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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말은 꼭 결혼한 것 자체를 후회한다는 이야기처럼 들렸다.
“그렇다고 네 아빠와 함께인 걸 후회한다는 뜻은 아니야.”
소희의 속마음이 다 보인다는 듯 엄마가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불현듯 무언가가 떠올랐다. 재림 재단장의 안사람으로 살지 않았다면, 엄마는 어떤 꿈을 꿨을까.
“그림… 그림 때문이에요?”
동양화를 전공하신 엄마는 작품활동을 계속 이어가고 싶어 하셨다. 소희가 아주 어릴 때만 해도 그림 활동을 해 나갔고, 그녀 또한 한 번씩 엄마의 그림을 보러 삼청동 갤러리에 갔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붓을 놓았다. 아버지를 따라 잦은 출장이나 약속을 따라다녀야 하니 자신만의 시간이 남아나질 않으셨을 것이다. 소희는 그것도 엄마의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그 삶에 만족하고 있다고. 엄마가 소희에 대해 사실 아는 것이 많지 않은 것처럼 이제 보니 소희도 그랬다. 엄마에 대해 잘 몰랐다.
“그러니까 너무 안달하지 마. 아무 것도 걱정하지 말고. 이 기회에 차근히 네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이 뭔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해 봤으면 좋겠어.”
사실 소희의 아버지는 그녀가 한국에 돌아왔고 지겸과도 함께가 아니란 사실에 분노했다. 당장 소희를 잡아 오라며 난리였다. 하지만 이번만은 엄마도 완강하게 막아섰다.
“그러다 시간이 흘러 정말 이 사람이다 싶은 사람을 만나면, 결혼은 그때 해도 늦지 않아.”
아예 안 해도 좋고.
엄마가 덧붙인 마지막 말에 소희의 표정이 묘하게 달라졌다. 아까부터 엄마에게 묻고 싶은 게 있었다. 할까 말까 고민하며 입술을 달싹였다. 엄마가 소희의 한쪽 볼을 부드럽게 감쌌다.
“궁금한 게 있어?”
소희가 끄덕였다.
“아버지를… 사랑해요?”
엄마의 동공이 낙엽을 떨어뜨리는 바람처럼 흔들리는 게 보였다. 예상했던 질문이 아닌 것은 확실했다.
“글쎄…. 음.”
오늘 엄마와 이 대화를 나누기 전까지 소희는 두 분이 서로 사랑해 마지않는 사이라고 생각했다. 엄마에 대해 늘 불안해하고 집착적이긴 했지만 그것마저도 가부장적인 아버지가 사랑을 다루는 방식이라고 여겼다. 그들의 딸로 살며 서운하고 외로운 적이 많았지만, 두 분이 서로 깊이 사랑하는 사이라고 생각하면 이상하게 그걸로 위안이 됐다.
소희가 자신도 모르게 지훈과의 결혼을 기대해 오고, 지겸의 달콤한 유혹에 쉽게 넘어가 버렸던 것도 어쩌면 빨리 제 부모님과 같은 관계의 일부가 되고 싶다는 은밀한 욕망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다시 선택할 수 있다면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고 싶다는 엄마의 말은 큰 충격이었다. 소희가 보았던 건 모두 허상일까.
“사랑하지. 하지만 그보다… 엄마는 네 아버지가 안쓰러워.”
순간 소희의 심장이 날카로운 무언가로 쿡 하고 찔리는 기분이 들었다. 바늘보다는 두껍고, 시리기보단 뜨거운 무언가. 그래, 어쩌면 그녀 가슴에 새겨져 있던 지겸의 각인을 도려냈던 레이저 같은 것. 그때 소희의 전신을 세차게 휘몰아쳤을 심장박동 소리가 이제야 제 귓가에 울리는 것만 같았다.
