정말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자신 때문에 가족들이 곤란하게 됐던 건 사실이었다. 소희가 고개를 숙였다. 자신도 상처를 입었고, 예상하지 못했던 일들이 반복되어 혼란스러웠지만 그렇다고 주변 사람이 자신 때문에 겪었을 일들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소희는 고개를 똑바로 들었다.
“하지만 당장 다른 누군가와 결혼할 생각 없어요, 아버지.”
소희는 다시 한번 힘주어 말했다. 평소와 다른 딸의 모습에 아버지가 당황스러운지 눈썹을 움찔댔다.
그동안은 아버지가 짜 놓은 삶을 거스를 생각이 없었다. 정해진 듯 결혼하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며 살고 싶다고도 생각했다. 그런 삶이 자신이 바라는 것이라고도 믿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싱가포르에서의 일로 소희는 스스로를 돌아보게 됐다. 오랜 시간 이어져 온 약혼이었다. 결혼이 뭔지도 모르는 나이부터 자신의 남편이 정해져 있었기에 지훈과 만날 때마다 불편하고 불쾌함을 느꼈음에도 그 신호를 무시했다. 결혼하면 나아질 거란 부모님의 말씀을 믿으면서. 어리석었다.
학교에서 교수로서 강의하고 오메가 학생들을 상담할 때는 사회가 규정하는 역할에 너무 얽매이지 말라고 강조했었다. 하기 싫은 결혼을 강요받는 후배들에게는 본인의 목소리를 잃지 말라고 조언도 했고. 그러면서도 정작 자신은 부모님이, 아버지가 정한 틀에서 벗어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주어진 상황에 휩쓸리며 살았다. 지겸과의 일이 있고 나서야 자신이 얼마나 무방비했는지, 제 삶의 주도권을 다른 사람에게 쥐여 주며 살아온 것이 얼마나 한심했는지를 알았다.
무엇보다, 엄마의 말이 그녀에게 충격을 줬다. 만약 지훈과 결혼했다면, 아니 그게 누구라도 이런 상황으로 결혼을 했다면 자신도 엄마처럼 제 삶의 중요한 부분을 포기하고 후회하며 살았을 거다. 그러니까 이제라도 맞춰진 길을 가는 게 아닌, 제 삶의 다른 방향성을 고민해 보고 싶었다.
“일을 전부 망쳐 놓고 아주 뻔뻔하구나.”
“여보, 그게 왜 소희 탓이에요. 젊은 사람들이 만나다가 틀어질 수도 있고 한 거죠. 그리고 소희가 지금은 생각이 없다고 하잖아요.”
엄마도 소희를 두둔했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무리 그동안은 가부장적인 남편의 뜻에 따라왔다지만, 딸을 하나의 주체로 오롯이 존중하지 않는 그의 행동이 못마땅했다.
그러나 늘 가만히 있던 엄마까지 나서서 목소리를 높이자, 소희 아버지가 더 당황했는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결혼이 애들 장난이야? 우리가 아무 베타 집안도 아니고. 그 결혼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당신 정말 몰라서 이래?”
다그치는 목소리에 엄마가 뭔가 더 반박하고 싶어 입술을 달싹였으나 아버지는 틈을 주지 않았다.
“지난번에 보니 구 교수는 소희 너에 대한 생각이 확실한 것 같던데.”
그 말에 소희는 지겸이 제 아버지와 통화했다고 말했던 걸 떠올랐다. 두 사람은 어떤 대화를 나눴을까.
“괜히 도도하게 굴지 말고 네 쪽에서 다시 붙잡아. 그만한 사람 너 또 못 구해.”
“여보.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가만히 둬도 어련히 알아서 할 걸 너무 재촉하지 말아요. 이왕 이렇게 된 거 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당신은 뭘 모르면 가만히 좀 있어. 지금 소희 상황이 그렇게 한가로운지 알아?”
“아버지, 저도 생각해 둔 게 있어요.”
자꾸 엄마를 더 다그치려는 아버지를 막으며 소희가 말했다. 오늘 본가에 온 것은 아버지께 그녀의 계획을 얘기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연구년을 당겨서 갈 생각이에요 아버지. 어제 인문대 학장님께 연락드렸는데 가능할 것 같다고 하셨어요. 미국, 다녀올까 해요. 공부도 더 하고요.”
