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신부강탈-45화 (45/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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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 대한 내 마음, 진심이야.”

캄캄한 병실 안, 지겸의 말에 소희가 잠시 망설였다. 뭐라고 답을 해야 할까. 대체 저 남자에게 듣는 몇 번째 고백인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안에 자신을 깊이 파묻으며 지겸은 몇 번이나 소희의 귓가에 사랑을 속삭였었다. 아무것도 모르던 처음 며칠은 그저 그 고백이 간지럽고 설렜다. 부모님들끼리 정한 정략결혼이었지만 소희는 사실 늘 그 이상의 무언가를 바랐다. 약혼자인 지훈에게 매력이나 호감보다는 묘한 불편함을 느꼈는데도, 결혼 후엔 관계가 달라질 거란 기대도 했다. 그래서 그의 고백이 그녀가 바라던 행복의 시작이라고 믿었다.

약혼자든 아니든, 실은 그저 이 남자의 품 안이 좋았던 것 같다. 숨조차 쉬기 버겁게 그녀를 끝까지 몰아붙이면서도 한없이 다정하게 쓰다듬고 키스하던 사람. 태어나 처음 경험하는 빠듯한 쾌락에 어찌할 바를 몰라 그의 목을 매달리듯 껴안던 기억. 그러면 그는 낮은 웃음이 섞인 목소리로, 바들바들 떠는 소희를 더욱 깊이 끌어안으며 나긋하게 말했다. 사랑한다고.

지겸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자신의 실체를 드러냈을 때도, 화를 내는 그녀를 붙잡으려고 할 때도, 소희가 그에게 사기꾼이라고 소리를 질러대도 지겸은 마치 할 수 있는 말이 그것뿐이라는 듯 간절한 고백을 반복했다.

“…알아요.”

그러니까 지금 소희가 대답할 수 있는 건 이 말뿐이다. 당신의 사랑을 안다고. 그것만은 거짓이 아니라는 걸 믿어 주겠다고.

수십 번의 고백 끝에 겨우겨우 들은 소희의 답이었다. 피식. 지겸이 웃었다. 그래, 이제 이걸로 만족해야겠지. 그의 마음을 알겠다는 말. 적어도 지겸을 밀어내며 사랑조차 거짓으로 지어내냐는 말은 하지 않으니. 그리고 그녀에게 직접 닿는 그의 고백은 어차피 이번이 마지막일 테다.

소희의 목에 새겨졌던 각인의 흔적은 이젠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옅어져 있었다. 그녀의 목덜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지겸의 얼굴이 다시 달아오르려 한다. 그곳에 코를 박고 숨을 들이쉬면 혀가 얼얼할 정도로 단내가 풍긴다는 걸 안다. 그 자리에서 잘근잘근, 그녀를 전부 씹어 먹어 버리고 싶은 걸 애써 억눌러야 한다는 것도. 여전히 그녀 곁에 있으면 지겸은 주체하기 어려울 정도로 몸이 들끓었다. 온몸의 세포가 존재감을 드러내며 바짝 긴장하고, 심장 어딘가 깊숙이 새겨졌을 각인처럼, 제 짝의 페로몬에 반사적으로 욕정하게 된다.

치솟는 본능을 억누르며 지겸이 겨우 말을 이었다. 최대한 담담한 척. 아무렇지 않은 듯이.

“양양 서퍼비치, 겨울의 오대산 산장 그리고 올해 여름 제주도.”

“네…?”

그의 입에서 나온 장소들은 모두 지훈과 다녀온 휴가지였다.

“…나였어.”

놀란 소희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지겸의 눈동자에 파도가 일렁인다.

반칙이야. 또 저런, 상처받은 눈. 버림받은 강아지 같은 눈.

“대체 어떻게 그런.”

“형이 부탁한 거였어. 물론, 내가 상황을 그렇게 만들긴 했지만.”

