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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릎 꿇은 지겸을 보는 승현의 눈에 번뜩이는 기쁨이 스쳤다.
그걸 확인한 지겸이 속으로 확신했다. 이런 식으로 계속 저놈에게 우월감을 심어주고 만족시키면 적어도 소희를 해치진 않으리라는 것.
그런 계획을 모르는 소희는 승현 앞에서 필요하면 정말 자해라도 할 듯한 기세의 지겸이 걱정이 됐다. 그녀의 심장이 오히려 아까보다도 비정상적으로 세게 뛰었다.
“너도 잘 알잖아. 다들 내게 로열 알파니 뭐니 하는 거. 로열 알파들은 웬만한 짓에도 잘 견디는 건 알고 있겠지. 그러니 소희는 건드리지 말고 하고 싶은 게 있으면 다 나한테 해.”
지겸이 입고 있던 셔츠 단추를 천천히 풀어 옷을 벗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전개에 오히려 승현이 조금 당황했다.
“뭐, 뭐 하는….”
“찔러.”
“뭐?”
“찌르든 긋든 네 맘대로 해.”
승현이 겁준다고 소희 가슴 앞에서 깔짝대던 메스를 거둬들였다. 침까지 꼴깍 삼켰다. 처음부터 진짜로 칼을 쓸 생각은 없었다. 그저 두려워 벌벌 떠는 두 사람의 모습을 감상하고 싶었을 뿐. 하지만 지겸이 이렇게 세게 나오니 도리어 위축됐다.
소희도 놀라서 지겸을 쳐다봤다. 칼을 눈앞에 두면 누구든 두려워하는 게 당연할 텐데, 지겸의 눈빛은 간절했다. 오로지 소희만을 구할 수 있다면 뭐든 할 수 있다는 눈빛. 저 남자는 왜 저렇게까지. 자신이 뭐라고. 저 남자한테 자신이 대체 어떤 의미이길래.
“얼마든지 대줄 테니 다 해. 목을 조르거나 원하는 만큼 패도 되고.”
솔직히 저 인간이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고 하면, 그래서 소희가 무사할 수 있다면 자신을 죽이라고도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순 없었다. 소희를 여기 혼자 두고 죽을 순 없으니까. 그런 두려움에 지겸도 그 말만은 아꼈다.
“큼, 큼. 그럼 일단 돈부터 내놔. 구지겸 너 돈 많잖아.”
“얼마나. 내 몫으로 된 베논 제약 주식도 넘길 수 있어.”
슬슬 구미가 당기는지 승현의 눈빛이 바뀌었다.
“진짜? 전부?”
“말했잖아. 원하는 건 뭐든. 그러니까, 둘이서 차근히 얘기해. 우선 소희는 먼저 풀어 주….”
“에이 어디서 개수작이야, 구 교수. 누굴 바보로 아나. 내가 열성이지만 그래도 알파야. 그 정도 머리도 안 굴러갈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일단 10만 달러. 지금 보내. 10분 안에 안주면 네 여자….”
승현의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지겸이 주머니에서 수표책을 꺼내들었다.
“30만 달러.”
지겸이 수표에 금액을 적고 서명했다. 승현이 그 모습을 지켜보며 입맛을 다시더니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직접 가져와.”
지겸이 꿇었던 무릎을 일으키려 하자, 승현이 재빨리 덧붙였다.
“아니, 기어서.”
“아.”
지겸이 잠시 멈칫하자 그게 재밌는지 승현이 키득댔다. 오히려 소희가 더 충격적인 말을 들은 듯 아연실색했다. 하지만 지겸은 곧 표정의 변화도 없이 태연하게 남자의 발밑까지 무릎으로 기었다. 그 모습이 고고해서 승현은 이상하게도 기분이 나빠지려 했다. 잘난 놈을 제 앞에 무릎 꿇려 놓았는데 찝찝하고 기분이 더러웠다. 지겸에게 30만 달러가 적혀진 수표를 받아든 승현이 제 입술을 혀를 빼 핥았다. 3억이라니.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수확이다.
