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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훈과 자주 오던 호텔 스위트룸 앞. 유정은 자꾸만 땀이 고여 드는 손바닥을 치마에 비벼 닦았다. 입 안이 바짝 말랐다.
조금 전 전화통화에서, 지훈은 유정의 물음에 당황한 듯 보이더니 곧 시치미를 뗐다.
- 무슨 얘긴지 잘 모르겠는데. 갑자기 왜 이래?
지훈은 태연했다. 처음부터 바로 인정할 거라고 기대는 하지도 않았지만, 이렇게 천연덕스럽게 대꾸하니 유정은 더욱 허무해졌다. 그녀는 괜스레 아직은 평평한 제 아랫배를 쓰다듬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지훈에게 직접 만나자고 했다. 얼굴을 보고 따지면 설마 끝까지 거짓말하진 않겠지 하는 생각에서였다.
- 아, 오늘 좋지. 안 그래도 요 며칠 내가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아서. 늘 가던 호텔로 와.
호텔이라니. 조금도 그런 곳에 지훈과 함께 있고 싶지 않았다. 약속장소를 바꾸려 했는데 지훈은 유정의 말을 듣지도 않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전혀 변치 않은 남자의 이기적인 태도에 유정은 울고 싶어졌다. 하지만 입술을 꽉 깨물고 참았다. 이제 자신이 홑몸도 아니고. 더 단단해질 필요가 있다.
똑똑.
“어! 들어와.”
지훈이 장기 투숙 중인 S 호텔의 스위트룸. 여자들과 밤을 보내기 위한 공간으로, 유정도 한두 번 와본 게 아니었다. 이 문 앞에 서서 긴장하고 설렜던 시절도 있었는데, 지금은 마치 지옥문 앞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달칵. 목욕가운만 걸친 지훈이 문을 열었다. 이미 혼자 술을 좀 마셨는지 눈가가 붉었다.
“기다리면서 먼저 좀 마셨어. 내내 기분 더러웠는데 오늘은 좀 좋은 일이 있어서.”
혼자 들떠서 중얼거리는 지훈 앞에, 유정은 얼음처럼 차갑게 굳어 서 있었다.
“먼저 씻을래? 아니면 한판 하고 씻어도 되고. …신유정, 뭐 해. 안 들어와?”
지훈이 문가에 서서 미동조차 하지 않는 유정을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보며 물었다.
“아까 전화로 얘기하려 했는데 듣질 않고 끊어버려서요. 그냥 여기 서서 얘기할게요. 확인할 게 있어서 왔을 뿐이에요.”
지훈이 눈썹 한쪽을 치켜떴다.
“너랑 나랑 대화 나눌 게 뭐가 있어. 몸의 대화면 몰라도. 안 그래?”
지훈이 제 입술을 핥으며 천천히 유정에게 다가왔다. 베타인 유정이 페로몬은 느낄 수 없었지만, 확실히 레스토랑에서의 지겸과 지훈의 분위기가 사뭇 다름을 알 수 있었다. 유정이 긴장하며 입고 있던 코트 앞쪽을 손으로 꽉 쥐어 여몄다.
하. 지훈이 그런 유정의 태도가 우습다는 듯 얼굴 한쪽을 일그러뜨렸다. 그의 입가에 비소가 떠올랐다.
“재미없게 왜 이래, 신유정. 이제 와 질렸다, 뭐 이런 건가?”
이제 유정의 눈앞까지 바짝 다가온 지훈이 유정의 뒷 머리카락을 세게 움켜쥐었다.
“하읏!”
그녀의 입술이 순식간에 지훈에게 먹혀 들었다.
“흡, 읍, 으읍, 아읍! 싫, 흐.”
그에게서 몸을 빼내려고 유정이 노력했으나 그녀의 머리를 틀어쥔 남자의 힘은 더 거세지기만 했다. 지훈은 유정을 문까지 밀어붙이고는 게걸스럽게 혀를 밀어 넣고 빨아댔다. 그의 손이 유정의 치마 속을 비집고 들어와 허벅지를 매만졌을 때, 유정은 제 입 속에 들어와 있는 남자의 혀를 세게 깨물어버렸다.
