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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강탈-46화 (46/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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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돌아오기 위해서 떠난다. 보통은 일탈의 수단으로 여행을 선택한다. 낯선 환경에서 새로운 경험을 통해 설렘과 즐거움을 느끼기 위해. 하지만 실제로 여행이 완성되는 건 집에 돌아오는 순간이다. 아무리 행복했던 시간이라고 할지라도 제 보금자리를 떠난 이는 피로를 느끼기 마련이니까. 우리가 오롯이 여행을 즐길 수 있는 건 결국 돌아갈 곳이 있어서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길. 비행기 안에서 잠든 소희를 지켜보는 지겸의 마음이 시리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수없이 비행기를 탔다. 미국 동부에서 한국을 오가는 13시간이 넘는 비행시간 동안 지겸은 결코 설레거나 즐거웠던 적이 없다. 미국에도 한국에도, 진정 그가 돌아가고 싶은 곳은 존재하지 않았다. 지겸의 집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를 기다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니까. 그래서였을까. 그 봄의 비행을 잊을 수 없는 건.

딱 한 번 소희를 보기 위해 무작정 한국행 비행기를 탔던 날. 지겸은 처음으로 가슴이 떨린다는 게 어떤 말인지를 절감했다. 안 그래도 긴 비행시간이 열 배는 느려진 것 같아 힘들었지만, 이상하게 좋았다. 누군가를 보고 싶은 마음이 이런 거구나. 돌아갈 곳이 있다는 건 이런 기분이구나. 그 사람의 마음이 꼭 자신과 똑같지 않더라도 괜찮았다. 소희가 그곳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지겸에게는 어느새 소희가 있는 곳이 돌아갈 곳, 그의 집이 되었다.

하지만 이제 자신의 집이 무너진다. 무슨 자신감이었을까. 지겸은 한 번도 이런 상황을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소희와 자신은 어떻게든 이어질 것이라고, 자신이 그렇게 만들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단 하나, 무엇으로도 맘대로 할 수 없는 게 사람의 마음인데.

“으음….”

무슨 꿈을 꾸는지 소희가 몸을 조금 뒤척였다. 지겸이 흘러내린 담요를 끌어 올려 어깨까지 덮어줬다. 싱가포르에서의 어느 밤, 지겸을 아직 지훈으로 알고 있을 때 잠결에 계속 그의 품으로 파고들던 그녀를 떠올렸다. 그보다 한참 작고 가녀린 몸이 오롯이 몸을 의지해 왔을 때 지겸을 가득 채우던 빠듯한 충만감을.

“왜… 안 자요….”

잠이 덜 깬 소희의 목소리가 지겸을 녹일 듯 달콤했다. 그녀로서는 잠결에 내뱉은 아무 의미 없는 말이겠지만, 지겸에겐 특별했다. 그를 걱정해 주는 듯한 말 한마디가.

“괜찮아. 아직 도착하려면 좀 남았어. 그러니까 더 자둬.”

“응….”

다시 스르륵 감기는 눈꺼풀의 떨림에 이젠 심장이 뻐근하다. 지겸의 집은 바로 여기, 지금 그의 곁에 잠들어 있는데. 대체 이 비행기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그게 어디든, 이제 소희는 없겠지. 지겸은 다시 돌아갈 곳을 잃은, 집 없는 아이가 되었다.

***

“각인 제거는 기본적으로 문신 제거와 비슷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인천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지겸은 미리 약속을 잡아둔 병원으로 향했다. 상아가 소개해 준 의사는 안 그래도 몇 명 없는 이 분야의 세계적인 권위자라고 했다. 지겸은 일부러 이날 하루의 모든 진료 슬롯을 예약했다. 소희가 공인까지는 아니지만 얼굴이 꽤 알려져 있다. 조금이라도 이상한 소문이 돌거나 소희에게 불리한 상황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이 지겸의 최선이었다.

“음… 남자분이 의사셔서 대충 원리는 아실 거라고 생각하지만, 상세한 수술법은 의료적 기밀이라 말씀드릴 순 없습니다. 우선 레이저와 약물을 동시에 사용하고….”

“다른 건 상관없습니다. 수술 후 부작용이 없는 게 중요합니다.”

