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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처음 만난 사람처럼 인사하시기로 한 거예요? 왜?”
유정의 말이 뾰족하게 나갔다. 이 정도도 참은 거다. 제 앞에 서 있는 남자를 보자마자 몇 달 동안 쌓아뒀던 감정들이 폭발했다. 할 수만 있다면 그녀를 앞에 두고도 어떠한 감정의 흔들림도 없어 보이는 저 얼굴을 한 대 치고만 싶었다. 원망, 배신감, 증오, 미움. 그리고 어이없게도 그리움 같은 것들. 분명 한 번도 그녀를 사랑한다고 한 적 없었고, 철저하게 이기적으로 굴었던 남자인데 자신은 바보같이 뭘 기대했던 걸까.
“아, 기분 상했다면 미안해요. 그래도 정말 오랜만이니까.”
경계를 확실히 나누며 예의를 차리는 듯한 지겸의 대답에 유정의 표정이 더 일그러졌다.
어딘지 모르게 차가워지는 유정의 표정이 지겸의 눈에 띄었다. 유정의 가족하고야 어린 시절 가족 모임에서 몇 번 마주친 적이 있었다. 그러니까 엄밀히 말하면 처음 보는 건 아니었다. 지겸은 유정이 기자로 일하고 있어 꽤 예민한 편인가 보다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무엇보다 소희와의 일을 안다면 절대 지겸에게 우호적일 수 없을 거다. 만나준 것만으로도 고마웠다.
“이탈리안 괜찮아요? 유현이 말로는, 요즘 집에서 밥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고 해서 여기로 예약한 건데.”
“메뉴는 뭐든 상관없어요.”
밥 냄새만 맡아도 구역질이 나와서 감자튀김이나 샐러드류만 먹은 지가 벌써 몇 주째였다. 입덧이 시작된 탓이었다.
지겸은 애피타이저부터 후식까지. 일일이 유정이에게 물어서 결정했다. 어색한 일이었다.
유정이 아는 원래의 지겸은 능글스럽게 잘 웃고 특히 여자에게라면 과하다 싶을 정도로 친절했다. 하지만 겉으로만 그럴 뿐. 실제로 다른 사람이 뭘 원하는지, 어떤 걸 하고 싶은지, 기분이 어떤지 같은 건 관심도 없었다. 습관적으로 배려하는 척 행동할 뿐 실제로는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인 남자였다.
지금 앞에 앉아있는 지겸은 여전히 친절했지만 묘하게 달랐다. 특히 차갑다고 느껴질 정도로 무표정에, 한순간도 웃음을 띠지 않았다. 과하게 부드러운 행동도 없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무감한 표정의 이 남자는 오히려 유정의 상태를 가장 신경 쓰고 있었다. 말하자면 예전의 지겸과 완전히 반대랄까.
“저희 오빠와 친하신 줄은 몰랐는데.”
일 년을 넘게 만나면서도 자신의 다른 사생활에 대해서는 일절 얘기하지 않았던 그다. 그런 남자에게 비꼬는 투로 질문을 건넸더니 심상한 답이 돌아온다.
“그동안은 사정이 있어서. 유현이도 일부러 말 안 했을 거예요. 보스턴에서 가까워진 거라. 그때 유현이네 집주인이 갑자기 나가라고 해서 우리 집에서 둘이 3달 정도 같이 살았었지.”
그동안 유현은 지겸의 부탁으로 구 회장과 베논 제약에 대해 많은 걸 파고 다녔다. 두 사람이 친하다는 사실을 주변에서 모르게끔 한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사실 놀랐어요, 오빠 통해 연락해서.”
직접 하지 않아서 이상했어요. 라는 말을 유정은 조금 돌려서 했다. 그보다 아까부터 어색한 게 또 있었다.
“그런데 왜 존댓말을 하는 거죠?”
자신과 달리 지겸은 유정에게 늘 반말을 했었는데.
“아, 소희 친구니까. 예의 없이 굴 수는 없죠.”
유정은 혼란스러웠다. 자신은 소희의 친구니까, 이젠 거리를 두기로 했다는 뜻일까. 둘이 싱가포르까지 다녀와서?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 앞에서 그녀는 포크로 제 앞에 놓인 파스타 면만 헤집었다.
“입에 잘 안 맞나요?”
유정이 하도 음식을 먹지 못하고 있으니 걱정스러운 말이 들려왔다.
“그게 정말 궁금은 해요?”
날 선 말에 남자가 조금 당황하는 게 보였다. 저 정도 반응에 기뻐해야 하는 걸까.
