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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스크 향. 구 회장에게선 늘 짙은 머스크 향이 배어난다. 자연스럽지 않아 더 폐부에 직선적으로 침투하는 독한 냄새에 늘 머리가 어지러워진다. 그가 매일 뿌리는 향수는 특수 제작한 것으로 알파 페로몬을 더욱 극대화하는 효과가 있다. 보통 우성 알파, 특히 로열 알파인 사람은 공간을 점령하는 제 페로몬이 곤욕스러워 억제하려 노력하지 그처럼 과시하지 않는다.
그동안 지겸은 그걸 지배적이고 독선적인 아버지의 성향 때문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겨왔다.
그의 아버지가 열성과 우성의 경계에 있는 아주 모호한 알파에 불과했고, 그걸 숨기기 위해 평생을 노력했다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는.
“그래. 상황을 이 꼴로 만들어서 이제 만족하냐.”
베논 제약 회장실, 지겸이 소파에 채 앉기도 전에 아버지가 비웃으며 말했다. 구 회장은 30대 자식이 있는 중년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탄탄한 체격에 흰머리 한 가닥 없이 매끈하게 포마드를 바른 헤어가 눈에 띄었다. 조각칼로 날카롭게 깎아낸 듯 각도가 살아있는 이목구비에서 지겸의 면면이 쉽게 발견됐다. 구 회장은 빼어난 겉모습 덕에 예순이 다 된 나이인데도 젊은 여자 배우들과 종종 염문설이 날 정도였다.
아버지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지겸은 벌써 머리가 지끈거린다. 한쪽 손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답했다.
“네. 적어도 소희가 형과 결혼하진 않게 됐으니까.”
“뭐야? 그랬으면 네 녀석 옆에 잘 붙들어 놓든가. 계집애 맘 하나 못 잡은 주제에 말은 참 번지르르하구나.”
“누구처럼 억지로 붙잡아 피 말려 죽일 생각은 없어서요.”
“뭐, 뭐?”
다분히 의도적인 지겸의 공격에 구 회장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럼. 저도 아무도 못 만나게 집에 감금해 놓고 매일 밤일이나 하게 해야 합니까?”
당신이 어머니한테 그랬듯이. 지겸이 더 나오려는 욕지거리를 목구멍 뒤로 처박았다.
“미친놈! 네가 여자한테 빠지더니 천지 분간을 못 하는구나.”
하. 이번에 구 회장을 비웃은 건 지겸이었다.
“천지 분간을 정말 못하는 게 누구신 데요. 혹시 아버지 자신이 신이라도 되는 줄 아십니까? 이 짓거리가 언제까지 들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셨습니까?”
구 회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절절매던 여자한테 차이고 나니 네가 눈에 뵈는 게 없나 보구나. 정신 차리면 다시 얘기하자.”
아버지는 더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지겸을 등졌다.
“형에 대한 찌라시가 돌 겁니다.”
지겸의 말에 구 회장이 다시 몸을 돌렸다. 끝이 고집스럽게 꺾인 눈썹이 순간 꿈틀했다.
“회사 생각해서 정식 기사로 내지 않는 겁니다. 혹시 약혼이 깨진 거로 소희가 피해 보는 일 없게 하십시오. 구지훈과 다시 이어붙일 생각은 꿈도 꾸지 마시고요. 만약 제 말을 무시하신다면 어떻게 될지는… 아실 거라 믿습니다.”
혹여나 소희에게 불리한 기사라도 도는 날엔 절대 가만있지 않겠다는 협박이었다. 자신의 부와 명예를 지키기 위해선 더러운 짓도 서슴지 않는 구 회장을 경계한 말이었다.
“그리고, 보건복지부 장관 딸.”
순간 구 회장의 눈동자가 조금 흔들렸다. 지겸이 어떻게 알았는지 가늠해 보는 눈빛이었다.
“지켜보겠습니다. 제게 한 약속 제대로 지키시는지.”
회장실을 나온 지겸이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저 안에서 자꾸 심장을 옥죄는 듯한 통증이 치솟는 바람에 참느라 쉽지 않았다. 거친 숨을 진정시키기 위해 천천히 들이마시고 내쉬기를 반복했다. 그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낯익고도 저급한 페로몬이 훅 지겸에게 달려들었다. 불쾌함에 지겸이 미간을 찌푸렸다.
“휘유. 이게 누구야. 형 약혼녀 뺏어간 패륜남 구지겸 아니신가.”
뜻밖의 마주침이 반갑다는 듯 지훈이 지겸의 어깨를 툭툭 쳤다.
“너랑 말 섞을 기운 없으니까. 다음에 얘기해.”