지겸이 단호하게 말했다. 소희는 그런 지겸을 힐끗 보다가 다시 설명 중인 의사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우습게도 공항에서 병원까지 오는 길 내내 기분이 복잡하고 이상했다. 지겸이 한국에 돌아가 각인을 풀자고 처음 말했을 때, 안심이 됐던 건 사실이다. 많은 것이 틀어지고 엉망이 됐지만, 이 각인이 풀리는 걸 시작으로 모든 게 다시 제자리를 찾아갈 수 있겠다는 기대도 들었다. 하지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허전함이 남았다. 아쉬운 것도 아니고, 슬픈 것도 아니다. 그동안 지겸을 향한 그녀의 감정은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듯 요동쳐 왔다.

가장 다정하고 달콤한 연인이었다가, 그녀를 나락까지 떨어뜨린 사기꾼이었다가, 위험한 순간 자신을 구해준 남자였다. 어느 순간엔 그가 그녀를 어떻게 속였는지도, 친구 유정에게 얼마나 잔인했을지도 생각하는 걸 멈췄다. 그저 순간순간 그가 짓는 표정과 지그시 응시하는 눈빛에 집중하게 됐다. 저 남자가 때때로 건넨 몇 마디 말보다, 차마 말하지 못하는 것들이 더 궁금해졌다.

이렇게 서로의 각인을 풀고 나면, 다시는 저 남자를 볼 일이 없겠지.

그런 생각을 하니 소희의 심장이 한편이 이상하게도 뻐근해졌다. 마냥 기뻐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건 왜인지 당황스러웠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함께 많은 걸 겪었기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면 각인으로 인한 본능적인 작용일까. 이제 각인을 풀면, 더 이상 이런 감정은 들지 않게 되는 것일까.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에 휩싸인 소희는 의사의 말이 잘 들리지도 않았다.

소희가 지겸의 옆모습을 눈으로 훑어내렸다. 날카롭게 솟은 콧날을 거쳐 단단히 다물어진 입술과 남성적인 선으로 갈무리된 턱선. 침대 위에서의 그는 그녀를 한시도 놓지 않고 품에 끌어안으며, 정수리에 장난치듯 저 입술이나 턱을 자신에게 비벼대곤 했다. 가장 깊숙이 서로를 취한 사람들끼리만 나눌 수 있는 친밀한 행위. 그 속에 새겨져 버린 달콤함. 무조건 싫어하고 미워한다고 말하기에는 이미 지겸이 소희의 기억 속에 너무 많이 남았다.

하지만 끝은 끝이다. 소희가 자꾸 빨라지는 심장박동을 멈춰 보려고 애썼다.

자신을 위해서도, 유정을 위해서도, 어쩌면 저 남자를 위해서도. 이게 가장 맞는 결론이다. 모든 게 원래대로, 제자리를 찾아갈 뿐이다.

“부작용을 물으신다면, 거의 없습니다. 다만 미리 경고를 드리자면, 수술 시 극심한 통증이 찾아올 겁니다. 겨우 피부에 새겨진 색소를 제거하는 문신도 통증이 심해 중간에 이탈자가 발생할 정도인데 아무렴 각인을 지우는 일은.”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의사의 경고에 소희가 몸을 움츠렸다. 지겸이 그런 그녀를 보며 손을 뻗으려다 멈췄다. 이따위 습관은 대체 언제부터 생긴 것인지, 시도 때도 없이 손이 움직이려 했지만 간신히 참아냈다. 지겸은 소희에게 보이지 않게 오른손을 밑으로 내려 주먹을 꽉 쥐었다.

이런 두 사람을 가만히 살펴보던 의사가 뭔가 마음에 걸리는 듯 물었다.

“무엇보다 수술을 진행하기 전에, 두 분 다 알파/오메가 각인 제거에 합의하신 게 맞으시지요? 만약 한 분만 동의하시는 경우라면 절대 수술을 할 수….”

“맞습니다. 어서 진행해 주시죠.”

지겸이 의사의 말허리를 잘랐다. 단호한 목소리에 오히려 소희가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이 상황을 누구보다 바랐던 자신조차도 뭔가 기분이 찝찝한데, 지겸은 이미 모든 것을 받아들인 듯 오히려 편안해 보일 정도였다.

