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신부강탈-48화 (48/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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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실 안, 다행히도 소희는 편안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의사의 말처럼 수술은 무사히 잘 된 모양이었다.

처음엔 그저 문가에 서서 그녀가 괜찮은지만 확인하고 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문을 열자마자 그의 폐부를 파고드는 소희의 페로몬, 혀가 저릿할 정도로 달큼한 그녀의 체향을 이겨내기는 어려웠다.

저절로 발걸음이 소희를 향했다.

마지막이니까. 이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잠든 그녀를 곁에서 몰래 지켜보는 것까지는 허락해 주겠지. 소희야….

자꾸만 마지막이란 말을 핑계 삼아 조금이라도 소희를 볼 기회를 꾸며대는 자신이 한심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겸이 그녀의 머리맡에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지난밤, 지겸에게 혹사당한 소희가 기절하듯 잠든 순간이면, 그는 오늘처럼 곁에서 그녀를 하염없이 바라봤다. 잠들어 있을 때의 소희는 가장 평온한 표정이 된다. 주름 하나 없이 말간 미간과 부드럽게 내려간 눈매, 숨소리에 맞춰 가끔 떨리는 촘촘한 속눈썹과 가지런한 눈썹까지.

예쁘다, 소희야.

세상에서 가장 가냘프고 반짝이는 것들만 모아다가 빚어놓은 사람 같다. 봄의 첫 순간 나뭇가지에 피어나는 보들보들한 새순이나 비 내린 새벽녘 잎사귀에 몽글몽글 맺힌 물방울, 겨울 흰 눈 사이에서 빨갛게 피워낸 꽃잎 같은 것들을.

수술받느라 힘들었겠지. 아무리 수면 마취를 했다지만. 그녀 몸의 어딘가는 그 아픔을 고스란히 느껴야 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떠올리면 지겸은 가슴의 통증이 다시 심해져 죽을 것만 같았다. 소희가 아프고 힘들었을 모든 순간이 자신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는 생각이 날카로운 유리 조각이 되어 박혔다. 이별의 순간에조차 이렇게 유난을 떨어야 하는 알파와 오메가라는 게 더욱 저주스럽게 느껴졌다.

[정말 후회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조금 전 소희에게로 가려던 지겸에게 의사는 마지막으로 물었었다.

후회라.

무엇을 후회해야 하는 걸까.

어린 시절 처음 만난 소녀에게 반했던 순간을? 그 아이를 위해 개에게 몸을 던졌던 행동을? 그것도 아니면 자신도 모르게 매해 커지기만 했던 첫사랑의 감정을?

지겸이 후회해야 한다면, 아마도 소희에게 지훈인 척 다가갔던 모든 순간에 대해서일 것이다. 참지 못하고 한강 앞에서 키스해 버렸던 것, 눈앞에 흔들거리던 가녀린 발목에 충동적으로 입술을 댔던 것.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의 히트 사이클을 만들어내 욕심껏 안고 또 안은 것.

의사의 질문이 무슨 뜻이었는지는 알고 있다.

오메가의 각인을 혼자 간직한 채 버틸 수 있겠느냐는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질문 자체가 틀렸다. 오히려 반대다. 지겸은 그녀와의 각인을 제거하는 것을 더 후회하게 될 게 분명하다.

속아서 했던 것이라고 해도, 지겸에게 각인한 건 온전히 소희의 의지였다. 아직 지겸이 그녀 몸 깊숙이 자신을 묻고 있을 때, 세상을 가진 것만 같았던 황홀했던 순간에, 얼굴을 붉히며 그녀가 동의했던 일.

그러니까 지겸은 죽을 때까지 이 각인을 지울 생각이 없다.

자신의 곁을 끔찍해하는 소희를 놓아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에게 남은 그녀의 흔적까지 놓을 생각은 없다. 다정한 미소와 녹을 듯 달콤한 그녀의 체향 대신, 심장에 새겨진 이 각인을 붙잡고 살 생각이다. 그 결정이 비록 고통으로 얼룩지게 된다고 할지라도.

지겸은 후회하지 않는다. 앞으로도 그러지 않을 것이다.

후회란 다시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같은 선택을 반복하지 않을 거라는 전제에서 시작한다. 그 선택의 결과를 바꿀 수만 있다면 뭐든 하겠다는 의지도 동반된다.

하지만 지겸은 이 여자를 사랑하게 된 것도, 그녀의 알파가 될 수 있었던 기회도… 다시 주어진다면 똑같이 반복할 것이다. 그러니 후회 따위, 할 리가.