“구 교수. 여기까지 온 김에 핥아봐. 아까 신발이라도 핥을 기세던데?”
승현의 눈썹이 흥분으로 꿈틀댔다. 설마 이 정도까지 할까 싶었다.
하지만 신발이 대수일까. 솔직히 지겸은 저 쓰레기 자식이 자기 좆을 빨라고 해도 못 할 게 없었다. 소희가 옆에 있는데. 당장 가서 풀어주고 안아주고 싶은데. 그럴 수 없다는 사실만이 그를 괴롭혔다.
지겸이 망설이지도 않고 고개를 숙였다. 남자의 가죽 구두 끝을 제 혀를 빼 여러 번 크게 핥았다. 떨고 있는 소희와의 거리가 좀 더 가까워져서일까. 온 신경이 그녀에게 쏠려 있어서인지 그다지 자존심이 상하지도, 시큼한 가죽 냄새조차도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더럽다는 의식조차 없었다. 지겸의 머릿속에는 온통 소희를 어서 구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와… 존나. 구지겸. 너도 별거 아니구나. 이 여자가 그렇게 좋냐?”
승현이 구두 앞코를 까딱였다. 혀를 대고 있던 지겸의 날카로운 코끝과 이마가 툭툭 건드려졌다. 그조차 개의치 않는 듯 지겸은 기계적으로 동작을 반복했다.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소희의 얼굴에 점점 핏기가 가셨다. 살아오며 누구나 그녀에게 친절했다. 하지만 누구도 이렇게까지 제 몸을 바쳐 지켜준 적은 없었다. 그녀가 그에 대해 뭔가 잘못 알고 있었던 걸까. 진짜처럼 떠돌던 소문 속 남자와 그녀가 계속 지켜본 지겸은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정말 저 사람이 유정이를 임신시킨 그 남자가 맞을까.
소희는 이런 순간에도 결국 그런 게 궁금한 스스로가 우습고 싫었다. 계속되는 긴장과 두려움 속에서 몇 시간을 시달렸던 만큼 소희의 머릿속도 마음속도 뒤죽박죽 엉망이었다.
어차피 그는 그녀를 구할 것이다. 자신은 무사할 것이다. 그가 이 방에 등장한 순간부터 안심이 됐다. 그녀를 보호하듯 감싸 안던 강인한 페로몬, 충혈된 눈으로 가만히 전하던 마음. 지치고 힘겹고 무서웠지만 이젠 아니었다. 혹시라도 그녀가 조금이라도 잘못될까 두려운 지겸의 속마음까지는 소희도 알아채지 못했지만.
아. 이 밧줄에서 벗어나서, 저 남자 품에 안기고 싶다.
무엇도 정돈되지 않은 상태에서 소희는 제 날 것의 욕망과 마주했다.
그저 그의 심장 소리를 느끼고 싶었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고, 언제나 일정하게. 한결같이 뛰는. 저 남자가 아주 밉고 싫었던 순간조차 그 품에 안겨 쿵쿵 울리는 소리를 듣고 있자면 몸이 노곤해져 자꾸만 잠이 왔다. 지친 하루의 끝에 따뜻한 이불 속에 웅크려 들어가 느끼는 충만한 안온감. 지겸의 포옹이 꼭 그랬다.
“지…겸….”
잔뜩 갈라진 자그마한 목소리가 소희 입에서 겨우 튀어나왔다.
지겸의 청각이 기민하게 소희의 음성을 알아차렸다. 그녀의 입에서 거의 처음, 제대로 듣는 자신의 이름이다. 그의 심장이 서걱댔다.
“임소희 씨 입 안 닥….”
제 신발을 핥던 지겸을 내려다보던 승현이 소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의 집중력이 흐트러진 틈, 그 찰나를 지겸은 놓치지 않았다.
“으헉!”