지겸이 지훈의 손을 탁 쳐내며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불쌍한 내 동생. 임소희가 너 한 번 따먹고 나니 시시해졌대? 둘이 한국 오자마자 결혼한다 어쩐다 난리 칠 줄 알았더니… 헤어졌다며?”
“입 조심해.”
“이왕 이렇게 된 거 나도 한 번 먹어볼까? 안 그래도 궁금했는데. 의외로 나랑 속궁합이 더 잘 맞는 걸 수도 있잖아.”
“미친…!”
턱. 지겸이 닫히려던 엘리베이터 문 사이를 손으로 잡고 벌리며 나왔다. 바로 지훈의 멱살을 잡아 끌어올렸다. 뭐가 재밌는지 지훈은 비릿한 웃음을 실실 흘려댔다. 지겸이 주먹을 쥐고 들어 올렸다. 지훈의 코앞까지 뻗었다가 한숨과 함께 멱살을 풀었다.
“소희 건드리지 마. 그땐 죽여버리는 걸로도 끝나지 않을 거야.”
지겸이 잡은 멱살을 세게 뿌리치며 놓자 지훈이 반동으로 주저앉았다. 여전히 키득거리며 웃고 있었다.
“아이고 무서워라. 이렇게 대들고 제멋대로 잘하면서 그동안은 어떻게 참았대. 임소희가 침대에서 얼마나 죽여주길래 네가 차이고도 이렇게 절절매는지 궁금하네.”
지훈이 입맛을 다셨다. 그를 내려다보는 지겸의 눈동자가 차갑게 식었다. 지겸이 느릿하게 한쪽 무릎만 접어 지훈의 귓가에 입술을 댔다.
“말조심해. 내가… 정말 못할 것 같은가 보지? 자기 동생도… 그렇게 만든 저 아버지의 아들인데 눈 뒤집히면 형 따위야.”
그렇게 지겸이 속삭이자 능글거리던 지훈의 얼굴이 긴장으로 순간 굳었다.
주저앉아 꼼짝도 못 하는 지훈을 두고, 지겸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멀끔한 표정으로 돌아섰다.
“너 그거 알아? 넌 작은 아버지를 꼭 닮았어. 우리 아버지 말고.”
지훈이 경멸 찬 목소리로 지겸의 뒤통수에 지껄였다.
“그래? 형에게 평생 들은 것 중, 가장 맘에 드는 칭찬이네.”
뒤돌아 지훈에게 피식 웃어준 지겸이 구겨진 제 셔츠 깃을 타탁 털어 정리한 뒤 엘리베이터 속으로 사라졌다.
***
“아빠, 저 왔…. 헉.”
지훈의 귀 옆으로 아슬아슬하게 위스키 잔이 날아왔다. 와장창. 땅에 떨어진 크리스털 잔이 날카로운 파열음을 내며 무참히 부서졌다.
“네놈이 도대체가 정신이 있는 놈이야!”
지겸 앞에서는 꼿꼿하고 고고하게 행동했던 구 회장이 지훈의 얼굴을 보고는 자제력을 잃었다.
“아, 또 왜 이래. 제, 제가 뭘 어쨌다….”
문 앞에 서서 더 들어가지도 못하고 지훈은 고개를 숙이고 몸을 떨었다. 제 아버지의 화를 누가 돋우었나,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나 고심했다. 혹시 그 일을 벌써 아신 건….
“지난 주말에 S 호텔에서. 내가 모를 줄 알았더냐?”
“아….”
들켰구나. 구지겸과 임소희 소식에 열 받아서 주말 내내 좀 거칠게 놀았던 것을 제 아버지가 알아차린 모양이다. 지훈이 제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아? 아? 내가 조심해야 한다고 그렇게 일렀었지? 딱 두 달만 참아보라고 했는데 그걸 못해서 아이돌 여자애 불러모아 약 빨고 그 지랄을 해?”
“저, 저는….”
“말로 더해 뭐하겠냐. 엎드려라.”
지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몸을 덜덜 떨면서도 구 회장이 한 번 더 채근하기 전에 재빨리 그의 앞으로 가 엎드렸다. 엎드린 지훈의 팔다리가 모욕감에 잘게 떨렸다. 구 회장이 책꽂이 옆쪽에 세워 두었던 골프채를 꺼내 들었다. 지훈은 입술을 입 안으로 말아 넣어 깨물었다. 체벌하려는 상대가 묻기도 전에 지훈이 먼저 입을 열었다.
“여, 열 대요. 열 대.”
