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신부강탈-44화 (44/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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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겨울, 지겸은 원래 제주도로 가려던 겨울 휴가를 산으로 바꿨다. 순전히 눈 소식이 있어서였다. 언제 알았더라. 소희가 눈을 좋아한다는 걸. 자신이 잠깐 한국에 들어왔을 때였던가. 어느 날엔가 소희와 저녁을 먹고 들어온 지훈이 코트를 짜증 내며 벗어 던졌다.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레스토랑을 나서는데 갑자기 눈이 내렸다는 것이다. 소희가 감탄하며 눈 내리는 걸 더 보고 싶다고 하길래 문 앞에 5분 정도 서 있었다는데 너무 춥고 짜증이 났다고 했다.

지겸도 그다지 눈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비 내리는 거나 눈 오는 거, 운전하는 사람한테는 딱 귀찮은 일이다. 하지만 소리 없이 떨어지는 눈송이를 눈을 반짝이며 바라볼 소희의 표정이 너무 궁금했다. 표정이 변화무쌍한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조금만 관찰하면 그녀의 큰 눈이 얼마나 다양한 감정을 담는지 알 수 있으니까.

평창 오대산 자락에 어머니가 좋아하던 산장이 있다. 원래는 등산을 좋아하시는 할아버지가 만드셨다는데, 언젠가부터 부모님이 더 자주 들르셨다. 3층짜리 건물엔 방이 6개, 1층 거실엔 통창이 있어 탁 트인 시야 앞쪽으로 전나무 숲이 담긴다. 지겸은 지훈인 척 소희를 만나 그녀와 그곳에서 휴가를 보내게 됐다.

1층 방은 지겸과 소희의 비서가 쓰고, 2층의 방 두 개에 두 사람이 각각 머물렀다. 그들이 산장에 도착하고 한 시간쯤 지났을까. 불그스름해지던 하늘에서 눈송이가 내리기 시작했다.

“어머, 오빠 눈!”

일부러 커튼을 걷어놓은 통창 가까이 소희가 몸을 붙였다. 처음부터 많은 양이 펑펑 내리는 느낌이 오래도록, 높이 쌓일 법한 눈이었다.

아이보리색 니트 원피스를 입은 소희의 작은 어깨가 기쁨으로 꼼지락댔다. 멀찍이 서서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지겸이 터져 나오려던 웃음을 삼켰다

“조금만 더 쌓이면 같이 나가보자. 저 앞 전나무 숲, 하얗게 바뀌면 꽤 볼만해.”

“정말? 그래도 돼요?”

고개를 뱅그르르 돌린 소희가 환하게 웃었다.

아, 그 미소에 지겸의 심장이 간질거렸다. 아직 쌓이지도 않은 흰 눈에 햇살이 반사된 듯 벌써 눈이 부셨다.

또 저 웃음을 볼 수만 있다면, 지겸은 그게 무엇이든 자신이 가진 전부를 바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지훈과 소희, 둘만의 휴가를 먼저 제안한 건 아버지였다. 겉으론 예비부부가 가까워지는 시간을 마련하기 위해서라고 했지만, 진짜 의도는 다른 데 있었다. 아버지는 결혼을 앞두고도 문란한 생활을 이어가는 지훈을 다스리고 싶어 했고, 소희와 은밀한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판을 짠 거였다. 지훈도 처음엔 이 기획에 꽤 흥미를 보였다. 새로운 여자와 잠자리를 가질 기회를 놓칠 놈이 아니니까.

아버지와 지훈의 계획대로 일이 풀리게 그냥 둘 수는 없었다. 결국 소희 부모님의 귀에 결혼 전 섣불리 성관계를 맺었다가 각인도, 결혼도 실패한 커플의 이야기를 흘린 건 지겸이었다. 관련된 가십성 인터넷 기사까지 몇 차례 보도하게끔 꾸며 지속적으로 불안감을 심어줬다. 이에 흔들린 소희의 부모는 표면적으로 혼인 전 순결을 유지하는 암묵적인 사회적 규칙을 핑계 삼아 양가의 비서가 동행할 것을 제안했다. 아버지는 아쉬운 대로 받아들였지만 기대가 식은 지훈은 가기 싫은 티를 계속 냈다.

“와 그 여행을 다른 여자랑 가면 48시간 동안 떡을 최소 네 번은 치는 건데. 짜증 나.”

지겸이 예상했던 대로였다.

“그럼 내가 대신 가줘?”

