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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강탈-51화 (5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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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영원에서의 일 이후 지겸은 급히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베논 제약의 연구원으로 들어온 후 그는 집착적으로, 은밀하게 관련 자료를 모았다. 다행히 아버지는 지겸을 별로 경계하지 않았다. 지훈은 그의 행적에 관심도 없었다.

하긴 평생 단 한 번도 아버지의 말을 어겨본 적 없었다. 겨우 열 살의 아이에게 홀로 미국으로 유학을 가라 했을 때도, 의학전문대를 진학하라 했을 때도 그는 말대답 한 번 하지 않고 따랐다. 아버지는 지겸을 신뢰했고 동시에 얕잡아 봤다. 그것은 아버지가 숨기는 뭔가를 알아내고자 했던 지겸에게는 퍽 유리한 환경이었다.

그러니 지겸이 이렇게 모든 진상을 파악할 수 있었던 거겠지.

“형, 담배도 피울 줄 알았어요?”

처음 보는데.

주영을 주차장까지 데려다주고 온 유현은 베란다 난간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고 있던 지겸을 발견했다. 날씨가 많이 풀렸다지만, 여전히 추웠다. 입을 열 때마다 입김이 서렸다.

“저도 주세요.”

지겸이 담뱃갑을 유현이 서 있는 쪽으로 툭 쳐서 보냈다.

“끊었었지. 15년 전에.”

“아아, 그랬구나. 15년… 에? 형 중딩이었는데?”

큭. 지겸이 담배를 입에 물고 그런 유현이 귀엽다는 듯 웃었다. 그가 긴 손가락으로 담뱃대 끝을 잡고 한번 쭉 빨아당기니 양쪽 볼이 홀쭉해졌다. 유현이 그런 지겸의 모습을 넋을 놓고 쳐다봤다.

“형, 그러고 있으니까 꼭 그거 같아요. 영화 주인공.”

무슨 실없는 소리냐는 듯 지겸의 눈매가 좁아지며 질책의 표정이 떠올랐다.

“왜 그런 거. 홍콩 누아르 영화에 나오는 조폭 남주 같은 느낌? 나쁜 남자, 치명치명 이런 거. 아, 이런 말 모르나.”

“…미친놈.”

지겸은 유현이 자신을 웃기려 저런다는 걸 알았다. 독한 양주에 담배에. 평소와 전혀 다른 행동만 골라 하는 지겸이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그 골프친 날 이후, 아버지가 보건복지부 장관 또 만나셨나?”

지겸이 담뱃재를 툭툭 털어내며 물었다. 파스슥. 빨간 불똥이 담배 끝에 붙었다가 다시 검게 먹혀들었다.

“직접 만나시진 않은 것 같아요. 그런데….”

유현이 손에 쥔 담배를 황급히 몇 번 빤 뒤 연기를 훅 내뿜어내며 말을 이었다.

“그 장관님, 딸이 하나 있더라고요.”

유현의 말에 지겸이 순간 동작을 멈췄다. 이어 손에 쥐고 있던 담배를 느릿하게 비벼끄며 물었다.

“재림 의료원에 그 딸 이름으로 최근 진료 내역 있어?”

“그것까진 확인 못 했어요. 형도 알잖아요. VIP 기록은 쉽게 열람 못 하는 거.”

“분명 검사했을 것 같은데. 시술도 이미 했을 것 같고.”

오랜만에 담배를 피워서 그런가. 맛도 없고 머리가 핑 돌았다. 심장의 통증을 잊어 보려고 이런저런 발악을 해도 크게 여의치 않았다.

“설마요. 형에게 다시는 안 하겠다고 약속하셨다면서.”

“넌 그걸 믿어?”

“어, 형은 안 믿어요?”

“절대.”

그 말을 고분고분 믿었다면 이렇게 이중, 삼중으로 준비하지도 않았겠지. 지겸이 눈앞의 한강을 바라보며 관조적으로 답했다. 저게 무슨 다리더라. 일렬로 길게 늘어선 노란 가로등이 물기를 머금어 어른거렸다.

“그런데 형 이 집에서… 계속 살 거예요?”

유현이 남자 혼자 살기엔 지나치게 넓은 이 층짜리 펜트하우스를 둘러보며 말했다. 지겸은 베논 제약 본사와 가까운 광화문에 살다가 얼마 전 이곳으로 이사했다. 소희와 함께 들어오려고 산 곳이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한강이 잘 보이는 집.

“글쎄.”

지겸이 담뱃갑에서 담배를 한 대 더 꺼내 입에 물었다. 동시에 그의 심장을 죄이는 통증이 다시 시작됐다. 그가 입 안의 담배 필터를 와드득 깨물었다. 어느덧 익숙해진, 일상 같은 고통이었다.

