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신부강탈-50화 (5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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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지금 이게 다 형 각인만 남아 있기 때문이라는 거네요.”

지겸이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유현이 그에게 들리지 않게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딱 봐도 통증은 보통 수준이 아니었다. 진통제를 먹고도 큰 효과가 없는지 지겸은 자꾸만 얼굴을 찌푸리면서도 말투만큼은 너무나 대수롭지 않았다.

지겸이 지금껏 어떤 마음으로 살아왔는지 유현은 알고 있었다. 그렇게 만나게 된 소희인데. 그녀의 각인을 풀었다는 데서 한 번, 자신의 각인은 그대로 뒀다는 데서 또 한 번 놀랐다. 각인을 제거하는 게 가능하다는 얘기를 들은 적은 있으나 실제로 하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자세히는 몰라도 여러 부작용이 많을 텐데.

유현은 조금 전에 지겸의 왼쪽 가슴께가 붉게 부어오른 걸 봤던 게 떠올랐다.

“왜 그랬냐고 물어봤자… 대답 안 해 줄 거죠?”

피식. 자신을 파악한 유현의 질문에 지겸이 눈을 감은 채 웃었다.

“계속 이렇대요? 설마 처음이라 이런 거지 점점 괜찮아진다죠?”

“글쎄, 아닐걸.”

“형-.”

지겸의 태도가 마치 남 얘기하듯 무심하다. 그 와중에도 거칠게 숨을 들이쉬더니 아주 천천히 뱉어낸다. 사뭇 떨리는 몸이 그가 지금 무언가를 견뎌내고 있음을 알려줬다. 그런 지겸을 유현이 눈을 찌푸리며 쳐다봤다.

지겸은 원래도 결코 제 속마음을 주저리 털어놓는 사람이 아니었다. 보스턴 유학 시절, 그와 같은 학교에서 교환학생을 하며 가까워졌고 지겸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됐다. 다만 그에게서 직접 들었다기보다 모두 옆에서 관찰하며 유현이 스스로 알아낸 게 대부분이었다. 그는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에 무감한 편이었다. 처음엔 그런 지겸이 워낙 날 때부터 모든 걸 타고난 도련님이라 괜히 고고한 왕자님 티를 내는 거라고 생각했다.

유현도 우성 알파였지만 지겸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알파들의 세계는 짐승의 그것과 비슷해서 마주치기만 해도 서로의 우열을 쉽게 가릴 수 있다. 자신이 저 사람에게 상대가 되는지 아닌지를 본능적으로 알았다. 그런 측면에서 지겸의 페로몬은 압도적이다. 다만 누구보다 잘 감추고 다니는 통에 잘 모르는 사람이 볼 땐 보통의 우성 알파처럼 보이긴 했다.

“내 얘긴 그만하고. 민주영 아나운서는 정말, 필요하면 인터뷰도 해 주겠다고 하는 거지?”

“아, 네. 곧 만나실 테니 직접 물어보시면 좋을 것 같긴 한데… 형 정말 이 상태로 괜찮으시겠어요?”

“괜찮아. 그래도 내가 하려 했던 일은 제대로 마무리 지어야지.”

소희를 그의 인생에서 놓아버린 이상 사실 지겸에겐 이제 그 무엇도 큰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 일은 자신이 제대로 마무리를 지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누구보다도 소희를 위해서 해야 하는 일이므로.

그때 유현의 휴대폰이 울렸다.

“주영 씨 지금 앞에 도착했나 봐요. 데려올게요.”

그래. 지겸은 대답하며 얼핏 시계를 봤다. 약을 먹은 지 아직 2시간도 채 되지 않았다. 한 알 더 먹어도 되려나. 그냥 버틸까. 지겸이 어느덧 익숙해져 가는 심장의 통증을 제 입술을 짓씹으며 넘겼다.

***

“처음 뵙겠습니다. 민주영입니다.”

“네,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어요. 구지겸입니다.”

민주영은 어깨까지 닿을락 말락 한 중단발을 하고 이목구비가 시원시원한 여자였다. 방송국에서 바로 퇴근하는 길인지, 짙은 녹색의 단정한 치마 정장 차림이었다.

“형, 솔직히 말해요. 잘 모르죠?”

“뭐….”

“정말이세요? 그래도 저 8시 뉴스도 꽤 오래 진행했는데, 서운한데요. 저는 구 교수님 잘 아는데.”