보통 대학에서 정교수로 6년 이상 근속하면 휴가처럼 연구년이 주어지는데, 재림대에서는 사정에 따라 1~2년 정도는 조정할 수 있었다. 애초에 미국에서 박사과정을 공부하고 싶어 하는 소희를 막았던 것도 아버지였다. 언제든 지훈과 결혼하려면 한국에 있어야 했으니까.
소희의 계획을 들은 아버지가 세상 한심하다는 표정과 말투로 제 딸을 다그쳤다.
“속 편한 소리 하는구나. 연구년? 안 그래도 서 학장이 연락 왔었다. 어림없다고 했어.”
소희와 어머니의 시선이 모두 아버지를 향했다. 그녀의 눈동자가 조금 흔들렸다. 바로 승낙해 줄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단칼에 거절할 줄은 몰랐다.
“아무리 우리가 부모라도, 소희 이제 어른이에요. 자기 인생은 자기가 결정하게 둬야죠.”
엄마가 평소보다 강하게 나오자 더 불쾌해진 아버지가 얼굴을 구겼다.
“자기 인생? 임소희. 네 엄마 생각에 동요하지도, 착각하지도 마라. 내 딸로 그렇게 잘나게 태어나 평생 누리고 살았으면 보답을 해야지.”
소희가 입 안쪽 여린 살을 꾹꾹 깨물었다. 자라는 내내 그녀에게 주입하듯 아버지가 했던 이야기들이 차례로 떠올라 다시 그녀를 압박했다.
“누누이 말하지 않았느냐. 능력이니 뭐니 하지만 결국 오메가는 알파의 짝이 되기 위해 태어나는 존재라고!”
로열 오메가로서 로열 알파를 만나 아이를 낳고 우수한 혈통을 다시 대대로 이어지게끔 하는 것. 그녀의 사명은, 모든 오메가의 쓸모는 거기에 있다던 아버지의 가치관.
“공부를 더 하든 말든, 결혼해서 애 낳고 한다면 말리지 않으마. 물론 그때는 네 남편이 허락해야겠지만 말이다.”
소희는 내내 들어왔던 아버지의 훈계에 반기를 들었다.
“아버지. 아무리 더 말씀하셔도 저는 지금 결혼 생각, 정말 없어요. 제 인생이에요.”
소희는 이 일을 그녀 삶의 새로운 전환점으로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스스로 정말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앞으로 어떻게 살지 진지하게 고민해 보고 싶었다. 자신에게 정작 무엇이 중요한 지도 제대로 생각해 보지 못하고 살았다. 그렇기에 더더욱 아버지나 주변에 흔들리지 않고 오롯이 자신을 위한 결정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단단한 소희의 말과 생각이 아버지를 더욱 건드린 모양이었다.
“상황파악을 제대로 못 하는구나. 감히 어디서 고개를 빳빳하게 들어? 구 교수랑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다만, 다시 가서 바짓가랑이라도 붙잡아.”
“아버지.”
“그러니까 누가 그렇게 함부로 몸을 굴리라고 했냐. 구 교수한테 빌든 매달리든 붙잡고 절대 놓치지 마라. 안 그러면 이제 네 인생 끝이야.”
“여보, 말이 너무 심….”
탁.
아버지가 휴대폰으로 인터넷 기사 하나를 띄어 식탁 위로 던졌다. 기사 헤드라인에 엄마와 소희의 눈길이 자연스레 닿았다.
“이래도 나한테 심하다고 할 거냐?”
[세기의 커플이 파혼한 진짜 이유는? *디스토피아 단독 보도- 배덕 커플 사랑의 도피 전격 취재 in Singapore]
“이, 이게 무슨…!”
당황해 목소리가 떨리는 엄마의 옆에서 기사의 내용을 확인하는 소희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
“김 실장님, 그게 대체 무슨 소립니까.”
며칠째 연구실에 틀어박혀 있다시피 했던 지겸이었다.
심장의 통증이 이번 주 들어서부터는 정도가 더 심해져 일상생활에 피해가 갈 정도였다. 다른 활동을 최소화한 지겸은 연구실과 집만을 오갔다. 매일 복용 가능한 최대치의 진통제를 먹었다. 그래도 견디기 어려운 고통의 순간에는 소희를 떠올렸다. 그러면 그나마 죽음 직전에서라도 구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통증을 견디며 일하는 도중 김 실장으로부터 급한 연락을 받았다. 지겸과 소희의 이야기를 악의적으로 다룬 인터넷 기사가 여러 커뮤니티를 통해 빠르게 퍼져가고 있다는 얘기였다.
