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신부강탈-54화 (54/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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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희는 집 앞 과일가게에서 딸기를 한 팩 샀다. 오랜만의 외출이었다. 싱가포르에서 승현에게 당했던 일은 그녀도 모르게 영향을 미쳐서, 낯선 사람을 맞닥뜨리는 게 예전보다 조금 힘들었다. 게다가 김 실장이 계속 가져다주는 음식으로도 먹을 건 충분해서 특별히 장을 보거나 외출할 필요성을 못 느꼈다.

그렇게 내내 집에만 있다가 너무 답답해서 바람이나 잠시 쏘일 겸 나온 참이다. 목도리를 깜빡하고 아이보리 색 코트만 입어 걱정이었는데, 곧 봄이 올 것을 예감하듯 날씨가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간만에 나와 보니, 과일가게 옆에 처음 보는 카페가 생겨 있었다. 언제 오픈한 거지. 민트색 문부터 타원형의 창문까지 귀여운 외관에 소희의 마음이 동했다. 챠랑. 문을 열자 맑은 종소리가 울렸다. 계속 가라앉았던 마음 한구석이 조금 어루만져지는 기분이었다.

“뭐로 드시겠어요?”

벽 한쪽에 붙은 메뉴를 유심히 보다가 소희가 답했다.

“따뜻한 아메리카노요.”

“네, 2,500원입니다.”

“아. 저기….”

아르바이트생이 소희에게 건네받은 카드로 계산을 하려다 말고 그녀를 다시 봤다.

“샷 하나, 추가해 주세요.”

카페 구석, 짙은 초록색 벨벳 의자에 앉아서 소희는 제 앞에 놓인 분홍색 머그잔을 노려봤다. 표면에 살짝 거품이 일어난 검은 액체에선 잘 볶은 아몬드 향이 고소하게 풍겼다.

‘샷을 두 개나 더… 너무 안 써요?’

‘전혀. 향이 짙어지잖아. 정신도 바짝 들고.’

‘그게 뭐야….’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자 지겸이 재밌다는 듯 쿠쿡 웃음을 터드렸었다.

‘넌 커피를 그렇게 마실 거면 그냥 우유를 데워달라고 해. 아기네, 아기야.’

그는 소희 입술에 묻은 우유 거품을 손끝으로 부드럽게 닦아서 제 입속에 넣어 빨았다.

‘다네.’

‘뭐, 뭐 하는 거예요!’

당황해서 빨개진 자신을 보고 구지겸, 그 남자는 어떤 표정을 지었던가.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자신을 볼 때면 유난히 부드럽게 휘어지던 눈썹이나 눈매가 떠오른다. 이 짙은 커피 향과 함께.

별로 마셔본 적도 없는 아메리카노에 샷까지 추가하고, 소희는 어쩔 줄 몰라 입도 못 대고 있었다. 자신이 대체 왜 이걸 시켰는지도 이해가 안 갔다. 바보 같아. 우유라도 추가로 달라고 하려고 자리에서 몸을 살짝 일으키는데, 카페 안에 흐르던 음악이 바뀌었다. 감미로운 여자의 목소리로 시작되는 재즈곡이었다.

Heaven, I’m in heaven…. (천국, 나는 지금 천국에 있어요….)

아. 다리가 풀려서 소희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귀에 너무도 익은 곡이었다.

‘앗 아파요. 그만 좀 깨물….’

‘조금만 참아. 씹어서 삼켜버리고 싶은 걸 나도 참는 중이니까. 응?’

뺨, 코끝, 턱, 목덜미, 어깨, 윗가슴, 손목…. 그는 제 입술이 닿는 곳마다 소희 몸 여기저기를 닥치는 대로 깨물어댔다. 간지러운 소희가 새 된 비명을 지르면 오히려 더 세게 물어버리곤 했다. 낮인지 밤인지도 기억나지 않아. 그저 하얀 침대 위에서 그와 엉켜 웃고 신음했을 때, 그가 언제 틀어둔 것인지 귓가를 휘감던 노래 중 하나.

Oh, I love to climb a mountain

And to reach the highest peak.

But it doesn’t thrill me half as much

As dancing cheek to cheek….

(오, 나는 등산을 즐겨요. 특히 최정상의 봉우리에 닿는걸요. 하지만 그런 것조차 날 반도 떨리게 하진 못해요. 당신과 뺨을 맞대고 춤을 추는 것보다는….)

투둑. 그녀가 뭘 어떻게 할 새도 없었다. 깨닫기도 전에 소희의 뺨을 타고 눈물방울이 흘러내렸다. 소희가 얼른 제 손등으로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미친 게 분명해.

“잘 마셨습니다.”