일 년 넘게 자신과 만나고 임신까지 시키고는 이제 와서 자신을 완전히 처음 보는 척 행동하는 남자. 날카롭게 굴어도 별로 반응도 하지 않는 게 더 무시당하는 기분이었다. 게다가 이 모든 게 가장 소중했던 친구 소희 때문이라고 생각하니 더 마음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가슴이 조여들었다. 온몸에 고인 억울함이 눈물이 되어 눈에 맺혔다.
이 남자는 정말 잔인하구나. 자신이 소희의 친구이기 때문에 이러는 거다. 유정에게 직접 연락도 하지 않고 오빠를 통해 만나서는 일관되게 모른 척함으로써 철저히 상기시켜 주려는 거다. 우리의 관계는 이미 끝났다고. 질척거리는 미련 따위 부리지 말라고.
차라리 두 사람이 그동안 만났던 걸 없던 일로 하자고 하거나, 소희와 결혼하게 됐으니 다른 생각하지 말고 이 관계를 완전히 끝내자고 얘기했다면 이보다는 덜 굴욕적이었을 것이다. 그럼 적어도 자신과 함께했던 시간은 인정하는 걸 테니까.
배 속의 아이에 관한 얘기를 꺼내 보기도 전에 유정은 그녀 자신뿐 아니라 그와 보냈던 시간조차 부정당해 버렸다. 속이 다시 메슥거렸다. 한입이라도 더 먹으면 이 자리에서 바로 토할 것만 같아서 유정은 포크를 조용히 내려놓았다. 그리고 영영 하고 싶지 않았던 질문을 겨우 꺼냈다.
“그럼 오늘은, 소희 때문에 보자고 하신 거네요.”
눈물이 줄줄 흘러내릴 것 같아서 유정이 제 입술 한 쪽을 깨물며 참았다.
“다 먹고 얘기해도 되는데.”
거의 손도 대지 않은 유정의 파스타 접시를 바라보며 지겸이 덧붙였다. 유정의 입에서 대답 대신 한숨이 나왔다. 알고 보니 이 남자 연기도 잘했네. 정작 신경 써야 하는 건 거들떠보지도 않고 있으면서.
“그냥 지금 해요. 별로 시간 끌고 싶지 않아요.”
“그래요. 안 그래도 바쁜 시간 뺏어 미안했는데… 오늘 보자고 했던 건.”
지겸은 내내 소희의 상태가 궁금하고 걱정스러웠다. 김 실장이 음식을 전달하러 가끔 들르지만 정말 괜찮은지, 별일은 없었는지. 자신이 함께 있어 줄 수 없으니까 누군가 그녀 곁에 있어 주면 좋을 텐데, 소희의 부모가 그 역할을 제대로 해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래서 유정에게 부탁하려 했다.
“잠깐. 지금 그거, 설마 그거 먹은 거예요?”
지겸이 본론을 꺼내려는 순간, 유정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의 앞에 놓인 접시를 쳐다봤다.
“응? 무슨.”
지겸이 시킨 오일 파스타에는 조개와 함께 호두와 아몬드 같은 견과류가 잔뜩 뿌려져 있었다.
“아몬드…. 지금 아몬드 먹은 거 아니에요? 당신 알레르기 있잖아! 제대로 보지도 않고 그냥 막 먹으면 어떻게 해요?”
지겸은 무슨 소리냐는 듯 보란 듯이 포크로 아몬드 한 개를 찍어 입에 넣고 천천히 씹었다. 그의 입 속에서 오독오독 소리가 날 때마다 유정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분명… 견과류는 건드리지도 못하던 사람이었는데.
“내가? 나 알레르기 없는데.”
여전히 놀란 표정의 유정을 물끄러미 마주 보던 지겸이 그제야 뭔가 떠올랐다는 듯 덧붙였다.
“아, 형. 알레르기는 구지훈이 있죠. 견과류 알레르기. 호두도 못 먹었던 것 같고. 어릴 때 호흡곤란 증상이 와서 병원에 실려 갔던 적도 있으니까.”
유정의 표정이 점점 굳었다.
“그런데 유정 씨, 우리 형이랑 아는 사이였나?”
지겸이 식기를 내려놓고 천천히 팔짱을 꼈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뭔가 이상하다고는 생각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유정의 눈빛에서 복잡한 감정이 읽혔으니까. 아무리 소희의 친구로서 자신에게 반감을 품고 있다고 해도, 저런 슬픈 눈빛을 하고 쳐다보기는 쉽지 않다. 단순히 화를 내면 냈지.
“혀, 형이라면….”
유정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나 쌍둥이인 거 알지 않나. 내가 동생이고, 형이 구지훈. 베논 제약 전무.”
“소희 약혼자였던, 아. 그러니까.”
“맞아요. 이제 더는 아니지만.”
“그럼 그동안… 내가… 아. 그럼 그건 당신이… 아니라. 아… 흑.”
