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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많이 약해졌던 탓일까. 아니면 긴장이 풀려서일까. 소희는 며칠 내내 거의 잠만 잤다. 중간중간 식사시간에 맞춰 지겸이 그녀를 깨웠다. 의사가 권했는지 꼭 하루 한 번은 병원 앞 공원을 산책했다. 원래도 말이 많은 사람은 아니었지만, 지겸은 소희의 상태를 묻는 것 외엔 말을 아꼈다.
“잠은… 자는 거죠?”
그렇게 사흘째 되던 날 결국 소희가 먼저 물었다. 종일 자느라 새벽에 가끔 깼는데, 그럴 때도 지겸은 침대 옆 의자에 앉아 있었다. 마치 그녀 옆자리에 뿌리내린 큰 나무 같았다. 그는 소희가 일어나는 걸 확인하면 발 빠르게 물을 챙겨주거나 필요에 따라선 간호사나 의사를 부르기도 했다. 그녀가 기억하는 한, 자신이 깨어있는 동안 지겸이 자리를 비우는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녀가 어린아이도 아니고. 부모라도 이 정도로는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당연히.”
지겸이 웃으며 답했다. 구름을 파고드는 달빛처럼 그의 눈동자가 함께 빛났다. 그의 페로몬은 신기했다. 소희는 그동안 오메가와 알파의 페로몬은 서로를 흥분시키고 성적인 행위의 쾌감을 증폭시키기 위해서만 작용하는 거라고 알고 있었다.
하지만 며칠 전 그가 구하러 왔을 때도 분명하게 느꼈다. 지겸의 체향은 소희를 안심시켰다.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비밀스러운 숲속, 첩첩이 큰 나무에 둘러싸여 보호받고 있는 기분. 외부의 침입자를 전혀 허용하지 않는 지겸이란 숲은 오직 소희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만 같았다. 병원에 온 뒤로도 머리로는 계속 지겸에게서 벗어나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반대였다. 이제 소희는 잠에서 설핏 깼을 때 그가 곁에 있다는 걸 확인해야만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래서 지금 소희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잠에서 깨어나니 늘 앉아 있던 그 자리에 지겸이 없었다. 텅 빈 병실에서 혼자 눈을 떴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아서 소희가 당황하며 눈을 깜빡였다. 순간 문이 열리더니 지겸의 동창이라고 했던 의사, 상아가 들어왔다.
“어머, 정말 일어났네요.”
“아, 네….”
“지겸이는 중요한 업무적 통화가 있다고 잠깐 자리 비웠어요. 혹시 소희 씨가 그동안 깰지도 모른다고 빨리 가보라고 하도 닦달을 해서…. 아, 미안해요. 저놈 저런 모습은 정말 처음 봐서.”
상아는 장난기를 섞어 한숨을 푹 쉬고는 소희 옆에 앉았다. 며칠을 지켜봤을 때 상아는 상당히 유쾌하고 밝은 사람이었다. 말수가 적고 차분한 지겸과는 전혀 공통분모가 없어 보였다. 둘은 어쩌다 저렇게 친해진 걸까. 학생이었을 때의 지겸은 어땠을까. 소희는 그녀가 모르던 시절의 그가 조금 궁금해졌다.
“학창 시절에 어떤 사람…이었어요?”
“구지겸이요?”
끄덕끄덕. 궁금해 물어놓고서는 괜히 그랬나 싶어 소희가 살짝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무표정일 때도 양쪽 끝이 살짝 올라간 소희의 입꼬리가 더욱 말려 올라갔다. 핑크빛이 도는 눈가가 사륵 접히고 한쪽 볼의 보조개가 쏙, 하고 깊이 팼다.
상아는 자기도 모르게 그런 소희를 멍하니 쳐다봤다. 진짜 예쁘네. 같은 여자가 봐도 계속 눈길이 갈 정도다.
그래서 구지겸 그 자식이 그동안 여자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건가?