“아!”
헉, 헉…. 유정이 숨을 몰아쉬며 손등으로 제 입술에 남아 있는 그의 침을 마구 비벼 닦아냈다. 불쾌하고 소름이 쭈뼛쭈뼛 돋았다. 끔찍했다.
“씨발년이! 베타 주제에 좀 상대해 주니까 돌았어?”
지훈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불길한 무언가를 예감한 유정이 본능적으로 제 아랫배를 감쌌다. 지훈이 입고 있던 가운의 허리끈을 풀어버렸다.
“오, 오지 마요.”
“하아. 진짜 요즘 안 그래도 죄다 심기를 거스르는데. 너까지 이러면 내가… 기분이 좆같잖아…. 어?”
“시, 싫어. 제발… 그만. 히익!”
유정의 몸이 순식간에 들렸다. 지훈이 유정을 둘러업고 들어가 침대에 내던지듯 내려놓았다. 놀란 유정이 그를 피하고자 침대 헤드 쪽으로 기어갔다.
“지랄하네.”
유정의 발목이 그에게 잡혀 주르륵 끌어내려 갔다. 그 탓에 구두 한 짝이 벗겨져 땅으로 떨어졌다.
“하지 마! 하지 말라고! 흑, 헉….”
유정이 발버둥을 쳐도 지훈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정작 시작하면 좋아할 거면서 왜 이렇게 번거롭게 굴어.”
유정의 치마가 들쳐 올라가고 동시에 스타킹이 갈기갈기 찢어졌다. 맨살에 와닿는 찬 공기가 공포스러웠다. 깨닫지도 못하는 사이 흐른 눈물이 눈앞을 가렸다. 그녀가 도망가지 못하게 허리를 누른 채 뒤에서 자리 잡는 그가 느껴졌다. 메마른 입구에 남자의 선단이 우악스럽게 비벼졌다.
“그, 그만! 그만해! 흐. 나, 나… 임신했어. 임신했다구요!”
“…뭐?”
지훈은 그제야 동작을 멈췄다. 유정이 그에게서 재빨리 빠져나왔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겨우 옷매무새를 다듬고 남자에게서 최대한 멀리 떨어져 섰다.
“뭐야 너. 딴 놈이 있었어?”
지훈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눈앞에서 사탕을 빼앗긴 어린아이처럼 억울한 표정이었다.
유정은 대답하지 못하고 숨만 겨우 몰아쉬었다. 조금 전 일의 여파로 눈물이 멈추질 않아 곤혹스러웠다. 유정은 연신 흐른 눈물을 닦아내고 더 나오지 않게 제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침대에 털썩 앉아 그런 유정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지훈이 뭔가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근데 그게… 왜?”
“…네?”
유정이 설마 잘못 들었겠지, 하는 마음으로 되물었다.
“위험한 때만 아니면 그냥 섹스해도 상관없잖아. 임신 초기는 지난 거 아냐?”
그악스럽게 덧붙이는 지훈의 몇 마디에 유정의 입이 벌어졌다. 정상적인 인간이 이런 사고가 가능한가. 짐승도 구지훈보다는 낫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콘돔 써줄게. 염증 같은 거 조심해야지.”
이 정도면 그녀를 충분히 배려하고 있다는 식의 말투. 하, 하하…. 유정의 입에서 풍선에서 바람이 빠지는 듯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런 상황에서 웃음도 나오는구나. 너무 어이가 없었다. 겨우 이따위 인간을 좋아해서 몸을 섞고 아기까지 가진 자신이 한심해서 견디기 어려웠다.
유정의 반응이 심상치 않다고 생각한 지훈이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불현듯 물었다.
“너. 설마… 아니지?”
지훈이 급격히 가라앉은 얼굴로 제 앞머리를 연신 쓸어넘겼다. 유정이 여전히 답이 없자 그의 표정이 조금 더 초조하게 바뀌었다.