같은 언어를 쓰고 있는데도 그의 말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소희가 답을 고르며 눈을 깜빡였다. 자신이 각인한 상대가 지겸이라는 것을 알게 됐을 때부터 그녀도 어느 정도는 예상했다. 약혼자가 평소와 다르다고 느꼈던 순간들은, 아마 그가 지훈이 아니라 지겸이었기 때문일 거라고. 당시에는 그것도 모르고, 단지 여행 중이라서, 지난한 회사생활에서 벗어난 데다가 그의 말처럼 억제제가 바뀌어서 그런 걸 거라고 쉽게 받아들였다. 하긴 여행 이후 식사 자리에서 당시 일화나 추억을 꺼내면, 이상하리만치 지훈의 표정이 구겨지긴 했었다. 이제야 조금씩 어긋났던 퍼즐 조각이 제자리를 찾아간다.

“그래서였어. 첫 단추를 잘못 끼웠지만, 믿음이 있었어. 함께 보낸 시간 동안 보았던 네 미소, 편안해 보였던 그 눈빛이….”

자신과 비슷했으니까. 꿈을 꿨다. 최선을 다하면 좋아지리라. 자신이 노력하면,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소희가 언젠가는 그에게 마음을 열 거라고 믿었다. 며칠 전, 요리를 포장해 호텔로 돌아오던 날. 지겸은 소희에게 모든 걸 털어놓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럼 두 사람의 관계가 새롭게 시작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모두 제 욕심과 착각이었을 뿐이다. 그에게 그런 기회가 허락될 리 없었는데.

지겸이 무릎 위에 올려뒀던 손을 꽉 쥐었다.

그녀 앞에 있으니 애써 다진 결심이 자꾸만 무너지려 했다. 페로몬 때문이라고 스스로를 변명해 본다. 각인까지 한 그의 하나뿐인 오메가가, 사랑하는 여자가 눈앞에 있다. 당장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다시 그녀의 모든 걸 느끼고 싶었다. 이런 상황에서조차 그녀를 탐하고 싶어 하는 자신은 얼마나 한심하고 하찮은 짐승인가. 알파가 특별하고 위대하다는 건 다 개소리다. 가장 원초적인 이 욕망 하나 달래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꼴을 보라. 그가 입술을 세게 물었다.

소희가 그런 지겸을 마주했다. 정말 속을 알 수 없는 남자라고 생각하고, 결코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며 증오했지만. 마지막을 예견하는 지금, 소희는 그를 조금 알 것도 같았다. 적어도 지금 그가 스스로 불붙인 지옥 불 위를 걷고 있다는 것 정도는.

“이번 일로 확실히 알았어. 모든 게 나의 욕심이었을 뿐이라는 걸. 붙잡을수록… 널 힘들고 위험하게만 할 뿐이라는 걸.”

그래도 소희야. 여전히 널 붙잡고 싶어.

결코 전할 수 없는 그의 속마음.

그럴 수만 있다면. 그녀가 지금 지겸에게 아주 작은 먼지 한 톨 만한 희망의 빛이라도 내비친다면, 그는 아마 그걸 붙들고 절대 놓지 않을 거다. 지겸은 끔찍할 정도의 소유욕과 집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자신의 추악한 본심을 인정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 그의 입가에 비소가 어린다.

“미안해. 미안해, 소희야. 전부 다 내 탓이야. 겨우 이딴 말로는 아무것도 되돌릴 수 없다는 거 알아. 널 힘들게 한 장본인 치고 뻔뻔하다는 것도. 하지만.”

후우. 지겸이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 내쉬었다.

“후회하지는 않아.”

소희가 제 귀를 의심했다. 정말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지.

그녀의 몸이 스스로도 눈치채지 못한 새 떨리고 있었다. 놀라서인지, 화가 나서인지 그것도 아니면 다른 감정 때문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그렇지만 구지훈은… 안 돼. 눈에 빤히 보이는 불행 속으로 네가 걸어 들어가게 둘 수는 없었어.”