더 이상 그 카페에 가만히 앉아 흐르는 노래를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소희는 황급히 짐을 챙겨 나왔다. 챠랑, 조금 전에는 정겨웠던 종소리가 이제는 심장을 발끝까지 쿵 떨어뜨린다.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한 독하고 짙은 커피 향만 그녀가 떠난 자리에 덩그러니 남았다.

팔을 감싸 안고 집까지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집을 나설 땐 포근해졌다고 생각했던 날씨가 그새 바뀐 것인지 옷을 뚫고 찬 기운이 들이닥쳤다. 서늘한 바람에 몸이 바들바들 떨리기까지 했다. 자연스럽게 두 손으로 양팔을 감쌌다.

소희는 난처했다. 싱가포르에서 돌아온 이후 구지겸, 그 남자에 대한 생각이 소희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책을 읽다가, 밥을 먹다가, 방금처럼 음악을 듣다가. 심지어 양치질하려고 거울 앞에 서기만 해도 자신을 뒤에서 끌어안고 대신 이를 닦아주던 남자의 장난스러운 미소가 떠오른다. 사람이 사람에게 물들어버린다는 게 이런 걸까. 시간이 좀 더 흐르면, 사라진 각인처럼 그 사람의 목소리도 표정도 잊힐까.

“어. 그 사람 냄새….”

집 앞 주차장을 스치는데 낯익은 페로몬이 느껴졌다. 다른 사람의 것일 리가 없다. 이전에는 심지어 지훈의 것이라고 착각했던 페로몬이지만 이젠 누구보다 그녀 자신이 제일 잘 안다. 소희가 조금 두리번거렸으나 지겸은 보이지 않았다. 언젠가 밤늦은 시간, 지겸이 아파트 앞 벤치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던 게 떠올랐다. 혹시…?

소희가 주차장을 재빨리 지나 입구 쪽 벤치까지 갔다. 심장박동이 빨라지는 걸 느꼈다. 하지만 그곳에도 그는 없었다. 그래, 그럴 리가 없어. 바보같이 착각이나 하고. 스스로를 탓하며 올라왔는데 현관문 앞에 김 실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김 실장님…?”

“잘 지내셨습니까.”

“어쩐 일로 오셨어요. 며칠 전에 주고 가신 음식 아직 많이 남았는데. 이제는 정말 이렇게까지 안 하셔도 되어요.”

“아, 그래도 받아주셔야 합니다. 안 그러면 제가 곤란해집니다.”

김 실장이 예의 사람 좋은 미소를 부드럽게 지었다. 난처해하는 소희의 손에 그가 작은 쇼핑백을 건넸다.

“이걸 전달하라고 하셔서.”

“아… 감사합니다.”

“뭐든 필요한 것 생기시면 알려주세요. 이젠 그게 제 일이기도 합니다.”

“아니에요, 이미 충분해요. 혹시 잠깐 들어오실래요? 밖에 추운데 따뜻한 차 한잔 드릴게요.”

“아닙니다. 출근하던 길이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네, 조심히 가세요!”

소희는 꾸벅 인사를 하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파스텔 색조의 쇼핑백에는 ‘Lily of the Valley’라는 상호와 작은 은방울꽃 한 송이가 그려져 있었다. 달콤한 냄새가 나는 게 초콜릿이 든 것 같았다. 박스를 꺼내어 식탁 위에 놓는데, 그녀의 코끝에 다시 한번 익숙한 체향이 스친다. 조금 전 집 앞에서도 그렇고, 이제는 초콜릿에까지. 그렇다면…!

뭘 더 생각할 새도 없이 소희가 현관문 밖으로 뛰쳐나갔다. 엘리베이터가 올라오길 기다리며 애가 탔다. 하필이면 지하 2층에 머문 숫자가 바뀌지 않았다.

주차장에 있었던 거다. 아까 느낀 체향은 그의 것이 맞았다. 구지겸, 그 사람이 지금 그녀의 집 앞에 와 있다. 더 이상 만나지 않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 같은 건 할 새도 없었다. 그녀도 모르게 이성보다 행동이 앞섰다.

소희가 숨을 몰아쉬며 주차장 앞에 섰다. 뛰어서인지 다른 것 때문인지 심장이 지나치게 빨리 뛰었다. 소희가 눈으로 주차된 차들을 빠르게 훑었지만 낯익은 차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이미 이곳을 떠난 것 같았다.

숨이 다시 차올랐다. 몸을 엘 것 같이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소희의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

유정은 약속 시각보다 30분이나 일찍 도착했다.