의식이 차단된 수면 마취 중에도 몸은 통증을 느끼고 있다. 통증에 대한 반응은 생각보다 훨씬 원초적인 생리적 현상이라서 아무리 깊은 의식마취를 시행해도 혈압이나 심박수가 상승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엄마의 대답에 소희는 지겸을 떠올렸다. 절실하게 그녀에게 사랑을 속삭이던 남자를. 그녀가 그를 받아줄 때도, 밀어낼 때도 망설임 없이 소희를 빨고 씹고 샅샅이 먹어치우던 그의 욕망을. 절정에 이르는 순간 야릇하게 좁아지던 눈매와 그녀의 젖가슴 위에 토해내던 끈적이는 숨을. 그에 대한 기억은 어쩌면 소희에게 지워지지 않을 통증인지도 모른다. 의식을 잃은 순간에도 온몸을 파고드는 원초적인 생리 반응 그 자체.
소희는 엄마의 말을 정확하게 이해했다.
누군가를 안쓰러워하는 마음.
그건 구지겸, 그 남자를 떠올릴 때마다 소희의 명치를 지독하게도 짓누르는 압박감과 닮았다.
“우욱-.”
“어머! 소희야!”
순간적으로 구토감이 몰려왔다. 소희는 어쩌지도 못하고 몸을 잔뜩 굽혀 하얀 대리석 바닥에 제 위에서 나온 모든 걸 토해냈다.
소희의 엄마가 그런 그녀의 등을 한참 동안 두드려 주었다.
***
“광화문으로.”
“회사로 가십니까?”
지겸은 운전석에 앉은 김 실장의 질문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에 매는 넥타이가 갑갑했다. 지난번에 의사에게 처방받았던 약은 이미 전부 소진했다. 어제 새로 처방전을 받기는 했지만, 솔직히 진통제가 별 도움이 되지는 못한다.
지겸은 어쩔 수 없이 숨을 몰아쉬며 넥타이를 잡아당겨 조금 느슨하게 풀었다. 살짝 사그라드는 것 같았던 아픔이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누군가 그의 심장을 도려내 횟감처럼 도마 위에 올려놓고 사시미 칼로 얇게 썰어대는 것만 같았다.
“후우….”
깊은 한숨을 내쉬는 지겸을 김 실장이 백미러로 흘끔 훔쳐봤다. 지겸은 등을 시트에 깊숙이 기대고 몰려드는 통증을 애써 버텨내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네. 걱정할 필요, 없. 큭.”
때마침 신호등에 걸린 차가 급히 정차했다. 지겸이 왼쪽 가슴을 움켜쥐고 숨이 넘어갈 듯 앓았다. 심장을 가격하는 통증은 제법 주기적이고 끊임없이 반복됐다. 기분 나쁘고 음침한 통증이 자잘하게 이어지다 지금처럼 심장에 폭격을 퍼붓는 고통이 휘몰아치곤 했다.
그런데도 지겸은 늘 이 순간을 기다렸다.
강도 높은 지진이 버텨낸 후 파고드는 여진이 사뭇 견딜 만해지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를 둘러싼 모든 세상의 색이 소멸한 것만 같은 요즘, 그는 자신을 극한으로 내모는 이 고통의 순간에만 본인이 살아있음을 느꼈다. 그건 퍽 기꺼운 통증이었다. 쾌락과도 닮은 것. 제 몸에 유일하게 남은 소희의 흔적이기 때문에.
굽었던 몸이 다시 펴졌다. 잠깐 찾아온 평화에 지겸이 창밖으로 무감한 시선을 던졌다. 때로는 몇 초, 운 좋으면 몇 분. 통증 없는 순간엔 어김없이 그리움이 밀려들었다. 가끔은 환영처럼 소희의 얼굴이 눈앞에 흐릿하게 보이기도 했다. 웃는 모습이 어땠더라. 마지막에 본 슬퍼하고 울던 표정들이 뇌리에 박혀 그녀의 미소에 대한 기억을 죄다 덮어버렸나. 그때 그의 눈에 무언가가 띄었다.
“김 실장님. 멈춰요.”
“네?”
“차, 잠깐 세워.”
지겸의 다급한 말에 김 실장이 코너를 돌아 차를 세웠다.
지겸이 차에서 내려 쇼콜라티에처럼 보이는 가게에 들어가더니 초콜릿 박스를 몇 개나 담은 쇼핑백을 가지고 나왔다.
쇼핑백에는 ‘Lily of the Valley’라는 상호가 적혀 있었다.
은방울꽃. 그가 싱가포르에서 소희에게 선물하려다 결국은 하지 못했던 그 꽃의 이름.
