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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러지듯 잠든 소희 곁을 지겸은 잠들지 않고 지켰다. 제 허벅지의 상처를 치료하는 동안에도 혹시 소희가 깰까 봐 대충하고 끝내라고 하도 닦달하는 통에 상아에게 욕을 바가지로 먹기도 했다.
깊게 잠든 소희가 숨을 쉴 때마다 지겸의 안에도 잔잔한 물결이 일었다. 촘촘하고 길게 자리한 속눈썹이 파르르 떨릴 때면 그를 둘러싼 공기까지 함께 진동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종일 시달리고 괴로웠던 걸 전부 잊은 사람처럼 한없이 평온한 얼굴이었다.
지겸이 눈을 감았다. 아까 보았던 장면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는다. 잊어보려 눈을 감으면 더 생생해지기만 한다. 굵은 밧줄에 묶인 소희의 몸이 울긋불긋했던 것. 잔뜩 부었던 눈가. 그녀도 모르는 사이 자꾸만 뺨을 타고 흐르던 눈물.
[네 여자, 사후피임약을 받고 싶대서 줬어. 그런데… 이 세상 어떤 오메가가 각인한 남자와 노팅까지 하고 피임약을 먹을까.]
지겸이 미리 불러뒀던 경찰에 연행되면서 승현이 남긴 비아냥이 머릿속에 자꾸 맴돌았다.
원치 않는 남자의 아이를 임신하게 될 수도 있다는 것. 그녀는 그게 얼마나 두렵고 싫었을까. 승현의 말에 지겸이 느낀 것은 분노가 아니라 좌절과 슬픔이었다. 기대했던 순간들이, 게요리나 포장하고 꽃을 사며 설렜던 스스로가 얼마나 한심한지.
천국. 대체 그게 뭔지 몰라도, 그녀와 함께하며 지겸이 느낀 걸 말하라면 그 단어와 가장 비슷하지 않을까. 떨고 울면서도 그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그녀를 보며 자신이 느꼈던 충만감과 빠듯한 행복. 소희를 품에 안은 순간 알았다. 이젠 그 어떤 것도 그에게 이런 감정을 느끼게 할 수 없을 거다. 제 짝을 찾은 늑대는 망설이지도, 뒤돌아보지도, 주변을 힐끔거리지도 않는다.
오직 한 사람. 지겸에게 소희는 죽을 때까지 그렇게, 자신에게 유일한 여자일 테다.
유일신을 믿는 자에게 다른 존재들은 아무리 대단할지라도 잡귀이거나 평범한 인간, 그도 아니면 사람을 미혹하려는 사단일 뿐이다.
“으음. 흑….”
안 좋은 꿈을 꾸는지 소희가 몸을 갑작스레 몸을 떨었다. 신음이 섞인 울음소리를 뱉어내며 감은 눈이 찌푸려진다. 괜찮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토닥여주려고 뻗었던 손을 그가 흠칫 놀라며 거둬들였다. 손끝조차, 댈 수 없다. 그는 자격이 없으니. 소희는 악몽을 꾸는 걸까. 그녀의 악몽에 나오는 게 자신은 아닐까.
꼴좋다, 구지겸. 그의 마음이 아무리 진실인들 무슨 소용일까. 소희를 향한 진심이 한순간의 욕정 위에 쌓아 올려진 모래성이 아니라, 기반부터 튼튼히 자리 잡고 천천히 단단하게 쌓아 올린 건축물이든 아니든. 지겸이 끔찍할 소희에겐 아무 의미 없는 이야기다.
지겸이 무슨 변명을 할 수 있을까. 전부 그의 탓인데. 속이고 취한 것도 모자라 소희를 끝까지 몰아붙였다. 본능과 이성의 경계에서 흔들리고 혼란스러웠을 그녀를 제대로 잡아주지도 못했다.
구지훈 같은 놈의 아내가 되게 둘 수는 없었다. 베논 제약과 재림재단의 오랜 유착과 비리 때문에 그녀가 다치지 않도록 보호하고 싶었다.
아니다. 전부 변명에 불과하다.
