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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목에 메스가 꽂힌 승현이 소리를 지르자 소희는 놀라 움찔댔으나 결코 눈을 뜨지는 않았다.
지겸은 버둥대는 승현을 쉽게 제압한 채 메스로 빠르고 정확하게 손목의 건을 끊어냈다.
손목에서 손가락 쪽으로 향하는 건이 끊기면 기능 회복이 어렵다. 아킬레슨 건이 잘린 사람이 걷지 못하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승현은 아마 평생 오른손을 제대로 쓰지 못할 것이다. 의사 짓도 더는 못하겠지.
“으흐으으으윽! 악! 죽여버릴 거야. 으아아악!”
손목을 부여잡고 버둥거리며 우는 남자를 두고 지겸이 소희에게 다가갔다. 방금 전 단숨에 승현을 쓰러뜨린 남자가 맞는지. 소희를 풀어주는 지겸의 손은 덜덜 떨렸다.
“미안해. 소희야, 미안해. 다 내 탓이야. 전부 내 잘못이야.”
소희의 몸 전체를 압박하던 밧줄이 그의 손에 잘려나가고 풀어졌다. 지겸의 울먹이는 듯한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아 심장을 긁어내는 것 같은 비참한 심경이 소희에게도 그대로 전해졌다. 마침내 안도의 감정이 그녀 전신에 퍼졌다.
“이제 괜찮아. 괜찮을 거야….”
지겸이 소희를 깊숙이 끌어안았다. 통증 때문에 괴로워하는 승현의 신음소리도, 따뜻하게 다독이며 귓가를 감싸는 지겸의 목소리도 그녀에게서 조금씩 멀어졌다. 너무나 따뜻하고 안온한 지겸의 품 안에서 소희는 간신히 부여잡고 있던 정신의 끈을 놓았다.
***
희미한 알코올 냄새. 익숙한 그 남자의 향. 정신을 차린 소희가 병실에서 겨우 눈을 떴다.
“…소희야.”
그녀가 잠든 내내 옆을 지키고 있었던 지겸이 벌떡 일어났다.
“좀 어때? 괜찮아?”
지겸의 눈가가 어쩐지 촉촉하다. 그게 꼭 상처받은 짐승의 눈 같아서. 소희는 자기도 모르게 답 없이 그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많이 안 좋아? 의사 부를까?”
그의 얼굴이 걱정으로 조금 일그러졌다. 괜찮다고 대답하려다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아서, 소희가 그저 고개를 내저었다. 몸이 무겁고, 묶였던 여기저기가 조금 쓰라리고 욱신거리는 외에 특별히 아픈 곳은 없었다.
“그래. 다행이다….”
긴장했던 표정이 풀어졌다. 지겸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려는 듯 습관적으로 손을 뻗었다가 바로 거뒀다. 주춤하는 그의 손끝이 조금 떨리는 걸 소희는 미처 보지 못했다.
다시 자리에 앉으려던 지겸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아무래도 다쳤던 허벅지 쪽에서 통증을 느끼는 것 같았다.
“다리….”
그제야 목소리가 나왔다. 소희가 지겸의 허벅지 쪽을 쳐다보며 물었다. 눈을 거의 감고 있어 자세한 장면들은 보지 못했지만, 정신을 잃기 전 그의 바지를 온통 적시며 흘러내리던 많은 양의 피를 보았던 게 기억이 났다.
“아.”
자기 상처 따위는 완전히 잊고 있었다는 듯이 지겸이 어깨를 살짝 으쓱하고는 의자에 앉았다.
“아무렇지도 않아. 깊은 상처도 아니었어.”
그럴 리가 없는데. 그는 정말 신경도 쓰이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보여 달라고 한다고 보여줄 것 같지도 않았다. 궁금했지만 소희도 더 묻지 않았다. 얼마나 다친 건지, 정말 괜찮은지 궁금한 자신을 들키는 것도 어쩐지 싫었다.
“그 사람은….”
소희가 뭔가를 더 물어보려다 제 입술을 깨물었다. 그 인간의 얼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았다. 심장도 점점 빠르게 뛰었다. 그런 그녀를 눈치채고 지겸이 조용히 답했다.
“이승현, 우선 싱가포르 경찰에 체포됐어. 현지에서 수사 후 기소될 거야.”
승현은 싱가포르 영주권자이지만, 범죄 사실이 입증되는 즉시 이곳에서 추방될 가능성이 컸다.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 한국인이기 때문에 국내 수사기관에서 범죄인 인도 요청을 할 테고, 한국으로 송치되면 국내법에 따라 처벌받겠지.