“당신.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아요.”

지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본 소희의 눈빛이 단단했다. 하얀색 병실 침대에 앉아 환자복을 입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여린 몸을 하고서도 눈동자만은 선명하다.

“선택은 제 몫이에요. 지훈 오빠와 결혼을 하든 말든, 그 결과가 어떻든. 뒤를 감당하는 것도 제 일이고.”

아. 지겸은 소희의 눈동자에 담긴 자신의 모습이 추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소희는 제가 늘 지켜야 할 여자고 보호해야 할 오메가라고만 생각했는데, 보다 더 단단한 성정을 지닌 사람이었다.

반면 소희는 애써 담담한 목소리로 이어나가면서도 자신의 입술이 뱉는 얘기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곳에서 함께한 사람이 실은 지겸이었다는 것을 안 순간 소희는 자연스레 깨달았다. 그동안 지훈과 함께하는 동안 자신이 단 한 번도 정말 즐거웠던 적 없다는 걸. 지훈과 결혼했으면 소희는 불행했을 거다. 그러니까 지겸의 그런 생각은 착각도 거짓도 아니다.

한 마디 대화에 심장이 뛰고 웃음이 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아무 말도 나누지 않아도 누군가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하고 위안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것도. 그 모든 걸 알게 해 준 사람이 약혼자의 동생, 지겸이라는 사실은 여전히 그녀를 괴롭히지만.

오메가로서 알파의 페로몬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거로 생각하려 했다.

하지만 정말 그것뿐이었을까. 그를 향한 마음이 그녀 안에 조금도 자라지 않았다고 단정 지을 수 있을까.

아니. 그렇다고 그의 사랑을 받아줄 생각은 없다. 그러고 싶지도 않다.

“애초에 당신이 가장 잘못 판단한 건 그거예요. 아무리 내가 오메가라고 해도, 당신과 내가… 음. 실제로 잘 맞는 알파 오메가 커플이라고 해도. 육체적인 본능이 마음마저 좌지우지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니까.”

그게 유일하게, 우리가 동물과 다른 점이니까.

“그래, 소희야. 네 말이… 다 옳아.”

지겸이 소희를 보고 웃었다. 그녀로서는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괜히 가슴 한쪽이 저며 들었다. 그가 너무 쉽게 수긍을 하니, 오히려 당황한 소희의 입매가 가늘게 떨렸다.

“그러니 돌아가자, 한국으로. 그리고 풀자.”

“네? 지금 그 말은… 그러니까.”

“알파와 오메가 사이의 각인, 풀 수 있어.”

아, 그러고 보니 소희도 들은 적 있었다. 실제 케이스도 별로 없고, 할 줄 아는 의사도 극소수라지만 각인을 푸는 게 아주 불가능하지는 않다는 것. 자신도 한국으로 돌아가자마자 알아보려고 했다. 그런데 정작 지겸의 입에서 각인을 풀자는 얘기가 나올 줄은 몰랐다.

“더는 내 마음을 네게 강요하지도 그걸로 괴롭히지도… 않을게.”

널, 놓아줄게.

희미한 어둠 속, 그의 눈이 어쩐지 촉촉해 보였다.

“임소희.”

쿵.

왜일까. 소희는 도저히 모르겠다.

이 남자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면, 왜 이렇게 몸이 떨릴까. 심장이 발끝까지 내려앉을까. 평생을 불려온 이름인데. 특별할 것도 없는데.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이름이 맞는데.

“소희야.”

“네….”

대체 왜, 그의 입술을 통해 흘러나오는 자신의 이름은 완전히 다른 의미로 느껴질까.

“이제, 돌아가자.”

또륵. 누군가의 뺨을 타고, 눈물이 한방을 떨어져 내렸다. 달빛이 희미한 병실 안은 조금 전보다 더 어두웠다. 그날 밤, 울음처럼 흘러내린 마음이 누구의 것이었는지는 방을 비췄던 초승달만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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