당황스럽게도 그 순간 유정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오랫동안 꾹꾹 눌러 담았던 슬픔이었다. 오늘 이 레스토랑에 지겸이 들어온 순간부터 뭔가 이상하다고는 생각했다. 똑같이 생긴 사람이 앞에 앉아 있는데, 낯선 기분.
이제야 그간 어떻게 상황이 흘러온 것인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건… 정말 상상조차 해본 적 없었다. 깨달은 순간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가 눈물로 터져 나왔다. 그동안 유정이 지겸이라고 생각하고 만났던 남자는 지겸이 아니었던 거다. 눈앞의 남자가 진짜고, 유정이 만났던 사람은 아마도… 구지훈. 소희의 약혼자.
지겸이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유정에게 내밀고는 시선을 창가로 돌렸다. 아무것도 묻지 않는 그의 배려에서 다시 한번 사실을 확인을 받은 것 같았다. 유정은 그렇게 한참을 울었다. 그 울음소리가 잦아들 때까지 지겸은 조용히 기다렸다.
사실 레스토랑에 도착했을 때 그는 우연히 유정이의 손에 초음파 사진이 들려 있는 걸 보았다. 유현의 말에 따르면 최근 들어 동생이 말도 줄고 컨디션도 줄곧 좋지 않았다고 했다. 식사도 제대로 하는 걸 못 봤다고. 그 사진이 유정의 것이 맞다면 모든 증상이 설명됐다. 그리고 그녀의 반응을 보니 아마도 아이의 아빠는… 나쁜 새끼. 구지훈은 자신을 사칭해서 대체 얼마나 많은 여자를 만나고 또 상처입히고 다닌 것인지.
“알고 계시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소희에게 아주 큰 잘못을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소희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많이 지쳐 있을 거예요.”
지겸의 말에 유정이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봤다. 이제야 알았다. 아까부터 이 남자의 눈동자에 서려 있던 것. 엄청난 자책의 감정과 후회.
“오늘 보자고 했던 건 사실 부탁드리고 싶어서였습니다. 유정 씨가 소희의 가장 친한 친구라는 걸 알고 있어서. 하지만… 유정 씨는 유정 씨 자신 먼저 돌볼 필요가 있겠네요. 내가 너무 실례한 것 같습니다.”
“아, 아니에요. 저야말로. 아무것도 몰랐어요. 그래서 너무, 너무 놀라서.”
아직 눈물기가 가득한 유정에게 지겸이 물었다.
“혹시 소희가… 당신이 형을 만났던 것을. 그러니까, 저를 만났던 것으로 알고 있나요?”
그제야 지겸도 떠오르는 장면들이 있었다. 소희가 유정에 대해서 물어보려다 말았던 순간들. 소희가 지겸을 섹스에 미친 문란한 사람으로 생각한다는 걸 알았을 때, 그는 단순히 그녀가 여기저기 떠도는 소문을 들었을 거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유정과 지겸이 사귀는 사이라고 오해하고 있었다면, 소희가 그토록 자신을 끔찍해했던 게 당연했다. 그런 것도 모르고, 소희의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 들어있는지 더 들어볼 생각도 하지 않았던 멍청한 자신이 후회스러웠다.
“네… 소희도 제가 당신을… 만난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랬…군요.”
유정이 바라본 지겸의 눈가가 좀 더 충혈되어 갔다. 후회와 상처가 가득한 얼굴. 어딘가 그 남자의 모습에 저 자신이 겹쳐 보였다.
“유정 씨.”
“네?”
“형과 관련해서 무엇이든.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세요. 내 번호 남길 테니. 그리고… 아닙니다. 건강 조심해요.”
남자의 가지런하고 두꺼운 눈썹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유정을 향해 웃어주거나 다정한 표정을 지어준 건 아니었지만, 어딘가 따뜻한 기운이 돌았다. 좋은 사람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힘들어 보이는 자신에게 차마 말을 덧붙이지 못하는 지겸을 알 것 같아서. 유정이 먼저 입을 열었다.
“소희는 제가 잘 챙길게요…. 너무, 걱정 마세요.”
“…고맙습니다.”
지겸이 먼저 일어섰다.
유정은 한참을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손에 쥔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기를 수십 분. 드디어 뭔가를 결심한 표정으로 유정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조금 가더니 곧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누구야? 신유정? 왜 이렇게 오랜만에 연락했어, 그러고 보니 오늘 목요일이었던….”
“구지훈 전무님, 맞나요?”
수화기 너머 주춤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유정의 입 안이 썼다.
“당신이 구지훈 전무, 맞냐고.”
거짓말의 거짓말. 지겸, 아니 지훈은 유정의 질문에 부정하지 않음으로써 긍정이라고 답해 주고 있었다. 유정의 세상이 조금 더 뒤틀려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