지겸은 그의 수족, 김 실장을 시켜 승현의 전적을 모두 조사하고 있다. 같이 걸어 넣을 수 있는 건 전부 끌어모아서 최대한 오래 사회로 나오지 못하게 할 계획이었다. 의사면허는 수사 과정에서 정지되는 게 기본이지만, 아예 취소되게끔 만들 생각이다. 뭐, 면허를 다시 취득한다 해도 그 손으로는 무리겠지만.
“소희 네… 사진과 영상은 경찰 도착 전에 전부 지웠어.”
떠올리게 하기 싫어서 아예 말하지 말까, 생각도 했으나 그녀로선 가장 궁금할 일이라 숨길 수만은 없었다.
“기존에 다른 오메가들에게 저질렀던 범죄 관련 자료가 컴퓨터에 그대로 남아 있어서. 그걸로 범죄 사실 입증은… 어렵지 않을 거야. 피해 사실을 입증해 줄 다른 증인도 구했고.”
“아….”
그 말에 소희가 침대 시트를 당겨 말아 쥐었다. 떨리는 손끝을 응시하는 지겸의 눈이 짙게 가라앉았다. 그녀의 손을 감싸 쥐고 싶었다. 괜찮다고, 이젠 걱정할 일 없을 거라고 다독이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에게 과연 그럴 자격이 있을까.
그때였다. 문이 열리고 키가 큰 여자 의사가 한 명 들어왔다.
“임소희 환자분, 깨어나셨네요. 좀 어떠세요? 괜찮으세요?”
한국인 의사였다. 커트 머리의 여자는 선이 굵고 시원시원한 느낌의 미녀였다.
“…네.”
“다행이에요. 지겸이가, 아. 둘이 의대 동기거든요. 어젯밤에 사색이 되어서는…. 이 녀석 안 지 10년이 다 됐는데 어제처럼 엉망인 모습은 처음이라.”
“이상아.”
지겸이 수다를 들어놓으려는 제 친구를 막았다.
“아이고, 알겠어. 치사하고 무서워서 원 참. 대화한다고 닳냐? 하여튼 크게 다친 곳은 없어 다행이에요, 소희 씨. 당분간은 푹 쉬고, 잘 먹고 최대한 안정을 취하는 게 좋아요.”
“감사합니다.”
상아가 혈압이나 바이탈 등 소희의 상태를 확인하고 남은 수액의 양도 체크했다.
“지겸아, 잠깐만. 소희 씨, 이 녀석 5분만 빌려 갈게요. 괜찮으시죠?”
“네? 네….”
왜 자신에게 허락을 받는지 몰라 당황하는 소희에게 상아가 눈을 찡긋했다.
“금방 올게. 혹시 뭐든 필요하거나 무슨 일 생기면….”
지겸이 상아를 따라 일어서다 말고 소희에게 몸을 굽혔다. 잠시라도 그녀 곁에서 떨어지는 게 마음 쓰이는 모양이었다.
“야, 구지겸, 5분 동안 아무 일도 안 생겨. 와… 너 같은 놈도 이런 팔불출이 될 수 있을 줄은….”
“넌 좀 조용히 하지.”
“네, 네 알겠습니다. 입 다물지요.”
고개를 몇 번 내젓더니 상아가 먼저 병실을 나갔다. 한숨을 푹 쉰 지겸이 소희 쪽을 다시 돌아봤다. 정말 다녀와도 괜찮냐고 묻는 듯한 그의 표정에 소희가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끄덕여 줬다. 그제야 조금 안심이 되는지 걸음을 옮기다가도 지겸은 몇 번이나 더 뒤를 돌았다.
남자의 커다란 등이 문밖으로 사라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소희의 가슴께가 간질거렸다. 괜히 기분이 이상했다. 소희가 이불을 끌어당겨 몸을 덮었다. 내내 곁을 지키던 지겸이 자리를 비워서인가. 어쩐지 그녀 주변에 한기가 돌았다.
***
지겸이 병실 옆 복도에 비스듬히 기대섰다. 밤새 거의 자지 못해서인지 두통이 조금 일었다. 눈을 감고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는 지겸에게 상아가 물었다.
“어떻게 된 건지 설명 좀 해 봐.”
“뭐를.”
“저 환자분, 그러니까 임소희 씨. 너희 형 약혼녀 아니었어?”
“그래서.”
상아는 혹시 지나가는 간호사라도 들을까 봐 주변을 살피며 최대한 조심스럽게 물었는데, 지겸의 답은 너무 쉬웠다.