여전히 소희를 사랑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잘 알았다. 이 사랑은 이미 정상의 범위를 넘어섰다. 기형적이고 집착적이다. 앞으로는 더 심해지겠지. 그녀에 대한 마음이 커질수록 그의 소유욕도 걷잡을 수 없이 강해질 것이다. 그러니 지금 놓는 게 맞았다. 그녀가 더 다치기 전에, 숨쉬기도 힘든 유리관 안에 갇혀서 어머니처럼 바싹바싹 말라 향기도 생명도 잃기 전에.

지겸은 자기 자신보다 제 몸속에 흐르는 피를 더욱 불신했다.

자신도 결국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므로.

“으음….”

순간 소희의 미간이 살짝 움츠러들며 몸을 가늘게 떨었다. 수면 마취 때문인지 안 좋은 꿈을 꾸는 듯했다.

지겸이 한참을 망설이다가 소희의 손을 조심스럽게 쥐었다.

“괜찮아. 이제 깨서 집으로 가면, 모든 게 괜찮아질 거야 소희야….”

그는 소희의 손을 살살 들어 손등과 손가락 끝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간지러운지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가 곧 편안해진다. 안 좋은 꿈도 멈춘 걸까. 그랬으면 좋겠다. 앞으로 너의 나날들에 악몽 같은 건 없었으면. 있다면 오롯이 내가 대신할 수 있기를.

지겸이 소희의 손에 제 이마를 조심스럽게 묻었다.

미안해서. 사랑해서.

벌써 이 손이, 그녀의 온기가 그리워서.

커다란 남자의 어깨가 이내 가늘게 흔들린다.

그의 눈가에서 천천히 흘러내린 무언가가 소희의 손등을 적셨다.

쏴아아아아. 창문 밖으로 또 한차례 비가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방 안은 다시 습한 기운이 감돌며 꿉꿉해졌다. 먹구름과 함께 두 사람이 있는 공간도 더욱 어두워졌다.

***

“괜찮으신가요?”

소희가 눈을 떴을 때 처음 마주한 건 낯선 남자였다. 그녀를 지켜보는 모르는 얼굴에 놀란 소희가 몸을 조금 움츠리자, 그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명함을 꺼내 내밀었다.

“김 실장입니다. 지겸 도련님 수행 비서예요.”

“아, 네….”

그러고 보니 지겸이 말했었지. 누군가 대신 그녀를 데리러 올 거라고.

“잠에서 깨면 퇴원하셔도 된다는 의료진의 허락을 받았습니다.”

“으.”

순간 심장 쪽에서 뭔가 뭉근하게 뻐근한 감각이 느껴져 소희가 몸을 둥글게 말며 웅크렸다. 다행히 곧 괜찮아졌다. 잠에서 깨었을 때 걱정했던 것보다 아프거나 괴롭지는 않았다. 그 대단하다는 각인이, 이렇게 간단히 지워낼 수 있는 거였나. 그녀는 우습게도 조금 허무한 기분에 휩싸였다.

시간은 얼마나 지났을까. 그 남자는 지금 수술 중일까? 아니면….

“혹시 그….”

소희가 묻고 싶었던 말이 밖으로 꺼내지지 않고 입 안에서 맴돌기만 했다. 기민한 비서는 그녀가 궁금한 게 무엇인지를 쉽게 눈치챘다.

“도련님 수술은 잘 끝났다고… 합니다. 다만 아직 마취가 풀리지 않았어요. 피곤하실 테니 먼저 댁으로 모시라고 전달받았습니다.”

김 실장은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마주쳤던 지겸의 파리한 안색을 떠올렸다. 수술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하기엔 얼굴이 고통과 피로로 지나치게 얼룩져 있었다. 지겸은 병원에서의 일까지 김 실장에게 자세한 이야기하진 않았지만, 그를 지켜본 지가 10년이 넘었다. 김 실장은 그가 부러 말하지 않은 것들을 이미 눈치챘다. 지겸이 저 몰골로 혼자 운전이 가능할까 걱정됐지만, 그는 무감한 표정으로 김 실장이 건넨 차 열쇠를 받아들었다.

[집 안까지 잘 들어가는지 확인하고 오세요. 혹시 아파하지 않는지, 몸 상태가 어떤지 면밀히 살피고 제게 보고 바랍니다.]

정작 지겸이 신경 써야 하는 건 그녀가 아니라 그 자신 같아 보였는데. 김 실장은 지겸에 비하면 무척 평온해 보이는 소희의 얼굴을 바라봤다.

“차는 이쪽에 세워뒀습니다.”

수면 마취의 영향인지 다리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김 실장이 그런 소희를 차까지 부축했다

“타시지요.”

그가 차의 뒷문을 열었다. 순간 소희의 몸이 크게 동요하며 비틀거렸다.