그리고 그는 제 앞에 놓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오… 그럴래?”

어린 시절 지훈은 지겸을 자주 이용했다. 공부든 체육이든 지겸이 훨씬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수학 시험날이라든지, 반별 축구 대항전이 있다든지 하면 지겸에게 자기 대신 나가 달라고 떼를 썼다. 처음엔 그나마 부탁하는 느낌이라도 있었는데, 싫다는 지겸에게 아버지가 매를 든 후로는 아예 대놓고 요구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집안에서 오래 일한 비서들도, 때로는 친부마저도 헷갈릴 정도로 외모와 목소리가 거의 똑같았다. 쌍둥이를 완벽하게 분간해내는 건 어머니가 유일했다. 그러니 선생님이나 학교 친구들이 바뀐 두 사람을 구분해낼 리가 만무했다. 설마 소희도 눈치챌 리 없겠지. 소희는 이 산장에 함께 온 그가 지훈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을 터였다.

눈이 제법 쌓이자 두 사람은 밖으로 나갈 채비를 했다. 소희가 아무 생각 없이 컨버스에 발을 끼워 넣자 지겸이 무릎을 굽혔다.

“그거 말고, 이거 신어.”

“아….”

소희 앞에 굽혀 앉은 그가 신발장에서 눈에서 신기 좋은 털 장화를 꺼냈다. 신발 안쪽엔 부드러운 털이 덧대어져 있고 겉은 방수 재질로 되어 있었다. 지겸이 그녀의 발목을 잡고 천천히 운동화에서 빼내 직접 장화를 신겨줬다. 소희는 얼떨결에 어린아이처럼 그가 신발을 신겨주는 걸 지켜보고 서 있었다.

한발씩, 한발씩. 신발을 신느라 몸의 균형이 흐트러지자 소희가 순간 손을 뻗어 남자의 어깨를 짚었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어깨와 팔에 자리 잡은 단단한 근육이 그녀의 손안에서 힘을 달리했다. 가까워진 거리만큼 그의 체향이 코를 간질였다. 겨울바람같이 청량하고 기분 좋은 페로몬이 온몸을 감쌌다. 평소 지훈에게서 느꼈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다 됐다.”

고개를 들어 지겸이 얼굴을 마주했을 때, 소희의 얼굴이 핑크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겨울 산어귀에 몰래 핀 동백꽃 같네. 피식 웃은 지겸이 손끝으로 소희의 코끝을 톡 하고 두드렸다.

쿵. 심장이 뚝 떨어지는 줄 알았다. 그런 기분은 난생처음이었다. 신발 속 보드라운 털에 감싸인 소희의 복사뼈 근처가 움찔댔다.

“가자.”

그가 손을 내밀었다. 소희가 제 손에 두 배는 더 되어 보이는 큰 손을 쳐다봤다. 생각해 보니 그 오랜 약혼기간 동안 손 한번 잡은 적이 없었다. 짧은 고민 끝에 소희도 손을 뻗었다. 둘의 손이 서로의 손가락 사이사이를 파고들었다. 따뜻했다.

뽀드득뽀드득. 무결한 눈 위에 두 사람의 발자국이 새겨졌다. 눈이 내려서인가, 깊은 산속인데도 날이 포근하기만 했다.

뾰족뾰족한 전나무의 잎 사이사이 내려앉은 눈이 마치 꽃처럼 피었다. 촘촘하게 들어선 키 큰 나무가 두 사람을 감싸듯 늘어서 하늘도 땅도 가득 메웠다. 그렇게 둘은 잡은 손을 놓지 않고 한참을 걸었다. 지나다 가지에 보송한 새 눈 같은 게 보이면 소희가 걸음을 멈춰 물끄러미 관찰했고, 지겸은 그 모습을 마음에 새기듯 바라봤다.

그와 함께 한 산책은 그해 소희에게 일어난 일 중 가장 편안하고 설레는 시간이었다. 서로 많은 대화를 나누진 않았지만 말 한마디 없는 순간조차 하나도 어색하지 않았다. 그게 숲에서 나온 향 때문인지, 아니면 곁을 지킨 남자에게서 배어난 페로몬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아가씨가 오늘은 많이 웃으시네요. 고민하시더니, 역시 오시길 잘하셨습니다, 전무님.”