“그럼 전화로 말씀해 주신 것처럼, 임소희 환자분? 먼저 진행하겠습니다. 수면 마취로 진행되며, 약물이 잘 주입된 걸 확인하면 이프락셀 레이저와 미세박피 레이저, 혈관 레이저로 복합치료 들어갑니다. 구지겸 환자분도 수면 마취 진행하실 거죠?”

소희가 이상하다는 듯 의사와 지겸을 번갈아 쳐다봤다. 수술은 자신이 먼저 받는데 왜 지겸도 벌써 수면 마취를 받는 거지?

그녀의 의문을 눈치챈 듯 의사가 말했다.

“아, 모르셨습니까? 각인 제거술은 수술을 받는 사람보다 상대방이 느끼는 통증이 더 극심합니다. 특히 처음 받는 사람의 상대방에게 그렇죠. 아무래도 양쪽 다 각인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 수술이 들어가니까요.”

“네?”

소희가 놀라 되물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자신 때문에 상대방이 통증을 느낀다니, 소희의 표정에 걱정이 서렸다.

“너무 염려하진 않으셔도 됩니다. 두 분 다 수면 마취 상태이신 데다가, 구지겸 환자분의 차례가 오면 임소희 환자분의 각인은 이미 제거된 상태라 통증 느끼실 일이 거의 없을 겁니다.”

소희가 지겸을 바라봤다. 그는 이 모든 과정을 미리 알고 자신 먼저 수술을 받도록 스케줄을 잡았겠지. 마지막까지도 그녀를 배려하는 이상한 남자다. 그를 향한 소희의 눈빛이 묘하게 달라졌다.

“기본적으로 각인이란 게 그렇습니다. 문신과 비슷하다지만…. 각인으로 하나가 된 서로의 심장을 다시 둘로 쪼개는 거라고나 할까요. 그래도 두 분의 각인 기간이 그리 오래… 되지 않아서 크게 문제는 없을 겁니다. 물론 사람마다 다르긴… 하겠지만요.”

의사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지겸 쪽을 응시했다. 지겸이 고개를 얕게 끄덕였다.

“그렇게 하시지요.”

그래도 통증이 견딜 만하다는 거겠지. 어쩐지 걱정이 가시지 않아서 지겸 쪽을 바라보는 소희에게 간호사가 다가왔다.

“두 분 수술이 전부 끝나면 회복실에서 1~2시간 정도 경과를 보고 퇴원하셔도 됩니다.”

“네….”

수술실로 들어가기 전, 소희의 시선이 지겸과 마주쳤다. 병원에서도 내내 곁을 지키고 서 있던 그였다. 지겸이 그녀를 향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아무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하지만 웃고 있는 그 표정이 어딘가 쓸쓸해 보여서 소희의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김 실장에게 연락해 놨어. 소희 네 쪽이 먼저 끝날 테니 김 실장 차 타고 집으로 돌아가. 양가에는 내가 연락드릴 테니 아무 생각하지 말고 쉬어. 알겠지?”

끄덕끄덕. 소희가 조용히 고개만 끄덕이고는 고개를 돌렸다.

“…소희야.”

멈칫. 소희가 다시 뒤를 돌았다.

“아니야. …마음 편히 먹어.”

혹시나 무슨 일이 생기면. 필요한 상황이 오면 언제든 연락해.

지겸은 그렇게 전하려던 말을 속으로 삼켰다. 이제는 그의 어떤 말도 그녀에게 부담이 될 것 같아서.

보드라운 갈색 눈동자가 그런 그를 향해 동그래졌다가, 어색하게 접히며 휘어진다. 소희는 웃어주려는 것 같은데, 그 얼굴을 바라보는 지겸은 꼭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머저리같이.

“잘 지내요.”

안녕, 이라고 말할까 하다가 소희가 다른 말을 골랐다. 미운 사람이고 여전히 원망하지만, 그가 못 지내길 바라진 않는다. 그러니까 이 인사는 소희의 진심.

“그래.”

헤어지며 그가 그녀를 향해 웃었던가 아니면…. 마취약이 들어가며 가물가물해지는 의식 사이사이 소희는 지겸의 마지막 표정을 떠올려 보려고 애쓰다가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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