지겸은 옛날부터 어디를 가나 단연 눈에 띄었다. 지금은 30대에 접어들며 좀 더 남자다운 느낌이 강해졌지만 20대 초반의 그는 묘하게 미소년 같은 외모였다. 어쩌다 카페테리아에 떴다 하면 학교의 온 오메가들이 몰려와 우글거렸다.
아이비리그였던 만큼 난다 긴다 하는 집안의 우성 오메가가 대부분이었다. 그 중엔 미국 유명 호텔 체인 상속녀와 미국 전 대통령 딸도 껴 있었다. 모두 지겸과 눈 한번 마주치기를 꿈꾸며 축축하고 달콤한 페로몬을 마구 흘려댔다. 그래도 그는 누구에게도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나중엔 그런 상황이 너무 피곤하다며 강의만 듣고 서둘러 캠퍼스를 빠져나왔다.
하지만 그런데도 과거의 지겸이 어땠는지를 묻는다면 상아의 답은 하나다.
“그 녀석. 그냥 뭐, 외로운 놈이죠.”
“네?”
예상치 못했던 답에 소희가 당황한 듯 반문했다.
“본인이 먼저 주변 사람을 따돌린달까. 저도 제 쪽에서 개의치 않고 자꾸 달라붙으니 그나마 상대해 준거죠. 우성 알파만 받는 학교 프랫터니티(fraternity/남학생 사교 클럽)에서 열 번을 넘게 들어와 달라고 사정했는데도 거들떠보지도 않은걸요.”
하긴, 지겸이 다른 남학생들이랑 기숙사에 몰려 살며 자선 파티 같은 걸 여는 모습은 상상이 안 간다.
“한국도 그러는지 모르겠는데, 미국은 이런저런 행사나 졸업식을 엄청나게 크게 하거든요. 게다가 알죠? 우성 알파, 오메가 부모들은 또 얼마나 유난인지. 선물에 꽃에 난리가 났는데. 부모든 누구든 오는 사람 아무도 없었던 거, 딱 우리 둘.”
“아….”
하긴 소희도 궁금했었다. 보통 쌍둥이를 이렇게 다른 환경에서 교육하는 경우는 잘 없을 텐데. 지훈은 내내 한국에 있는데 지겸만 어린 시절부터 미국에서 지냈다는 게 얼핏 잘 이해 가지 않았었다.
“우리 부모는 다 베타예요. 저 같은 경우는 정말 특수 케이스라. 혹시 딸 앞길에 방해될까 늘 전전긍긍하시거든요. 제 주변은 대부분 대단한 집안이니까. 그래서 아예 학교 행사는 한 번도 오지 않으셨어요. 다른 애들이 혹시나 절 무시할까 봐.”
그렇게 말하는 상아의 얼굴에 살짝 그늘이 졌다. 자세한 내막은 모르지만, 소희는 그녀의 밝은 겉모습 뒤 숨겨진 우울을 알 것만 같았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취업 지도를 하며 정말 다양한 가정사를 들었다.
우성 알파, 오메가라고 해서 그들의 삶이 다 순탄할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자녀에 대한 기대치가 높을수록 좋은 부모가 되기란 쉽지 않다. 특히 자녀의 출세를 본인 인생의 성공과 연결 짓는 한국의 부모들은 양육 방식에 문제가 많았다.
반대의 경우라면 더 심각하다. 0.01%보다 낮은 확률로 베타 집안에서 발현한 우성 알파나 오메가들은 뛰어난 능력에도 불구하고 능력 발휘를 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었다. 대대로 내려오는 우성 집안끼리의 결속이나 유대가 단단해서 주류 사회에도 끼지 못하고 겉돌기 일쑤였다.
“아, 설마 우리 사이 오해하는 건 아니죠? 일단 우린 그렇게 될 수가 없는….”
“아니에요. 정말 그런 거.”
소희가 혹시 상대방을 민망하게 만들었나 싶어 과하게 손사래를 쳤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상아가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소희도 따라 웃었다.
“둘이 뭐가 그렇게 재밌어?”
언제 왔는지 지겸이 문가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 있었다.
“야! 왔으면 왔다고 하지. 은근 음흉해?”
“소희 몸은?”
상아가 혀를 찼다. 친구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고 오로지 소희 걱정뿐이라면서.