“이미 국내 포털 사이트는 물론 대부분의 언론사와 협의 끝내지 않았습니까? 작은 인터넷 언론사까지도 전부 섭외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소희와 지훈의 결혼식과 관련된 소식은 메이저 언론사에서도 다룰 정도로 뉴스 가치가 높아서 지겸도 이에 대한 기사를 전부 차단하는 데 꽤 애를 먹었다. 어떤 식으로든 관련 보도를 하지 못하게 막았고, 문제없이 처리했다고 믿고 있었는데 이번 일이 터진 거다.
- 신 기자도 처음 듣는 언론사라는 걸 보면, 정말 최근에 생긴 독립 언론사 같습니다. 심지어 이번 기사가 거의 첫 기사라… 저도 파악 중입니다.
“이번 기사 낸 기자 신상 보내봐요. 언론사 정보도 함께.”
신생 언론사에서 이런 특종을 어떻게 냈을까. 기사는 지겸과 소희에게 불리하도록 악의적으로 편집돼 있었다. 그 기사에 따르면 두 사람은 오래전부터 지훈을 속이고 관계를 맺어 왔으며, 싱가포르에서는 대담하게 애정행각을 벌였다고 되어 있었다.
자료로 첨부된 톡 메시지나 모자이크 처리된 사진 모두 거짓으로 꾸며진 것이었다. 소희와 지겸과 체격, 외모 등이 비슷한 남녀를 데려다 찍은 것으로 유추되는 사진은 민망할 정도로 적나라한 애정 행위를 담고 있었다. 철저하게 소희와 지겸을 음해하긴 위해 타겟팅된 가십 기사였다.
이런 기사를 내서 이득을 볼 사람이 누가 있을까. 재림재단 쪽은 물론이고 아버지, 구 회장에게도 굳이 이럴 이유가 없었다. 그렇다면 이런 짓을 벌일 사람은 딱 한 명뿐이다. 구지훈. 꼭 이렇게 앞뒤 상황 생각도 못하고 일부터 벌이지. 나이가 들어도 어째 바뀌는 게 하나도 없다. 지겸이 낮게 욕을 짓씹으며 제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그때 김 실장으로부터 기사를 낸 언론사와 사주 관련 정보, 기자의 신상명세까지 모두 전달됐다.
조금 확인해 본 지겸은 금세 알 수 있었다. 지훈의 짓이 분명했다. 오랫동안 지훈과 가깝게 지내는 것으로 아는 한 연예 기획사 사장의 동생이 그 신생 언론사의 사주로 등록돼 있었다.
아버지를 옥죄는 것으로 지훈도 컨트롤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게 패착의 원인이었다. 구지훈이 이렇게 제멋대로 날뛸 수 있는 인간임을 잠시 잊었다.
“김 실장님, 베논 제약 홍보실 통해 공식적으로 반박 자료 내고. 우리에게 협조하기로 했던 언론사들 통해 사실무근 기사 뿌립시다. 기존 가십 기사 눈에 띄지도 않게 도배하세요. 그리고 구지훈 관련 찌라시, 오늘부터 풀어요. 실상은 그 인간 탓인데 이걸 가리기 위해 소희에게 음해성 공격 퍼부은 거라고까지.”
- 알겠습니다, 도련님. 그런데 커뮤니티에 퍼지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이건 어떻게 해야 할지….
“아르바이트생 고용해서 댓글 등에서 이상한 분위기 조성되지 않게 잘 막고, 필요한 경우 악성 댓글 단 전원 고소합니다. 법적 처벌 불사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 네, 말씀하십시오.
“반박 기사와 찌라시 기사 제대로 나갔는지 확인하고, 바로 덮을 수 있는 새로운 기사 보도시켜요. 그, 우리가 엠바고(*일정한 시간까지 보도를 금지함) 걸어놓은 기사 중에 자극적인 것만 몇 개 골라서. 국회의원 성추행 사건이랑 아이돌 가수 마약 사건 같은 걸로.”
툭, 툭. 업무지시를 마친 지겸이 휴대폰에 지훈의 번호를 띄어놓고 한참을 고민했다. 구지훈 이 자식을 어떻게 한다. 이걸로 소희가 조금이라도 다친다면, 자신은 도저히 참지 못하리라.
때마침 심장을 죄는 통증이 지겸을 다시 찾아왔다. 그러나 지훈을 향한 형형한 분노 때문인지 더는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