지겸이 남자의 발목을 재빨리 잡아채 바닥에 넘어뜨렸다. 쾅 소리를 내며 승현이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가 본능적으로 들고 있던 메스를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지겸은 칼끝을 여유 있게 피하며 가장 먼저 승현의 손에서 스마트 포인터를 빼앗아 멀리 던져 버렸다.
“야! 으, 이 씨발 새끼가!”
“윽.”
당황해 팔을 허우적대던 승현이 지겸의 허벅지에 메스를 그대로 내리꽂았다. 푸욱- 하고 깊게 살이 찔리는 소리가 소희의 귓가를 가로질렀다.
“흡, 흐윽, 흑.”
놀란 소희의 입에서 결국 울음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지겸은 미간을 조금 찌푸렸을 뿐 곧바로 승현의 명치에 주먹을 내리쳤다. 그리고 제 허벅지에 꽂힌 칼을 뽑지도 않은 채 책상 뒤쪽으로 절뚝이며 걸어갔다. 이 방에 들어온 순간부터 미리 봐 뒀던 전기 콘센트 위치를 다시 확인한 뒤, 모니터에 연결된 전원 코드를 악력으로 단번에 뽑아버렸다. 잠시 파지직하던 소리가 들리더니 책상 위의 모니터뿐 아니라 연결되어 있던 노트북도 꺼졌다.
스마트 포인터를 잡으러 달려갔던 승현이 그대로 방구석에 멈춰 섰다. 계획이 틀어진 것에 당황했는지 몸이 잔뜩 굳은 채였다. 지겸은 컴퓨터가 완전히 작동을 멈추는 걸 확인하고는 천천히 승현에게 다가갔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허벅지가 욱신거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소희야. 눈, 잠시 감아줄래…?”
내가 다시 뜨라고 할 때까지, 절대 뜨지 마. 소희 앞을 지나치는 지겸이 조용히 읊조렸다. 어른 말을 잘 듣는 어린아이처럼 소희가 곧바로 눈을 감았다. 그녀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며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지겸은 설마 괜찮겠지. 아까 메스에 다리가 심하게 찔린 것 같았는데.
아직 그 남자가, 지겸이 밉다. 저 남자는 분명 그녀를 속인 나쁜 놈이 맞다. 하지만 그 나쁜 사람이 다치거나 아픈 건 싫었다. 이런 양가적인 감정이 무슨 의미인지 혼란스러웠다.
이 두려움이 몇 시간을 묶여 시달린 것에서 이어진 것인지. 아니면 혹시라도 자신을 구하려고 온 남자가 다칠까 봐 걱정되는 것에서 기인한 건지 알 수조차 없었다.
“왜, 왜 이래. 구, 구 교수. 사실 내가 별로 한 것도 없잖아. 그, 그치? 돈도 여, 여기 돌려줄게. 응?”
승현은 얼굴이 파래져서는 덜덜 떨었다. 허벅지에 메스를 매달고도 거침없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지겸을 보니 소름이 돋았다. 너무 겁이 나 다리에 힘까지 풀렸는지 그가 맥없이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미, 미안해. 내, 내가 잘못했어. 열, 열성으로 태어난 게 어, 억울해서. 그래서.”
“그래, 알아.”
어느덧 지겸이 승현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여전히 무표정의, 차갑게 식은 까만 눈동자가 살의로 일렁였다. 눈앞의 남자가 자신을 곧 죽일 것 같다는 예감.
“그, 그렇지? 사람이 정신적으로 약해지면 이, 이런 멍청한 짓도 저지르고 그러는 거야. 하, 한 번만 봐줘. 너흰 가진 것도 많잖아! 한 번만 용서해 주면 다, 다시는 두 사람 앞에 얼씬, 도 하지 않을, 게. 그러니까.”
이제는 지겸의 앞에 승현이 무릎을 꿇었다. 고개를 숙이고 두 손을 모아 싹싹 빌었다. 가소로웠다. 어쩔 줄 몰라 온몸을 떠는 모양새를 보고도, 지겸의 분노는 사그라들지 않고 속에서 더욱 세게 끓어올랐다.