사람 대하는 데 능숙해 보이는 주영이 눈을 상냥하게 접어 대답했다. 그러나 앞에 앉은 남자의 무심한 표정에 더 하려던 말을 멈췄다.

“이해해, 주영 씨. 이 형이 원래 이 세상 그 무엇에도 관심이 없어. 아, 아닌가. 딱 한 명 있다.”

“신유현.”

지겸이 노려보자 유현이 조금 움찔했다.

“미안. 형이 너무 어색하게 구니까 내가 분위가 녹이려다가 별소리를 다 한다.”

못 말리겠다는 표정으로 지겸이 조금 고개를 내젓더니 주영을 똑바로 쳐다봤다.

“어려운 결정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당장은 인터뷰를 할 일도, 민주영 씨의 개인신상이 공개될 일도 없을 겁니다. 하지만 분명 인터뷰 요청을 드릴 날이 올 겁니다. 어떤 형태가 될지 지금 확실히 말씀드리긴 어렵지만.”

“네, 신유현 기자에게 전부 들었어요. 그렇게 되면 제가 선영원 출신 고아라는 것도 다 알려지게 되겠죠. 하지만 오히려 저는 그걸 원해요.”

그녀가 제 자세와 눈빛을 꼿꼿하게 다듬으며 말했다.

소희의 눈동자가 떠오른다. 나긋한 목소리에 지겸이 조금만 세게 쥐어도 부서질 것 같은 몸을 하고서도 그를 노려보던 눈은 얼마나 매섭고 강단 있는지. 그 은은한 갈색 눈빛과 마주하기만 해도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던 자신은 정말 병신 같았지만.

눈앞의 여자와 소희는 전혀 닮은 구석이 없는데도 지겸은 어떻게든 소희를 떠올릴 구실을 만들어낸다. 소희의 얼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심장 한구석이 또 불에 덴 듯 화끈하다.

“인터뷰는 익명으로 나가도 돼. 꼭 주영 씨 실명까지 공개할 필요는 없어요.”

유현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우성 오메가에 미녀 아나운서로, 몇 년째 결혼정보업체에서 진행한 배우자 이상형 조사에서 상위권에 머물렀던 주영이다. 직업적 특성상 얼굴도 많이 알려졌다. 과거를 드러내는 것 자체가 꺼려지는 일일 텐데, 신상이 알려져도 괜찮다니.

“아뇨. 제가 누군지를 제대로 밝혀야, 뉴스의 가치나 그 파급력이 커질 테니까요.”

고개를 숙이고 제 손끝을 만지작거리던 여자가 뭔가를 결심한 듯 힘을 주어 말하기 시작했다.

“‘그 사람’, 저의 오랜… 연인이었어요.”

조심스러운 고백 끝에 주영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뭐?”

이런 내용까지는 몰랐는지 놀란 유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겸도 크게 당황한 표정으로 주영을 바라봤다.

“저도 크게 다르진 않지만, 그 사람은 더 심했어요. 그래도 5년 넘도록 정신과 상담도 꾸준히 받았고, 신경 안정제 복용도 빠트린 적 없어요. 하지만 결국….”

눈물을 참으려는 것인지 주영이 제 입술 한쪽을 꽉 깨물었다. 주영의 연인이었다는 남자는 그녀와 같은 선영원 출신으로, 한 달 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는 극심한 공황장애에 시달리고 있었다. 지겸과 유현은 베논 제약의 비리를 파헤치다가 그 남자와 같은 보육원 출신인 주영에게까지 연락하게 된 것이다.

“유현 씨가… 그러니까 신 기자님이 알려주지 않았다면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평생 진짜 이유를 모르고 살았겠죠. 소름이 돋아요. 제대로 책임을 물을 거예요. 베논 제약과 재림의료원 모두에게. 혹시 제가 다시는 방송을 못 하게 되는 일이 생긴다고 해도.”

주영은 단호했다. 소중한 사람을 잃었기 때문에 낼 수 있는 용기였다. 그녀의 모습에서 지겸은 몇 년 전의 자신을 겹쳐 봤다. 그때 자신이 느낀 분노와 상실감을 이 여자도 비슷하게 느끼고 있을 것이다.

***

베논 제약이 재림 의료원과 함께 나라에서 금지하는 의료 행위를 일삼고 있다는 지겸의 의심은 5년 전, 선영원 원장이 지겸에게 털어놓은 고민에서부터 시작됐다. 선영원은 지겸과 지훈의 어머니가 세운 보육원이다. 지겸은 성인이 된 후에도 어머니의 기일뿐 아니라 철마다 선영원에 들러 후원도 하고 아이들과 놀아주며 봉사해 왔다. 원장은 그런 지겸을 여러모로 신뢰하고 의지하고 있었다.