구 회장은 답 없이 손에 힘주어 골프채를 쥐었다. 퍽, 퍽, 퍽. 지훈이 중간중간 다리를 휘청거리며 무너졌지만, 곧 벌떡 몸을 세우곤 했다. 막대기가 휘둘러지는 숫자가 정확히 열을 채울 때까지, 회장실 안에는 쇠막대기가 살과 근육을 쳐대는 둔탁한 음성 외엔 고요했다. 서른이 된 아들과 아버지의 모습이라고 보기엔 다분히 비정상적인 광경이었다.
열 대를 다 때린 구 회장이 골프채를 바닥 아무 데나 집어던졌다.
지훈이 벌떡 일어났다. 입술은 군데군데 터져있었고 온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런 모습에 눈길조차 주지 않으며 구 회장이 제 의자에 앉아 턱을 괴었다. 지훈이 그 앞으로 가 섰다. 걸음걸이가 조금 어색했다.
“찌라시가 돌 거다.”
“네?”
“너의 성생활이 조금 문란하다는 식으로. 약이나 불법적인 요소 얘기는 없을 거야.”
“아, 아빠!”
지훈이 눈을 부릅떴다. 무엇보다 제 사회적인 평판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지훈이었다. 지금까지야 자신이 뒤에서 누구와 뭘 하든 소문이 다 지겸이 한 짓으로 퍼지니 편했다. 하지만 그런 찌라시가 돈다면 앞으로는 지훈도 행실을 조심해야 할 터였다. 여러모로 최악이었다.
“직접 막으면 될 일을 왜 그냥 두는데요?”
지훈이 말꼬리를 흐렸다.
서른이 넘어도 여직 사춘기가 끝나지 않은 십 대 같은 태도의 아들을 구 회장이 답답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곧 잦아들 거야. 그리고 지겸과 착각했다는 식으로 다른 내용도 뿌릴 거다.”
“싫, 싫어요.”
“구지훈.”
“설마 직접 뿌리신 거예요?”
“그럴 리가 있느냐.”
“그럼 막아주세요! 전 그런 거 싫어요.”
“어린애처럼 굴지 마라.”
구 회장이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좌우로 내저었다. 여자애들과 아무렇게나 뒹군 걸 다그칠 때보다 표정이 더 구겨져 있었다.
“지겸이가 그동안의 일들 전부 알고 저 난린데, 회사를 위해서 너도 그쯤은 눈감고 넘어가야지. 곧 네 것이 될 회사 아니냐. 아무리… 너라도 그 정도 머리는 있으리라 믿는다.”
구 회장이 지훈을 느릿하게 위아래로 훑어봤다. 한숨 섞인 표정에 지훈의 어깨가 절로 안으로 굽어들었다. 어른답게 굴라면서 지훈을 대하는 그의 말과 행동 여기저기에서 아직 덜 자란 청소년 대하듯 권위적이고 무시하는 태도가 묻어났다.
“아, 아버지 그, 그래도.”
“멍청하게 지 동생한테 여자도 뺏긴 주제에 말이 많구나. 일단 쥐 죽은 듯이 있어. 알았냐?”
구 회장이 한심해 미치겠다는 눈빛으로 지훈을 보고는 혀를 끌끌 찼다. 고등학생 아들이 있대도 이보다는 낫겠다. 뒤이어 작게 혼잣말하는 구 회장의 말에 지훈의 몸이 움찔거렸다.
“거기 멀뚱히 서서 뭐 해? 알았으면 어서 내려가 일해!”
“네, 네 아빠.”
“아빠는 무슨! 호칭 정리 좀 제대로 하라고 몇 번을 말하느냐! 나이는 다 헛으로 먹었어?”
“네 아버지….”
수치스러움과 자괴감이 뒤섞여 일그러진 얼굴로 지훈은 회장실을 나왔다. 눈도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구 회장은 철저히 지훈의 편이었고 모든 권리와 혜택을 그에게 몰았지만, 지훈은 어린 시절부터 남몰래 지겸에 대한 열등감과 압박감에 시달려 왔다. 같은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체육이든 공부든 모든 면에서 자신보다 월등한 지겸을 부러워하고 질투했다. 친구들도 늘 지겸의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생긴 건 똑같은데 왜 다를까. 그런 지훈의 속내를 눈치챈 아버지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직후 지겸을 미국으로 보냈다.
“구지겸 개새끼.”
특별히 소희에게 마음이 있었던 건 아니다. 그런 공을 들일 필요도 없지. 어차피 제 것이 될 여자였으니까. 자신의 즐거움과 욕구 해소를 위해 필요한 여자 중의 하나였을 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겸에게 제 것을 빼앗길 줄은 몰랐다. 구 회장이 뭐라고 하든, 지훈은 이 더러운 기분을 어떻게든 풀고 싶었다. 구지겸과 임소희를 쌍으로 괴롭힐 방법이 뭐가 있을까. 어떻게 하면 좋을까.
지훈이 휴대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