***

소희는 제법 잘 지냈다. 세간에는 소희와 지훈의 파혼에 대한 이야기가 퍼지진 않은 것 같았다. 덕분에 그녀는 새 학기에 시작될 강의를 준비하고, 책도 읽고, 남은 시간엔 기절하듯 누워 잠을 잤다. 외출은 간단히 장을 볼 때만 했다. 이상하게 자고 또 자도 잠이 왔다. 싱가포르에서의 일들 때문에 그녀의 내면과 체력이 모두 많이 소진된 탓이었다.

유정에겐 한두 번 더 연락을 시도해 봤으나 여전히 받지 않았다. 그녀와의 오해도 풀고 여러 가지로 고민이 많을 친구를 도와주고 싶은데.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으니 힘들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지겸이 챙겨준 음식들을 다 소진할 때쯤 다시 김 실장이 찾아왔다. 그는 소희의 몸 상태를 확인한 뒤 또 많은 양의 음식을 전달해 주고 갔다. 소희는 식탁 위에 정갈하게 포장된 음식들을 쌓아 올려놓고 한참을 보고 앉아 있었다.

그는 잘 지내고 있을까. 김 실장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정작 입 밖으로 질문이 나오진 않았지만.

오늘도 느지막이 일어나 간단히 아침을 먹고 책을 읽고 있는데 누군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삐리릭. 도어락이 열리는 소리에 깜짝 놀란 소희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순간 누군가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아는데도.

문을 연 소희의 눈앞에 나타난 건 어쩐지 몇 주 전보다 많이 야윈 듯한 어머니의 얼굴이었다. 딸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을까, 안색이 너무 좋지 않아 죄책감으로 가슴 한편이 시렸다.

“소희야.”

“…엄마?”

아. 엄마란 사람은 얼마나 기이한 존재인지. 분명히 소희는 제법 잘 지내고 있었다. 잘 먹고 잘 자고. 평소와 똑같았다. 아니 훨씬 더 좋았다. 그런데 어째서, 대체 왜….엄마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 가슴에 뜨거운 무언가 차올랐다. 모든 것은 착각이었을까. 소희는 사실 한 번도 잘 지낸 적이 없었던 건 아니었을까.

“어머, 소희야. 울어? 왜….”

“흑, 흐윽….”

소희의 뺨을 타고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억울했다. 서러웠다. 아팠다. 몸인지 마음인지 머리인지 모르겠지만. 온몸 여기저기가 쨍하고 울리고 토할 것같이 어지러웠다.

“괜찮아….”

엄마가 소희를 품에 안았다. 그 순간 소희의 흐느낌이 폭발했다. 마치 일곱 살 어린아이로 돌아간 것처럼 소희는 주저앉아 한참을 엉엉 울었다.

엄마가 따뜻한 물을 끓여 메밀 차를 만들어 가져다줬다. 작은 메밀 알갱이들이 투명한 물 위를 어지러이 돌아다녔다. 그걸 후, 후 불어 비켜내며 뜨끈한 액체를 입 안에 머금었다. 한참을 울고 나니 조금 개운한 것도 같았다.

“구지겸…. 구 서방 동생. 아니, 어쨌든… 그 사람에게 전화가 왔었단다.”

지겸은 소희의 엄마에게 두 사람이 한국에 돌아왔고, 각인을 풀었다는 이야기까지 했다. 지겸은 혹시 소희가 아프지 않은지, 정말로 다 회복되었는지 직접 확인해 주십사 거듭 부탁했다. 누가 부모인지 헷갈릴 정도로 간절한 목소리였다. 겨우 목소리뿐이지만 절박해 보이던지, 화를 내려던 것조차 잊게 만들 정도였다. 하지만 소희의 엄마는 그런 이야기는 딸에게 하지 않았다.

조금 더 어른이 된다는 건 누군가에게 해도 될 말과 하지 않아야 할 말을 구분할 줄 알게 된다는 뜻이니까.

“좋은 목소리를 가졌더구나.”

그렇던가. 엄마의 말에 소희가 지겸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그의 목소리가 울려 퍼질 땐 자신을 둘러싼 공기가 달라졌다. 밤새 내린 눈이 쌓인 고요한 새벽의 서늘하면서도 포근한 울림을 닮았다. 지겸의 모든 것 중에 지훈과 가장 다른 걸 고르라면 그건 바로 그 목소리였다.

지겸이 엄마에게 무엇을 말했는지 소희는 묻지 않았다. 엄마가 알려주지 않았으므로, 자신도 들을 필요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실은 들을 자신이 없는 것이었을 텐데.