음식은 일행이 오면 시킨다고 말하고 간단히 디카페인 커피만 주문했다. 긴장해서인지 자꾸 목이 탔다. 몇 모금 마셨을 뿐인데 커피가 반도 남지 않았다. 며칠 전 오빠 유현을 통해 지겸이 자신과 만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전달받았을 때 너무 당황스러웠다. 자신에게 직접 전화하면 될 것을 왜 오빠를 통하는지가 특히 이상했다. 지금 그녀의 상황이 일일이 시시비비를 따질 때는 아니었지만.

애초에 오빠와 지겸이 서로 아는 사이인 줄도, 지겸과 소희가 한국으로 돌아온 것도 몰랐었다. 물론 특파원으로 2년 동안 미국 워싱턴에 나가 있었던 오빠는 지겸과 제 동생이 무슨 관계인지는 몰랐을 것이다.

그때였다. 소희의 문자였다. 소희는 유정이 연락을 거부한 이후로 이렇게 가끔 연락을 해 왔다. 안부를 물을 때도 있고, 제발 연락해 달라고 빌기도 했다. 하지만 유정은 일관적으로 그녀의 연락을 무시했다.

소희가 지겸과 함께 싱가포르에 갔다는 소식은 엄마를 통해 전달받았다. 이미 엄마는 소희의 엄마로부터 연락을 받고 매우 충격을 받은 듯했다. 그건 그녀 또한 마찬가지였다. 자신도 소희의 여행 상대는 당연히 약혼자인 지훈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심지어 소희는 자신과 지겸의 사이를 알고 있지 않은가.

믿기지 않았지만 무슨 일인지 알아보기 위해 소희에게 통화를 시도했었다. 그러나 친구의 휴대폰은 줄곧 꺼져 있었다. 그래도 유정은 소희를 믿었다. 엄마가 잘못 아신 거겠지. 그것도 아니라면 다른 무언가가 있는 걸 거야. 그러면서도 점차 유정의 생각은 불안정해져만 갔다.

소희는 내내 연락이 없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들은 건, 지훈과 소희의 결혼식이 취소됐다는 것. 자세한 상황은 모르지만, 여기에 지겸이 관련이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를 듣고 유정은 며칠 밤을 뜬눈으로 지새웠다. 그리고 마침내 두 사람이 결혼할 것 같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날, 소희에게 연락이 왔다. 그토록 기다리던 친구의 연락이었다. 하지만 유정은 차마 받을 수 없었다.

아직 그 사람이 올 때까지 시간이 있다. 유정은 핸드백에서 조심스럽게 산모 수첩을 꺼냈다. 그리고 수첩에 끼워둔 초음파 사진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아무도 몰라도 아기는 유정의 안에서 무럭무럭 자라났다. 한없이 기특하고 또 미안해지는 존재. 유정은 사진 위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임신 사실을 지겸에게 알려야 할까. 어젯밤 제대로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며 했던 고민을 또 반복했다. 그는 정말 소희를 좋아하게 된 걸까. 소희는 자신이 지겸의 아이를 밴 걸 알면서도 그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어떻게 자신과 가장 친한 소희가 그럴 수 있었을까.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지겸이 먼저 만나자고 연락했다. 게다가 함께 밥을 먹자고 했다. 그와 1년을 넘게 만나는 동안 유정과 지겸은 여름과 겨울에 1박 2일의 휴가를 함께 보냈던 걸 빼고는 밖에서 데이트한 적도 없었다. 그가 퇴근한 늦은 저녁 호텔이나 그의 집에서 만나 섹스만 하고는 헤어지기 일쑤였다.

여전히 이 모든 걸 자신의 오빠를 통해 전달한 것은 이상하지만, 어쩌면 그의 태도가 조금은 변했다는 뜻으로 기대해도 되지 않을까. 지겸에게 어떤 사정이 있어서 소희와 일이 생겼지만, 아직 두 사람이 결혼을 한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자신에게는 그의 아이가 있다. 베타 여자가 알파 남자의 아이를 임신할 확률은 기적에 가깝다. 그리고 자신은 절대 아이를 포기할 수 없다.

지겸은 늘 유정에게 선을 그었고, 한없이 나쁘게 대했지만 그런데도 그녀는 그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그래서일까. 유정은 마지막으로 제 배 속에 품은 기적에 기대를 걸어보고 싶어졌다.

“신유정 씨?”

“아.”

“일찍 와 계셨네요. 많이 기다렸어요?”

“아니….”

지겸이었다. 분명, 구지겸이 맞았다. 주변 사람이 힐끗힐끗 쳐다볼 정도로 눈에 띄는 외모, 큰 키와 코트 안으로도 느껴지는 탄탄한 체격, 울림이 좋은 목소리까지. 그런데….

“반가워요. 구지겸입니다.”

마치 낯선 사람 대하듯 인사하는 이 남자를, 유정은 정말로 오늘 처음 보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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