실은 지독하게도 그녀를 원했고, 갖고 싶었다. 그래서 소희가 드디어 그의 여자가 되었을 때.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아니, 그가 알던 지금까지의 세상이 모두 바뀌었다. 그녀가 지겸의 새로운 세상이 되었다. 그 황홀한 세상을 모르던 때로, 그녀의 남자가 아니던 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였다. 영원히 그의 곁에만 둘 생각을 했다. 그를 제대로 받아들이지도 못하는 여자를 숨도 못 쉬게 몰아붙였다. 마치 그게 보호하는 것인 양 스스로와 그녀를 모두 기만하면서.
그러니까 결국 자신은 아버지와 똑같은, 아니 그보다 더한 끔찍한 알파에 불과했다.
“소희야….”
다행히 꿈이 멎은 건지 소희의 표정이 편안하게 돌아왔다. 반짝이는 갈색 눈이 보이지 않아도 여전히 너무 예쁜 여자를 지겸이 찬찬히 바라봤다.
어린 시절의 소원처럼, 자신이 차라리 베타였다면. 그랬다면 더 나았을까. 오래 키워온 진심을 고백했을 때, 소희가 지겸의 마음을 똑바로 바라봤을까. 페로몬이나 알파의 종족적인 본능 때문이라고 지금처럼 경멸하지 않고.
그녀의 알파일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바보같이도 위안했었지. 그 어느 날의 자신이 경멸스러웠다. 지겸이 고개를 푹 숙였다. 심장이 멋대로 뛰었다. 귓가까지 쿵쾅대는 통에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프다.
그때 휴대폰에서 알람이 울렸다. 자정이 지나며 날짜가 바뀌었다. 휴대폰 소리가 어머니의 기일을 알렸다.
20년 동안 단 하루도 잊은 적 없는 날을… 잊고 있었네. 하필 오늘이 그 날이다. 끔찍한 우연에 지겸이 비어져 나오는 욕을 삼켰다.
“김 실장님. 늦은 시간 미안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내일 말입니다.”
- 네, 알고 있습니다. 꽃은 늘 하시는 거로 준비해 뒀습니다. 내일 제가 직접 가져다 놓겠습니다.
“선영원은….”
올해는 도련님이 가실 수 없으니 따로 봉사자를 구해 뒀습니다.
지겸은 그동안 어머니의 기일마다 보육원을 찾았다. 어머니가 직접 세우고 오래 정성을 들여 돌보셨던 곳이다. 어릴 때 부모님의 손을 잡고 자주 갔던 것을 지겸은 기억하고 있다. 선영원. 어머니의 이름을 딴 곳. 그런 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아신다면, 분명 어머니는…. 후.
“고맙습니다, 김 실장님. 오늘 일도, 고생 많으셨어요.”
전화를 끊은 지겸이 손으로 마른세수를 반복했다.
기일이 돌아올 때마다, 지겸의 나이가 어머니의 나이와 가까워진다. 몇 년 후에는 어머니도 겪어본 적 없는 나이를 살게 되겠지.
생각해 보면 어머니는 어떤 상황에도 지겸과 지훈 앞에서 짜증을 내거나 인상을 찌푸린 적이 거의 없다. 울었던 기억도 별로 없다. 항상 완벽했던 미소. 초승달처럼 부드럽게 둥그레지던 눈매. 그런데 이상하게도 지겸의 기억 속 그녀는 항상 쓸쓸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
그건 아마도 어머니의 뒷모습 때문일 거다. 어머니는 종종 정원에 심어뒀던 벤자민 나무 앞에 오래 서서 무언가를 한참 바라보곤 했다. 아직도 기억나는, 아이 눈에도 가녀렸던 어깨 위로 부딪치던 여름날의 햇볕 같은 것.
[엄마 뭐 봐요?]
물으면 그녀는 웃으며 항상 다른 걸 답했다. 날아가는 새끼 참새라거나 몽글몽글한 양떼구름 따위.
하지만 정말 그녀가 보고 있던 건 무엇이었을까.
