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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강탈-47화 (47/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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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수면 마취를 진행하지 않으시겠다고요? 저, 정말요?”

간호사가 놀란 표정으로 수술대에 기대어 누워 있는 지겸을 쳐다봤다. 저런 미친 소리는 생전 처음 들어본다는 표정이었다. 설마, 이 남자가 뭔가 잘못 알고 있겠지. 수술 유의사항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거나. 허우대는 멀쩡…한 정도가 아니라 근사한데 머리가 나빠서 여자가 헤어지고 싶어 하는 건가.

“음… 저희 선생님께 절차 안내 제대로 받으신 것 맞는지요? 30분 후부터 임소희 씨 수술이 시작됩니다. 그때까지 수면 마취가 되어있지 않으면….”

“아프겠죠.”

담담한 지겸의 대답에 간호사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환자분. 그게 잘 모르시는 것 같은데, 그냥 아픈 정도가 아니라….”

“상관없습니다.”

“네?”

간호사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럼 지금 이 남자는 다 알면서 수면 마취를 거부하고 있다는 얘기인가?

지겸이 그런 간호사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남자의 짙은 눈동자와 잠시 마주쳤던 간호사가 자기도 모르게 눈을 피했다. 속을 알 수 없는 까만 눈동자에는 보통 사람의 것과는 다른 이채가 엿보였다. 그녀는 확신했다. 어마어마하게 잘생긴… 미친놈이구나.

“혹시… 동의서 필요하십니까?”

“네? 아…. 네, 네.”

간호사는 지겸의 눈치를 보며 나갔다가 동의서를 가지고 들어왔다. 지겸은 수면 마취를 본인의 의지로 거부했으며, 이에 따른 부작용과 여러 사항에 대해 의료진에게 책임을 물지 않겠다는 내용의 동의서에 서명했다.

지겸이 건넨 서류를 보고도 간호사는 믿기지 않는지 멍하니 그가 사인한 부분을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저 구지겸… 환자분, 우선 이 수술실에서 의사 선생님께서 오실 때까지 편안히… 큼. 대기 해 주시면 되고요. 침대 뒤쪽 빨간 버튼을 누르면 간호사실로 연결되니, 위급상황이거나 혹시나 도움이 필요하신 경우에 이용해 주세요.”

“네.”

침대에 비스듬히 걸터앉은 지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던 간호사가 어색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갸우뚱하며 수술실을 나갔다.

지겸은 수술 침대에 누워서 눈을 감았다. 좀 전까지 함께였던 소희를 떠올렸다. 아직도 제 코끝에 남아 있는 것 같은 그녀의 체향을.

잊을 수 있을까. 소희를.

누군가 그에게 평생 잊지 않을 자신이 있냐고 물으면 오히려 답하기 쉬울 것 같은데.

잊을 수 있겠냐고 묻는다면… 그건 생각할 수조차 없다.

좀 더 많이 입 맞추고, 안아줄 걸 그랬다. 맛있는 것도 별로 사주지 못했고 제대로 된 선물 한번 한 적 없다. 데이트다운 데이트 한 번을 못 했고. 지금은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고, 앞으로 함께할 시간이 더 많을 거라고 안일했다. 겨우 그 며칠이 자신에게 주어진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인 줄도 모르고.

깨달음은 항상 늦고 자만 끝에 남는 건 결국 후회뿐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당분간은 바쁠 것이다. 아버지 일을 제대로 마무리해야 하고, 소희의 아버지인 재림재단장도 몇 번 더 만날 필요가 있다.

김 실장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지겸이 싱가포르로 떠나던 날, 아버지와 구지훈은 보건복지부 장관과 만나서 골프를 쳤다고 하니 이 또한 확인이 필요하다. 아버지라면 겉으로는 지겸에게는 알겠다고, 모두 정리하겠다고 말하고 뒤로는 하던 짓을 몰래 그대로 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니.

소희는… 괜찮을까. 감히 그녀를 걱정할 자격조차 없다는 걸 알면서도 지겸의 모든 생각 끝에는 그녀가 있다.

여러 가지로 이목을 끌었던 약혼이었던 만큼 소희와 지훈의 파혼에 대한 뒷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 지겸은 이를 대비해 미리 손을 써 두었다. 곧 지훈과 관련된 소문이 돌 것이다. 회사 이미지가 타격 입을 정도로 치명적이지도 않고, 지훈 때문에 지겸이 사람들 입에 회자된 것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닌 수준이다. 물론 이조차도 근거도 없는 찌라시에 불과하다며 말이 나오다 금세 잊히겠지만, 소희는 파혼에 대한 책임이 일절 없다는 걸 사람들이 인식하게끔 하는 데는 충분했다.