“왜 답이 없어! 배 속에 그거, 내 애냐고.”
“맞다고 하면요…?”
그, 그거라니. 심지어 자신의 아이를 물건 취급하듯 부르는 지훈을 유정이 노려보며 물었다. 지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니, 너 베타잖아. 대체 알파가 베타를 임신시킬 확률이 얼마나 된다고.”
“아예 불가능한 건 아니죠.”
씨발. 욕을 뇌까리는 남자를 보며 유정은 사실 확인이고 뭐고 이 공간에서 빨리 뛰쳐나가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다. 지훈은 당황했는지 마른세수만 번복하다가 유정을 향해 눈을 가늘게 떴다.
“야, 솔직히 이게 말이 돼? 너 어디 가서 베타 놈이랑 진탕 놀아놓고 나한테 뒤집어씌우려는 거 모를 줄 알아?”
이런 사람에게 뭘 더 이야기할까. 추궁도 그럴 가치가 조금이라도 있을 때나 의지가 생기는 법이다.
“당신 아이가 맞아도 책임지라고 할 생각 없어.”
일순간 조금 풀어지는 지훈의 표정은 유정을 더욱 끝으로 몰았다. 이렇게 되리라는 걸 예상했으면서도 이런 인간을 상대로 조금이나마 기대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러니 솔직히 말해 줘요. 그동안 왜 거짓말했어? 당신 구지겸… 아니잖아.”
하…. 또 그 얘기냐는 듯, 지훈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가 걔든 아니든 너한테 그게 뭐 그렇게 중요해. 생긴 것도 똑같고, 로열 알파고.”
어차피 몸 맞아 섹스나 하는 사이에, 유난도 병이네.
태연하게 덧붙인 말을 듣자마자 유정이 비틀거렸다. 구지훈은 그런 유정을 빤히 보기만 할 뿐 부축하려는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
“그래서, 할 거지?”
오로지 색욕으로만 가득 찬 지훈의 눈동자가 뱀의 것처럼 번뜩였다.
“미친놈….”
“뭐?”
진심이 담겨 있지 않아도 괜찮았다. 겉으로나마 그동안 속여서 미안하다고 말하기를 바랐다. 그녀가 모르는 어떤 숨겨진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믿어보고 싶기도 했다.
생각해 보면 한결같이 이런 남자였는데, 알면서도 좋아하게 된 자신의 잘못이다. 유정은 마음이 가는 걸 스스로도 어쩌지 못했던 과거가 원망스러웠다.
사람이 너무 당황하고 상심하면 화도 나지 않는 건가 보다. 그저 빨리 이 공간을 벗어나고 싶었다. 저 남자와 한마디도 더 말을 섞고 싶지 않아서. 유정은 문 쪽으로 다가갔다.
“가는 거야? 아쉽네.”
벌어진 가운을 여전히 방만하게 풀어헤친 채 침대에 앉아 있는 지훈을 유정이 한번 보고는 몸을 돌렸다. 이게 마지막일 것이다. 아이를 위해서도 차라리 연을 끊는 게 나을 거야.
“신유정.”
돌아보지 말까 잠깐 고민했다. 하지만 차마 그러진 못했다.
“네가 애를 낳든 말든, 내 애든 아니든 관심 없으니까. 그걸로 거치적거리지나 마.”
겨우 버티고 서 있던 두 다리가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누군가 큰 망치로 가슴을 쳐대는 듯한 아픔이었다. 또다시 쏟아질 것 같은 울음을 참으며 유정이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차갑게 대꾸했다.
“그럴 일 절대로 없어요.”
“그럼 다행이고.”
다른 여자라도 부를 심산인지 지훈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문을 열고 나가기 전, 그의 면전에 대고 유정이 마지막 말을 남겼다.
“소희가 당신 같은 남자와 결혼하지 않아서 정말, 정말 다행이에요.”
그리고 유정은 그 날, 그 남자를 좋아했던 자신과의 마음에도 완전한 이별을 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