“너… 히포크라테스 선서. 기억하지?”
“히, 히포크라테스… 선서?”
“읊어봐.”
“지, 지금?”
지겸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선서 내용을 더듬거리며 늘어놓았다.
“의, 의업에 종사하는 일, 일원으로서 인정받는 이 순간에, 나의 이, 일생을 인류 봉사에 바, 바칠 것을 엄숙히 서, 서약한….”
“그런데.”
지겸이 승현의 말허리를 잘랐다. 승현이 고개를 들어 지겸과 눈을 마주했다. 검푸르게 가라앉은 그의 눈에 승현은 갑갑하고 숨이 조여드는 것 같았다.
“그 서약 중 넌 제대로 지킨 게 없는 것 같은데.”
“…어?”
“의사로서 양심과 품위를 유지하지도 않았고, 네 환자로 온 소희의 건강을 우선적으로 배려하지도 않았으며 의업의 고귀한 전통과 명예를 지키지도 않았잖아.”
지겸이 꿇어앉은 승현의 멱살을 한 손으로 잡아 들어 올렸다. 남자의 다리가 허공에 떠 대롱대롱 매달렸다.
“으윽, 놔, 크윽, 놔, 줘. 제, 제발….”
퍽. 지겸이 그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소희가 놀랄까 봐 참고 싶었지만, 그녀를 저렇게 울리고 괴롭힌 인간의 면상이 번지르르한 꼴을 도저히 봐줄 수가 없었다.
퍽. 퍽. 퍽! 지겸이 승현 위에 올라타더니 얼굴에 수차례 주먹을 내리꽂았다. 이곳에 잡혀 있었던 소희를 생각할수록 제어할 수 없는 분노가 터져나와 주먹 끝으로 몰렸다. 승현은 더 이상 살려달라는 말도, 비명 조차 지르지 못한 채 지겸이 때리는 대로 뭉개졌다. 제 여자를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는 자괴감과 절망도 함께 비어져나와 지겸은 더욱 정신없이 주먹을 휘둘렀다.
“그, 그만…. 흑.”
공간을 채우는 둔탁한 소음이 참기 어려워진 소희가 아주 작게 소리 질렀다. 지겸이 맞고 있는 게 아님을 아는데도 눈을 뜨면 그가 피 흘리고 쓰러져 있을까 봐 겁이 났다.
그 소리에 지겸이 즉시 동작을 멈추고 일어섰다. 아주 작은 외침이었지만 그의 귀에는 오로지 소희의 목소리만 들렸으므로.
온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 승현이 바닥에 구겨진 채 쿨럭거렸다. 퉤, 피를 뱉어내니 부러진 이가 같이 튀어나왔다.
지겸이 쓰러진 승현에게 다시 천천히 다가갔다. 그가 앉은 채로 뒷걸음질을 쳤다.
“선서를 지키지 않는 놈에게, 의사 자격을 계속 줄 수는 없지.”
지겸이 승현의 오른 손목을 홱 낚아챘다.
“왜, 왜, 또…. 하, 하지 마!”
“오른손잡이, 맞아?”
남자의 눈에 공포가 서렸다. 뭔지도 모르고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흡.”
지겸이 승현의 손목을 잡은 채 다른 손으로 제 허벅지에 꽂혔던 메스를 순식간에 뽑아버렸다. 지겸의 다리에서 피가 철철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구, 구 교수. 뭐야!”
승현의 동공이 커졌다.
메스를 쥔 지겸이 그의 오른손을 바닥에 펼쳐 눌렀다. 승현이 놀라서 버둥거렸지만 체격 차이가 커서 지겸의 힘을 당해내기는 어려웠다.
그때, 지겸이 승현의 손목에 위치한 건(tendon) 쪽을 가늠해 메스의 칼날을 깊숙이 박아 넣었다.
“으으- 아아아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