“윽….”

순간 지겸이 왼쪽 가슴 부근을 움켜쥐며 몸을 숙였다. 날카로운 칼로 살갗을 찌르고, 생으로 심장을 도려내는 것만 같은 고통이 전신을 휘감았다.

드디어 소희의 수술이 시작된 모양이었다.

가슴이 턱 막혀서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선명해지는 통증에 지겸의 턱이 달달 떨렸다. 그가 숨을 겨우겨우 몰아쉬며 모두 잠갔던 셔츠 맨 위 단추를 몇 개 풀었다. 그조차도 자꾸만 손이 미끄러져 여러 번 시도한 끝에 겨우 성공할 정도였다.

“하…. 하으.”

지겸이 한쪽 손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짧고 단정하게 정돈된 손톱이지만, 그조차도 너무 세게 말아쥔 탓에 흉기가 되어 그의 손바닥 살을 파고들어 상처를 냈다.

제 가슴에 선명하게 새겨진 그녀의 각인만큼 생생한 고통이었다. 이를 오롯이 감내하며 지겸의 입술 끝이 천천히 말려 올라갔다. 스스로를 실컷 비웃고 욕했다.

하지만 이 순간에조차, 그는 여전히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았다.

***

소희의 각인 제거술을 잘 마친 의사가 수술실을 나섰을 때였다. 각인 기간이 워낙 짧았던 터라 수술 시간이 길지는 않았다. 이 정도라면 상대방의 통증도 수면 마취가 깰 정도의 수준은 아닐 것이었다.

“저, 선생님….”

“박 간호사? 무슨 일입니까. 구지겸 환자는 준비 끝났습니까?”

“그게… 우선 수술실로 안내하기는 했는데. 환자분께서 수면 마취를 거부하셔서요. 선생님께서 한번 확인해 주셔야 할 것 같아요. 지금 상태가….”

“아니 그런 일이 있으면 미리 내게 알렸어야죠! 무슨 말도 안 되는…!”

당황한 의사가 거의 뛰다시피 걸어 지겸이 있는 수술실로 들어갔다.

“환자분! 환자분!”

지겸은 수술용 침대에 고개를 숙인 채 걸터앉아 있었다. 식은땀을 얼마나 흘렸는지 흰색의 환자복은 온통 젖어 있었고 단추도 모두 풀려 있었다. 통증을 견디기 위해 악다물었던 입술도 전부 터져 있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는 남자의 크고 넓은 어깨가 위아래로 거칠게 흔들렸다.

“아니, 괜찮아요?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괜찮습니다.”

지겸이 놀란 의사를 향해 겨우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 끝이 완전히 갈라져 있었다. 그런 지겸을 보며 의사는 고개를 내저었다.

“박 간호사, 일단 혈압이랑 바이탈 체크 합시다.”

“그보다 소희… 임소희 환자는 괜… 윽.”

“환자분, 지금은 본인 상태 확인이 먼저입니다.”

간호사가 지겸의 팔뚝에 혈압 측정용 압박기를 급히 둘렀다.

“혈압 85에 123. 저, 정상입니다. 맥박수도 정상이에요.”

믿을 수 없다는 듯, 간호사의 말끝이 떨렸다. 후우. 의사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크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구지겸 환자분. 보통 사람이었으면 벌써 기절했어요. 아무리 각인 기간이 짧다 해도, 이렇게 마취 없이 버틸 정도가 아니란 말입니다. 게다가 환자분도 바로 각인 제거술 들어가야 하는데 몸 상태가 이러면….”

“저는 받지 않겠습니다.”

“…네?”

의사가 놀란 표정으로 간호사를 쳐다봤다가 다시 지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 말씀, 드려야 해서. 흐… 기다렸습니다.”

“그럼 지금 그것 때문에 수면 마취를 안 하고 버티신 거라고요?”

지겸은 답 없이 마른세수를 몇 번 반복했다.

“잠시 둘이 얘기… 좀 하시죠. 박 간호사.”

의사가 간호사에게 눈짓하자 그녀가 수술방을 빠져나갔다.

“구지겸 환자분. 각인 제거술은 알파와 오메가 양쪽 다 받는 것이 기본입니다. 왜인 줄 압니까?”