어머니는 아버지와 함께가 아닌 이상 집 밖을 나가는 일이 거의 없었다. 지겸이 유치원 때였나. 지훈이 같은 반 친구가 장난감을 빌려주지 않는다고 들고 있던 플라스틱 컵으로 아이의 얼굴을 때렸다. 놀란 어머니가 유치원에 달려왔는데, 상대 아이는 아버지가 대신 왔다. 누가 감히 여자애 얼굴을 때렸냐며 붉으락푸르락 왔던 아저씨가 무서웠다. 지겸과 지훈은 겁이 나 몰래 숨어서 원감 선생님 방을 창문 너머 훔쳐봤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엄청 화가 났던 아저씨가 엄마를 보며 연신 고개 숙이고, 싱글벙글 웃는 게 아닌가.
그 날 이후 어머니는 유치원에도 오지 않으셨다. 무슨 일이 생기면 아버지의 비서였던 이모가 대신 들르곤 했다.
그땐 어린 마음에 그저 서운했다. 유치원 끝나고 나왔을 때 문 앞에서 엄마가 기다리고 있는 애들이 부러웠다. 엄마는 왜 우리를 보러 오지 않냐고 떼를 쓰면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지겸과 지훈을 양팔에 꼭 껴안았다. 우리에게 얼굴이 보이지 않게 됐을 때, 껴안은 등 뒤에서 어머니는 몰래 울음을 참았을까.
이제는 텅 비어가던 그녀의 속마음을, 그늘진 뒷모습의 의미를 이해한다. 안다. 아버지는 그 누구보다 더 어머니를 사랑했다. 하지만 사랑받는다고 외롭지 않은 건 아니다. 어떤 종류의 애정은 상대방에게 폭력이 되기도 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놓아주는 건 억지로 붙잡고 있는 것보다 더 큰마음이 필요한 법이다. 아버지가 끝까지 못 했던 것. 결국 어머니를 죽음으로 몰고 가게 한 것. 집착은 서로가 똑같이 뜨거울 때만 사랑의 척도가 된다. 결과적으로 저 또한 아버지의 자식이라 어쩔 수 없는건가….
“음….”
뒤척이는 것마저 사랑스러운 여자.
하지만 가장 증오하는 사람과 똑같은 짓을 할 수는 없다. 그러니까… 놓아주자. 사실 아직도 정말 그럴 수 있을지 자신은 없지만.
소희 곁에 머무르고 싶었다. 할 수 있는 한 오래, 아니 죽을 때까지. 오해를 풀고, 그녀를 지키고, 깊이 사랑하면 어느 날은 소희가 자신을 거부하지 않는 날이 오리라 믿었다. 진심은 꼭 통할 거라고. 시작이 어떻든, 끝은 사랑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게 얼마나 큰 오만인 줄도 모르고.
사랑하는 사람에겐 무엇이든 아깝지 않다. 소희가 원한다면, 유치하다 해도 정말 하늘 끝까지 닿는 사다리라도 구해 와 별이든 달이든 따다 줄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지금 그녀가 가장 원하는 건 그의 곁을 떠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들어줘야지. 유일하게 사랑하는 여자가 바라는 단 하나.
달빛이 비친 것인지 창문을 통해 희미한 빛이 비친다. 소희가 감은 눈을 움찔댄다. 지겸이 창문 앞으로 다가가 암막 커튼을 더욱 단단히 쳤다. 아무리 아름다운 달빛이라도 그녀의 눈을 찌푸리게 한다면 의미가 없다. 빛도 필요할 때나 반가운 존재다. 소희에게 지금 필요한 건 어쩌면 어둠이다. 자신이 없는 편안하고 온전한 쉼.
지겸이 무언가를 결심한 듯, 잠든 소희 곁으로 다가왔다. 쪽. 허리를 굽혀 하얗고 동그란 이마에 아주 조심스럽게 입을 맞췄다. 천천히 눌렀다 떨어지는 그의 입술이 많이 떨리고 있었다. 이제 손끝도 대지 않아야 한다고 결심했지만, 마지막이니까. 이 정도는 봐주겠지. 훔쳐보는 달빛도 없으니까.
소희를 놓아주자.
지겸은 마음속 깊이로 기꺼이 어둠을 불렀다. 암막 커튼으로 빛을 차단하듯이 깊숙이 숨긴 뒤 단단히 막았다. 그녀로 가득한, 절실한 그의 진심이 더는 새어나가지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