다분히도 충동적이었다. 매일 수백 번, 수천 번도 더 그러고 싶은 걸 애써 참아냈는데. 겨우 조그마한 초콜릿 상자를 손에 쥐고 지겸은 억눌렀던 말을 뱉어낸다.
“이촌동, 잠깐 들렀다 갈까요.”
김 실장이 말없이 차를 돌렸다.
지겸의 심장이 멋대로 뛰기 시작했다. 그저 이 초콜릿을 전해 주려는 것뿐이다. 물론 김 실장을 통하겠지만. 그래도 혹시나 먼발치에서라도 소희를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는 제 속셈을 안다. 그녀의 공간으로 가는 길이라서일까. 우습게도 중간중간 치솟는 통증까지도 이 긴장이나 떨림을 극대화하는 장치처럼 느껴질 뿐이다.
주차장 구석에 차를 세웠다. 김 실장이 소희에게 초콜릿을 전하러 올라간 사이, 지겸은 차 뒷좌석에 남아 그녀의 집으로 올라가는 입구를 눈도 깜빡이지 않고 노려봤다.
저 입구의 벤치에 앉아 소희를 기다렸던 밤이 떠오른다. 처음 입술을 대고 진득하게 빨았던 그녀의 복숭아뼈도. 소희의 페로몬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순식간에 아래로 피가 몰려 뻐근하다. 그녀의 집 근처니까, 어딘가 남아 있는 그녀의 미세한 흔적에조차 이렇게 발정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미친놈.
겨우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짐승 같은 알파 주제에. 감히 그녀에게 온전한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을 거라고, 아니 자신이 그 행복의 일부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이제 지겸이 가장 참을 수 없는 존재는 아버지도 구지훈도 아닌 자기 자신이었다.
손바닥을 펴 두 눈을 가리고 등받이에 뒷머리를 기댔다. 어디선가 파도 소리와 닮은 환청이 들린다. 지겸은 저 깊숙한 심해 기저부터 천천히 끌어올려지는 통증을 예감했다. 숨이 가빠 온다. 다른 손으로 왼쪽 가슴께를 움켜쥐었다.
아.
거짓말처럼 다가오던 통증이 사라졌다. 조금 열어놓은 창문 틈새로 겨울의 끝을 알리는 것 같은 봄꽃 내음이 흘러든다. 짙은 분홍으로 갈라지는 목련의 혼미한 향에 여리여리한 벚꽃이 살랑이며 섞인다. 비정상적으로 부어오른 심장이 천천히 가라앉는다. 머리보다 먼저 몸이 깨달았다.
임소희, 그녀다.
순간 아이보리 색 코트를 걸친 소희가 그의 차 근처를 스쳐 지나갔다. 추운 것인지 양팔을 감싸 안고 종종걸음으로 걸어간다. 바람결에 좀 더 짙은 체향이 그의 코끝까지 와닿았다. 지겸이 제 양손에 힘을 줘 꽉 말아 쥐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당장 차 문을 열고 뛰쳐나가 그녀를 뒤에서 끌어안을 것만 같았다. 참아야 했다.
겨우 옆모습이었다. 보드랍게 반짝이는 갈색 눈동자도, 볼 한쪽에다 패이곤 하는 볼우물도 보지 못했다. 지겸은 조금씩 멀어지는 소희의 뒷모습을 제 동공에 새길 듯 담았다.
분명한 건, 그와 있을 때보다 그녀의 모습이 한결 편안해 보였다. 정말 다행이다. 하지만….
보고 싶어, 안고 싶어, 입 맞추고 싶어.
혼잣말로도 내뱉지 못하는 간절하고 음습한 욕망이 그의 입가에 머물다 흩어진다.
마침내 소희의 코트 자락까지 문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동시에 언제 멈췄었냐는 듯 심장을 여러 조각으로 쪼개는 통증이 재개됐다. 지겸의 온몸과 정신이 화마에 휩싸인다. 절절 끓어올라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잠식될 것만 같다.
다시는 이곳에 오지 말자.
아득해지는 정신을 붙잡으려고 제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면서, 지겸은 다짐했다.
아무 소용없이 곧 깨어질 결심임을 잘 알면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