저녁을 위해 바비큐 준비를 하던 지훈의 수행 비서가 넌지시 말했다. 그가 지겸인 줄 꿈에도 모르는 비서는 쓸데없는 이야기까지 늘어놓았다. 지금껏 두 사람의 데이트에 동행한 중 오늘처럼 소희의 얼굴이 밝았던 건 처음이라는 둥. 역시 두 분은 천생연분이라는 둥.

쓸데없는 소리 말라며 눈을 찌푸렸지만, 지겸은 사실 그의 말이 듣기 좋았다. 지겸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곁에 있는 소희는 편안하고 즐거워 보였다. 물론 자신을 지훈이라고, 그녀의 약혼자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걸 알기에 들뜨는 마음을 최대한 가라앉히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정작 그 순간을 함께한 건 자신인걸. 구지훈이 아니라 구지겸. 그러니까 괜찮지 않을까. 그가 계획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진행되어도. 지훈이 아닌 자신과 소희가 진짜 서로의 짝이 아닐까.

이른 저녁을 먹고 비서들이 각자 방으로 돌아간 시간, 소희는 1층 거실의 벽난로 앞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타닥타닥. 장작이 타들어 가는 소리와 함께 책에 몰두한 그녀의 뒷모습에선 은은한 향까지 느껴졌다.

“춥지는 않아?”

그의 등장에 소희가 책으로 내리깔았던 시선을 느릿하게 올려 떴다. 촘촘하고 길게 자리 잡은 속눈썹의 떨림에, 지겸이 자기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괜찮… 와. 고마워요.”

조심스레 다가간 지겸이 그녀에게 따뜻한 숄을 둘러주고, 마시멜로가 잔뜩 들어간 핫초콜릿까지 건넸다. 읽던 책을 무릎에 올려놓고, 작은 두 손으로 컵을 감싼 소희가 호, 호 불어 음료를 식혔다. 그 모든 움직임이 현실 같지 않았다. 지겸은 자기도 모르게 넋을 잃고 그녀를 봤다. 핫초코를 몇 입 마시던 소희가 그의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그의 손에도 책이 한 권 들려 있었다. 지훈이 책을 읽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소희는 놀라며 눈을 깜빡였다.

“위대한 개츠비? 오빠가요?”

“아내가 될 사람이 영문학과 교수인데. 이 정도는 읽어야지.”

지겸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소희가 앉아 있는 의자 아래쪽 카펫에 자리를 잡았다. 그의 어깨 한쪽이 소희의 무릎에 살짝 닿았다. 그녀가 자기도 모르게 긴장해 몸을 살짝 떨었다. 지겸은 그 모든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했다. 두 사람의 몸이 서로 닿은 부분에서 조금씩 열이 피어올랐다. 지겸은 당장 몸을 돌려 소희의 보드라운 입술을 삼키고 싶은 욕망을 애써 억누르며 책의 페이지를 넘겼다.

미국 서부의 가난한 노동자 출신인 개츠비는 우아함과 부르주아의 결정체 같은 여인 데이지를 사랑한다. 그는 그녀를 갖기 위해 자신의 출신을 거짓과 부로 포장하고, 이미 결혼까지 한 여인에게 다시 접근한다. 데이지는 돌아온 개츠비에게 본능적으로 이끌리지만, 개츠비의 죽음으로 둘의 사랑은 비극을 맞이한다.

지겸은 고전 속 순수한 욕망의 화신이라 여겨지는 인물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봤다. 그녀를 얻기 위해 모든 걸 속여야 하는 그는, 지금 이 순간조차 자신을 지훈이라고 믿고 있는 소희에게 죄책감을 느꼈다. 하지만 동시에 그를 사면해 줄 얇은 동아줄의 징조라도 붙잡으려고 애썼다. 분명 그와 함께 있는 소희는 좋아 보였다. 안온한 미소, 이따금 붉어지는 뺨. 그에게까지 전해지는 그녀의 조심스러운 떨림.

그가 지훈이었다면. 자신이 그녀의 약혼자였다면. 소희는 분명 지겸과 사랑에 빠졌으리라. 모두가 말하는 운명적 이끌림은 존재하는 게 분명하다. 알파와 오메가는 태어날 때부터 심장에 새겨져 있던 것처럼 서로를 알아볼 수 있다고 했다. 그동안 지겸은 이 이야기를 유치하다며 무시해 왔다. 하지만 이 겨울, 온종일 서로에게 자연스럽게 끌리는 자신과 소희를 보며 생각했다. 두 사람은 운명, 결국 사랑이 될 수밖에 없다고. 그러니까 더는 망설이지 말자고. 그 결과가 이렇게 될 줄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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