“어제부터 언제든 퇴원해도 된다고 했잖아. 걱정된다고 더 있어야 한다고 한 건 너고. 병원 갑갑해. 소희 씨 퇴원시키자.”
“…그래. 의논해 볼게.”
“그럼 방해꾼은 이미 빠져줘야지. 야, 그만 좀 노려봐. 너 설마 나한테까지 질투하는 건 아니지? 늦게 배운 도둑질이 무섭다더니. 구지겸이 이런 사랑꾼일 줄이야.”
“내가 대체 언제…!”
“소희 씨, 너무 재밌었어요. 언제든 얘 욕 같이 해 줄 사람 필요하면 전화해요, 알겠죠?”
상아는 키득거리며 당황하는 지겸의 변명을 끊고는 문밖으로 사라졌다. 당황했는지 지겸이 입가를 가리더니 시선을 돌렸다. 그의 귀 주변이 어느새 붉어져 있었다. 소희가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걸 느꼈는지 지겸이 다가와 물었다.
“정말 괜찮아? 새벽에 자꾸 눈을 찌푸리길래, 혹시 몰라서….”
저 남자는 왜 그렇게 자신이 걱정스러울까. 그는 소희가 입원한 내내 안절부절못하고 주변을 맴돌았다. 소희가 기침이라도 한번 하면 그의 몸이 들썩였다. 별것도 아닌 거로 자꾸 간호사를 부르겠다는 걸 몇 번이나 말렸는지.
“컨디션 좋아요. 퇴원해도 될 것 같은데…. 계속 누워 있는 것도 답답해요.”
소희의 착각일까. 퇴원하고 싶다는 말에 지겸의 눈썹이 조금 꿈틀댄다.
“그래. 그래야겠지….”
지겸이 소희 가까이 의자를 당겨 앉았다. 남자의 짙은 눈썹이 가지런해진다. 그가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소희야, 할 말이 있어.”
“네.”
“한국으로… 돌아가자.”
안 그래도 지겸이 뭐라고 하든 무조건 돌아갈 생각이었다. 이렇게 끔찍한 곳에, 싱가포르에 조금도 더 있고 싶지 않았다. 이 나라에 와서 모든 게 엉망이다.
“…네.”
담담한 소희의 대답에 지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린다. 분명 웃는 표정인데, 남자의 눈은 하나도 웃고 있지 않았다.
“사후피임약… 처방받았었다고 들었어.”
아. 소희가 난처한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숙였다. 여전히 잘 모르겠다. 지겸을 어떤 얼굴로 마주해야 할지. 그가 자신을 구했다. 그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그녀를 속였던 과거가 바뀌진 않는다. 다만 이제 저 사람이 하는 말이 전부 거짓말 같지만은 않다.
소희는 매 순간 헷갈렸다. 지겸이란 사람도. 그에 대한 자신의 감정도. 지금 지겸에겐 누구보다 그녀가 1순위인 것처럼 보인다. 오롯이 그녀만을 위하는 남자의 행동에 소희는 끊임없이 혼란스러웠다. 저도 모르게 그를 향해 미소를 짓다가도, 그런 스스로에게 놀라 입을 다물고는 했다.
“하지만 너에 대한 내 마음, 진심이야.”
소희가 고개를 들어 지겸과 눈을 마주쳤다. 그의 눈동자는 항상 저렇다. 캄캄한 밤하늘 같아. 어둡고 깊은 심연 속에서, 무수히 빛나는 별들을 발견하는 느낌. 깊이도 넓이도 가늠할 수 없는 우주를 떠올리게 한다.
한 번도 지구 대기권 밖을 나가본 적은 없지만. 하늘은 그저 하늘이 아니라 우리를 둘러싼 광대한 우주의 아주 좁은 일부를 엿보는 것이다. 이제 그녀도 안다. 다른 건 다 속였다 하더라도, 그의 저 말만은 진짜다. 제대로 파헤치기 시작하면 끝이 없을까 봐 두려울 정도로 깊은, 마치 우주 같은 애정.
구지겸은 임소희를 사랑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