“괜찮으십니까?”

김 실장이 소희를 탁, 받쳐 잡고 안색을 살피는데 얼굴이 새파랗다. 동그랗게 커진 눈에는 언제 맺혔는지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다시 병원으로 들어갈까요?”

“그, 그… 사람….”

“네?”

소희가 뒷좌석 시트를 한 손으로 붙잡고 차마 들어가지 못하고 망설였다.

“정말 괜찮으신 겁니까?”

김 실장이 소희를 다시 병원 안으로 데려가야 할지 고민했다.

“아니, 아니에요. 죄송해요. 잠시… 어지러웠어요. 이제 괜찮아요.”

소희가 김 실장을 향해 흐릿하게 미소를 짓더니 뒷좌석으로 들어가 앉았다. 소희가 잘 탄 것을 확인한 김 실장이 그제야 안심하며 운전석으로 가 앉았다.

“출발하겠습니다.”

“네… 감사드려요.”

소희가 스르르 눈을 감았다. 아직도 고여 있던 눈물방울이 그제야 뺨을 타고 떨어졌다.

미쳤어, 임소희.

차 문을 열자마자 그 남자, 지겸의 체향이 났다. 깊은 숲속에 비가 한차례 쏟아지고 난 뒤 날 법한, 청량하고 우디한 페로몬.

매일 이 차에, 자신이 앉아 있는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출퇴근했을 그를 머릿속에 그려봤다. 창밖을 바라볼 때면 입술을 조금 꽉 다물고 생각에 잠기려나. 싱가포르에서 종종 보이던 그 표정처럼. 지겸 자신도 알고 있을지 모르지만, 그는 깊은 생각에 잠길 땐 손가락 끝으로 아랫입술을 지그시 누르기도 하고, 피곤할 때면 미간에 살짝 주름이 진다. 함께 붙어 지낸 시간이 길어서였는지, 소희도 모르는 사이 그에 대해 아는 것들이 많아졌다.

하지만 깎아놓은 조각같이 견고한 남자의 얼굴에 변화가 생기는 건 자신과 마주할 때만이었다. 소희가 부르면 무얼 하던 중이든 그는 곧바로 그녀를 바라본다. 그녀 입에서 나온 말이 무엇이든 진지하게 경청해 주고, 종종 재미있다는 듯 그의 눈가가 접히고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간다. 무엇보다 자신과 몸을 섞을 때 지겸은….

그와 함께 있을 때면 이 세상에 오직 두 사람만 남은 것 같이 느껴질 때가 많았다. 지겸의 모든 감각이 그녀만을 향해 오롯이 집중되어 있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바보도 이런 바보가 있을까.

다시는 보지 않기로 했는데, 그래서 각인까지 제거했는데 이 남자에 대한 생각이 끊이질 않는다. 이 차에 오랫동안 켜켜이 쌓인 그의 페로몬에 둘러싸여서인지, 혹은 잠에 빠졌을 때 꿈속에서 그녀 곁에 앉아 속삭이던 그의 목소리 때문인지 모르겠다.

그는 여전히 병원에 누워있을까.

수술은 잘 됐겠지. 나보다 더 아프거나 힘들진 않았겠지.

이제 다시는 그 남자를, 지겸을, 만날 일은 없을 것이다.

안심되어야 할 텐데 오히려 가슴 한구석이 텅 비어버린 것 같다. 심장에 새겨진 각인을 도려냈을 뿐인데 꼭 다른 무언가라도 함께 떨어져 나간 것처럼.

“이거 받으십시오.”

집 앞 현관까지 소희를 데려다준 김 실장이 커다란 쇼핑백을 두 개 건넸다.

“간단한 밑반찬과 국입니다. 죽이나 덮밥류 같은 요리도 있어요. 얼려두고 필요하신 만큼 꺼내 드시면 된다고 합니다.”

“아… 이렇게나 많이… 감사합니다.”

싱가포르에서 비행기를 타기 전, 지겸이 김 실장에게 연락해 급히 요청한 음식들이다. 반찬과 국 종류까지 모두 소희가 잘 먹는 것으로만 꼼꼼하게 메뉴를 일러줬다. 지겸의 본가에서 오래 음식을 담당한 박 여사는, 둘째 도련님의 요청이란 말에 이틀 내내 주방을 떠나지 않고 요리를 했다. 그가 좋아하는 메뉴가 아닐 텐데 이상하다고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소희가 당황한 얼굴로 가는 김 실장을 배웅하면서, 제 두 손으로 봉투 손잡이를 세게 잡았다.

봉투마다 꽉꽉 들어찬 음식 때문일까. 소희는 제 손안의 짐이 유난히도 무겁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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