“와… 미친놈이었네 이거?”
“새삼스럽게.”
“야. 너 아까 소희 씨한테는 막 이것저것 물어도 보고 말도 길게 하더니만. 나한테는 또 이러냐. 단답형 인간 진짜 답답하다 답답해.”
“응.”
“응? …어휴 말을 말아야지, 내가. 그나저나 각인…한 거지?”
지겸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표정에 흔들림은 없었으나, 상아의 얼굴은 어두워졌다.
“너 심해. 요즘 아무도 저 정도로 안 해. 소희 씨, 네 페로몬에 완전히 절여졌잖아.”
그건 누워 있는 환자에 대한 걱정뿐 아니라, 지겸에 대한 우려이기도 했다. 상아는 가장 이성적이라고 생각했던 친구의 상상하지도 못했던 모습이 당황스러웠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물론 사이클을 맞이한 알파와 오메가가 섹스한 뒤 서로의 몸에 영역 표시를 하듯 짙은 페로몬을 남기는 건 방어기제에서 나온 일종의 본능이다. 하지만 저렇게까지 유난인 경우는 흔치 않다. 지겸이 그랬던 건 당분간 호텔에서 둘만 지낼 생각이기 때문이었다. 소유권을 주장하듯 욕심껏 그의 체향으로 그녀를 감쌌다. 타고난 페로몬이 강하고, 그도 모든 게 처음이었기에 잘 조절하지 못했던 것도 있다.
“누가 봐도 네 오메가라고 광고하고 다니는 꼴이라고. 다른 사람들 시선도….”
페로몬을 느끼지 못하는 베타들이야 아무것도 모르겠지만, 상아 자신 같은 보통의 알파나 오메가가 소희를 본다면 지나치기 어려울 것이다. 저 정도로 강한 알파 페로몬은 찾기도 어렵지만, 그 자극으로 증폭된 소희의 페로몬도 눈에 띌 정도였다.
감히 덤빌 수 없을 정도로 우월한 알파의 짝이라는 걸 알 수 있으므로 허튼짓할 알파는 없다. 하지만 상아가 보기에도 눈이 가고 탐이 났다. 로열 알파가 저 정도로 티가 나게 보호하려 하는 매력적인 오메가라. 뛰어난 짝을 차지하고 싶어 하는 건 인류가 가진, 특히 알파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 아닌가.
“휴. 일단 몸 상태가 너무 안 좋아. 당분간 각별히 신경 써야 해. 보양식은 물론이고, 한국 가서 한방약 같은 거 지어도 좋을 것 같아.”
상아가 이런저런 유의사항을 늘어놓는데 지겸이 챙겨 들으면서도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게 느껴졌다.
“왜 또. 너 뭐 딴 궁리하지.”
뭔가를 결심한 듯 표정이 바뀐 지겸이 물었다.
“전에… 얘기했던 그 의사, 연락처 알려줄 수 있어?”
“의사? 누구? 너는 자기가 하면 되지 왜 자꾸 다른 의사를 찾…”
“각인 풀어준다던.”
“…뭐?”
이번엔 정말 놀란 상아가 거의 소리를 지르다시피 했다.
“너… 설마 네가 필요해서 묻는 거야?”
지겸이 대답하지 않자 갑갑해진 상아가 답을 재촉했다. 꽤 오랜 시간 친구로 지내는 동안 속을 알 수 없는 녀석이라 생각하긴 했지만, 이 정도인 줄은 몰랐다. 무엇보다 저 정도로 강한 흔적을 오메가에게 묻혔다는 건 그의 감정이 가볍지 않다는 방증이라 더욱 놀랐다.
“그냥 부탁할게. 네 추천이면 돌팔이는 아닐 테니.”
“알려줄 수는 있는데…. 너 그거, 상대방이 엄청나게 고통스럽다는 건 알고는 있지?”
알파와 오메가가 한번 각인하면 죽을 때까지 서로만 바라본다는 게 정설이었으나 의학의 발전으로 그도 옛말이 됐다. 흔한 경우는 아니지만, 각인을 풀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상관없어.”
소희가 원한다면, 다른 게 더 뭐가 중요할까. 잠든 소희 곁에서 지겸은 결심을 굳혔다.
“소희 씨도 동의한 거야?”
“글쎄….”
지겸의 입매가 쓸쓸하게 비틀렸다. 동의하는 정도가 아니라 진심으로 안심하겠지. 그렇게 생각하는 그의 마음 한구석이 발에 밟힌 낙엽처럼 바스락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