“설명하셨던 건…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보통 각인 제거술은 각인을 했던 양쪽이 모두 받게 되어 있다. 그러나 서로에게 새겨졌던 각인이 한쪽에만 남는 경우, 그 사람은 끊임없이 심장의 통증을 경험하게 된다고 알려져 있다. 각인한 상대와 물리적 거리가 멀어졌을 때 사람들이 자주 겪는 통증의 형태가 상대와의 완전한 이별로 인해 극대화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허. 그럼 다 알고도 그런 결정을 하셨다고요?”

“네.”

지겸의 답은 단호했다. 흔들림이 느껴지지 않는 깊게 가라앉은 눈빛에서 그의 의지를 읽어내린 의사가 혀를 찼다. 이쯤 되니 의사도 질렸다는 표정이었다.

“제가 이 수술을 한 이후로 제 환자 중에서는 한 번도 이런 전적이 없었어요. 학계에 공유된 케이스들은 가끔 있지만, 예후가 좋지 않습니다. 보통은 한 달도 못 견디고 다시 각인 제거술을 받으러 온다고 합니다. 그만큼… 통증이 심해요. 정상적인 일상생활도 어려운 수준일 겁니다.”

“후우…. 그보다 조금 전, 수술은 잘 됐습니까. 혹시 많이 아파하거나 수면 마취가 깨지는 않았는지….”

“아….”

지겸은 의사의 진지한 경고도 별로 신경 쓰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의사가 아무리 더 설명한다 해도 흔들릴 결정은 아닌 것 같았다. 게다가 자기 뜻이 완고하다는 것을 방증하듯 지겸은 의사의 이야기를 끊고 소희의 상황부터 물었다.

“임소희 환자분의 각인 제거술은 완벽하게 잘 됐습니다. 수면 마취 상태여서 큰 고통도 느끼지 못했을 거고요.”

“감사합니다. 말씀하셨던 것처럼, 다른 후유증도 없겠죠?”

의사는 금방 죽을 것 같은 몰골을 하고는 제 앞에서 감사하다며 고개를 꾸벅 숙이는 지겸을 입을 벌리고 쳐다봤다. 보통 사람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대체 저 두 사람 사이엔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보통 환자의 사생활에 전혀 관심이 없는 편이었음에도 이 정도 되자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다.

“네, 없을 겁니다. 그보다 통증은 좀 어떠신지….”

“이젠 좀 참을 만…하네요.”

지겸이 턱 아래까지 흐른 땀을 손등으로 대충 훔치며 희미하게 웃었다.

“사정은 잘 모르겠지만… 각인을 홀로 유지하는 것은 의사로서 정말 추천하지 않습니다. 부디 심사숙고하시고, 혹시나 나중에라도 수술이 필요하게 되면 언제든 연락해 주세요. 일정 빠르게 잡아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지겸이 고개를 들자 의사가 그를 유심히 쳐다봤다. 남자는 조금 전, 진료 상담을 받을 때와는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명민하고 날카로워 보이던 짙은 눈매가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다. 그의 파트너가 제거술을 받는 동안 지겸에게 얼마나 큰 고통의 시간이 지나갔을지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대체 저 남자는 무엇이 저리 절실할까. 분명 죽을 정도로 괴로울 텐데. 그 고통과 맞바꿀 정도로, 저 사람에겐 반쪽짜리 각인이 의미 있는 걸까. 어쩐지 가슴속에 인간적인 연민이 차올랐다.

“진통제 처방해 드릴 테니 받아가세요. 같은 의사시니 잘 아시겠지만, 트리마돌 성분 진통제로 시중에 자주 쓰이는 약들보다는 효과가 있을 겁니다. 마약성 진통제도 아니고.”

“…네.”

의사는 뭔가 더 말하려고 입술을 달싹이다 그만뒀다. 당부하고 싶은 이야기가 몇 가지 더 있었으나 어차피 지겸이 신경 쓸 것 같지도 않았다.

“소희는…. 그녀는 지금 어떻습니까. 아직 수면 마취가 깨지 않았는지.”

“한 시간 정도는 더 걸릴 겁니다. 구지겸 씨 수술 시간까지 고려했던 거라서요.”

지겸이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방에서 오른쪽으로 나가서 세 번째에 있는 3번 회복실에 있을 겁니다. …임소희 환자분.”

보통은 알려주지 않았겠지만, 엉망인 지겸의 몰골에 의사는 저도 모르게 소희가 있는 곳을 말해 줬다. 왠지 이 남자를 보고 있자니,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전신의 피가 다 빠져나간 듯한 얼굴을 하고 앉아 있는 지겸의 인사말을 뒤로하고, 의사도 수술실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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