“엄마는 커피 마실 건데. 소희 너도 줄까?”

“네….”

부엌에 선 엄마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봤다. 엄마의 등이 저렇게 마르셨던가. 저것보단 훨씬 단단하고 꼿꼿했던 것 같은데. 언젠가 제 어린 시절의 단편을 끄집어내려는데 엄마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뜨거운 커피를 소희 앞에 내려놓았다.

“아.”

색이 까맣다. 순간, 소희에게 묻지도 않고 카푸치노를 시켜주던 지겸이 떠올랐다.

“엄마, 나 아메리카노 안 먹는데….”

소희가 말끝을 흐리며 난처한 표정으로 웃었다.

“어머, 그랬나? 미안미안. 네 아버지랑 나는 늘 이것만 마시니까. 우유 좀 타 줄까?”

“아니에요. 괜찮아.”

소희가 고개를 내저으면서 일부러 더 급하게 컵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짙은 색의 액체를 조금 빨아들여 입 안에 머금었다. 너무 썼다. 미간을 찌푸리는 소희를 보고 엄마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그 웃음 끝에 엄마의 얼굴이 조금 쓸쓸해졌다. 울고 싶어 보이는 표정이었다.

“우리 소희 아직 아기네. 그런 것도 못 마시고. 나는, 엄마가 되어서 그런 것도 몰랐고….”

엄마의 목소리가 쓸쓸하게 젖어 들었다. 소희가 당황해 엄마를 쳐다봤다. 아니라고, 괜찮다고 말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이번엔 목소리가 입 밖으로 채 나오지 않았다. 제 입 안에 든 액체가 너무 썼기 때문일까.

엄마는 언제나 아버지가 먼저였다. 그녀의 엄마이기보다는 아버지의 아내로 살기로 결정한 사람이었다. 소희의 졸업식은 빼먹어도, 비 오는 날 우산 없이 학교 정문에서 한참을 기다리고 있어도 엄마는 그녀를 필요로 하는 아빠의 곁에 남았다.

그래서 엄마는 성인이 된 소희를 가끔 어려워했다. 지금처럼 둘만 남는 상황이 오면 언제나 조심스럽게 단어를 고르고 소희의 눈치를 봤다. 아버지에게 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서였는지도 몰랐다. 소희는 그런 엄마가 미울 때도 있었지만, 또 많이 사랑했다. 언제나 그녀의 사랑에 목말라 하면서도 아닌 척하느라 바빴다.

엄마는 커피 한잔을 다 마실 때까지도 소희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싱가포르에서 무슨 일이 있었냐고, 한국에는 어떻게 돌아오게 되었냐고. 구지겸, 그 사람과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선생님의 체벌을 기다리고 마냥 서 있는 아이처럼 소희의 몸이 굳었다. 목이 바짝바짝 탔다.

“엄마.”

“소희야.”

두 사람의 입술이 동시에 열렸다. 소희가 엄마에게 먼저 얘기하라는 듯 제 입술을 꾹 다물었다.

“결혼… 꼭 하지 않아도 괜찮아.”

“응?”

소희가 당황하며 반문했다. 잘못 들은 게 아닌지 제 귀를 의심했다. 엄마에게서 들을 거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말이었다.

“엄마는 사실 오래전부터도 그렇게 생각했어. 어쩌면 너를 키우는 내내. 물론 네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정해진 결혼이었고, 아버지가 강력하게 원하셨기 때문에 바꿀 생각을 하지는 않았었지. 무엇보다 너도 당연히 그 결혼을 바란다고 믿었거든. 그런데….”

엄마가 손을 뻗어 소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느덧 엄마보다 키가 커져 버린 자신이었지만, 따뜻한 손길 아래 있으니 다시 열 살도 안 된 꼬마 때로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물론 누군가와 가정을 이룬다는 건 감사한 일이야. 무엇도 깨지 못할 안정감을 주고, 너같이 예쁜 아이도 생길 거고. 하지만 소희야. 엄마에게 다시 인생을 살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때는 오롯이 혼자 한번 살아보고 싶어.”

“…정말요?”

엄마가 저런 생각을 하고 살았다니.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의 엄마가. 엄마는 소희가 봤을 때 완벽하기 그지없는 아내였다. 그리고 그 역할에 스스로 만족하며 살고 계시다고 여겼다.

“응.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엄마가 아닌 나란 사람으로.”

그 순간 엄마의 눈에 이채가 깃들었다. 소희는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사람이 낯설고 아득하게 느껴져서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엄마가 그런 소희의 마음을 다 이해한다는 듯 희미하게 웃었다. 어쩐지 소희의 가슴 한구석이 서걱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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