“지겸 씨, 내가 궁금한 게 있는데… 의사로서 답을 해 줄 수 있을까요?”

원장의 말에 따르면 선영원 출신 중 사회적으로 성공한 10명이 있는데, 정계와 방송, 법조계 등에서 꽤 큰 활약을 하고 있어 후원을 요청하기 위해 따로 만났다고 한다. 우연인지 모두 같은 시기에 선영원에 들어왔던 친구들이었고, 그 당시 원장은 선영원에서 보건교사로 일했었다. 그리고 그들과 20여 년 전부터 가깝게 지냈던 터라 자연스럽게 근황이나 고민 등을 묻게 됐다고.

“10명 모두 성인이 되고부터 극심한 불면증과 우울증, 갑작스러운 이명 현상을 겪고 있었어요. 심한 공황장애로 힘겨워하는 친구도 있었고. 물론 요즘 젊은 사람들 대부분이 우울증으로 고생한다고 하지만…. 우연의 일치라기엔 좀 놀라웠어요.”

원장은 혹시 선영원에서 잘못된 교육방식을 행하고 있거나, 어린 시절의 어떤 일이 그들에게 트라우마로 남아 정신적인 문제를 초래하게 된 것은 아닌가 걱정하고 있었다. 자신들이 잘못한 게 있다면 반면교사 삼아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그래서 그 10명이 선영원에 왔던 20여 년 전부터 남아 있는 자료들을 전부 꼼꼼하게 확인해봤어요.”

그러다가 원장은 우연히 10명의 신체검사 자료를 보게 되었다. 예전 원장이 개인적으로 관리하던 비밀 문서함에 남아 있던 한 장의 검사지. 신기한 건 검사 주체도, 검사가 이뤄진 곳도 재림 의료원이나 다른 병원이 아니라 베논 제약이었다는 것. 물론 그녀는 베논 제약의 안주인인 어머니가 설립한 보육원이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고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고 했다.

“이것 좀 봐볼래요?”

원장은 지겸에게 낡은 검사지 하나를 건넸다.

“나도 간호사 했었으니까 이게 혈액 검사 결과인 건 알겠어요. 그런데 뭔가 이상한 거죠.”

지겸은 그녀가 건넨 검사지를 꼼꼼히 훑었다. 개개인의 항원-항체반응을 검사한 자료였다. 대충 쓱 훑어보면 원장의 말처럼 일반적인 혈액형 검사지와 다를 바 없었다. 모든 사람은 저마다 고유한 항원을 가지고 있다. 혈액형 검사도 항체를 주입했을 때 개인 고유의 항원과 결합하여 발현하는 특정 물질로 구분해내는 것이다.

하지만 검사지의 결과에 적힌 것은 혈액형과 관련된 내용이 아니었다.

Alpha_glycan_recessive 3

Omega_glycan_recessive 5

Alpha_glycan_dominant 1

아직 발현되기 이전인 보육원의 아이들을 상대로 한 알파/오메가 여부에 대한 혈액 검사 결과였다. 그런데 검사지에는 해당 아이들의 우성과 열성의 여부가 정확하게 표기된 상태였다.

집안에 우성 알파와 오메가가 대부분이면 자식들도 그렇게 발현될 확률이 높다. 하지만 우성/열성 여부는 불규칙한 우성 유전형질로 결정되기 때문에, 우성 부모 사이에서 열성이 나오는 경우도 허다했다. 특히 실제 알파인지 오메가인지, 우성인지 열성인지 아닌지는 2차 성징이 오는 10대 전까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런데 당시 베논과 재림대학 병원이 공동연구를 통해 혈액 검사로 사람의 우성/오메가/베타 여부를 판별할 수 있는 항체를 개발해 크게 이슈가 되었다.

다만 이 항체반응 검사 자체가 아직 완전하지 않았을뿐더러, 사회적 혼란을 일으키고 생명윤리에 위험성을 끼칠 수 있다고 판단해 나라에서 법적으로 금지했다.

즉 지겸이 손에 들고 있었던 건, 그의 아버지가 나라에서 금지하는 불법 의료행위를 지속해왔다는 증거였다.

그리고 그 검사지를 추적하며 마침내 지겸이 알게 된 진실은 우려했던 것보다 더 추악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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