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창문이 없던 탓인지 방문을 열자마자 눅눅한 열기가 훅 지겸의 얼굴에 끼쳐왔다. 그리고 정면에… 보이는 가녀린 여체는… 소희, 소희였다. 그녀가 있었다. 얼마나 눈물을 흘린 것인지 두 눈이 붓고 얼굴이 엉망이었다. 게다가 굵은 밧줄로 얼마나 꽉 묶여 있는지 보는 그가 다 갈가리 찢기는 것만 같았다. 지겸이 입술 한쪽을 지그시 깨물었다.
“소희야.”
지겸이 소희에게 달려가려는데 뒤에서 승현이 멈춰 세웠다.
“아니. 여기까지. 지금 네가 선 곳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마.”
“…뭐?”
소희가 고개를 느릿하게 들어 방에 들어온 형체를 가늠해 봤다. 하도 울어 시야가 불분명했다. 그래도 저음의 목소리와 무엇보다 그녀를 감싸는 지겸 특유의 페로몬으로 알 수 있었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지겸의 감정이 안에서 폭발했기 때문인지 소희를 보호하기 위해서인지, 그에게서 어느 때보다 강한 페로몬이 뿜어져 나왔다. 승현도 흠칫 놀라 그를 쳐다봤다. 주변에 우성 알파인 친구들이 많았지만, 이 정도로 위협적인 페로몬은 처음이었다.
소희가 고개를 다른 쪽으로 틀었다. 내내 바늘 위에 서 있는 것만 같았던 아슬아슬한 압박감과 두려움이 지겸을 보자 천천히 사그라들며 그제야 숨이 제대로 쉬어졌다. 하지만 안심이 되면서도 자신의 처지가 수치스러워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지겸의 눈을 피했다.
지겸은 남자가 하라는 대로 자리에 우뚝 섰다. 소희를 똑바로 바라볼 수 없는 건 그도 마찬가지였다. 사진으로 이미 봤는데도, 믿고 싶지 않을 정도로 끔찍했다. 그녀를 이 지경으로 만든 원인이 모두 자신인 것만 같았다. 아득 깨문 입술에서 피 맛이 났다. 주먹도 하도 세게 쥐어서 손바닥 안쪽이 피가 날 정도로 불긋해졌다.
승현은 그런 지겸을 비웃으며 방 안으로 천천히 들어와 소희 근처에 있는 책상 옆에 섰다. 책상에는 커다란 모니터 세 개가 설치돼 있었다. 그가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스마트 포인터를 집어 들었다.
“구 교수. 진짜, 나 모르겠어?”
지겸이 조용히 고개를 내저었다. 어느덧 그의 눈이 빨갛게 충혈돼 있었다.
“이거 섭섭한데. 재작년에 라스베이거스에서 있었던 ASCO(American Society of Clinical Oncology/세계 최대 종양학회)에서 만났었는데. 인사도 나눴고.”
“아.”
가물가물하게 떠오를 듯도 하지만 지겸은 여전히 잘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게 승현의 가학심을 더욱 자극했다.
“하긴 뭐, 그 날 거기 있던 사람들 전부 다 베논 제약 아들 한번 보겠다고 달려들어 악수하고 대화 나누느라 난리였으니, 나 따위가 기억이나 나겠어.”
“그래서. 그 얘길 지금 왜 하는 거지?”
승현이 멈추라는 뜻으로 손을 흔들었다.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끝낼 때까지 제대로 들으란 얘기 같았다. 눈앞에 묶인 소희를 두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겸의 심경은 살얼음판 위를 걷고 있었다.
“싱가포르에서 이렇게 만나다니 참 인연이야. 깜짝 놀랐어. 소희 씨야 워낙, 유명하잖아? 각인한 상대가 구지훈이 아닐 거라는 건 예상했지만 설마 그게 너일 줄이야.”
뭐가 그리 웃긴지 승현이 배를 부여잡고 소리 내 웃었다. 소희와 지겸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코미디언이 혼자 무대에 서서 연기하는 스탠딩 코미디 쇼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관객 중 누구도 웃지 않는다는 점에서 차이가 났지만.
“누가 로열 알파 아니랄까 봐. 나는 11년 꼬박 걸려 딴 전공의, 6년인가 만에 따고. 남들은 5년도 더 걸리는 조교수 자리도 바로 꿰차고. 와… 진짜 같은 알파라도 이렇게 차이가 나면 어디 서러워서 살겠나. 안 그래?”
승현의 말을 들으며 지겸은 조금씩 실마리를 잡았다. 깐죽대는 말들 사이 숨어 있는 짙은 패배감과 열등감. 이 남자의 정체를 알 것도 같았다.
“그 뭐야, 너희 연구팀이 얼마 전에 특수 항체 개발했다고 난리던데. 오메가 항원이랑 결합 가능한 거였나?”
“지금 그런 게 무슨 상관이야.”
지겸은 대충 대답하면서 소희 쪽을 쳐다봤다. 당장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가까운 거리인데.
“아니, 그렇잖아. 그렇게 대단한 척, 여자한테는 아무런 관심 없는 척하더니 이거였냐. 형 여자 따먹으려고? 각인까지 제대로 했던데. 그런 취향인 줄 미처 몰랐네.”
“….”
지겸이 조용히 듣고만 있으니 승현은 더욱 신이 나 떠들었다. 모두가 말이라도 한번 섞고 싶어 안달이 난 저 잘난 베논 제약 아들놈, 로열 알파가 제 말을 이렇게나 경청하고 있다는 게 그를 더욱 흥분시켰다.
“솔직히 어떤 알파가 각인한 지 며칠 되지도 않아서 페로몬 질질 흘리는 제 오메가를 이렇게 밖으로 내돌려? 응? 지나가는 알파마다 다 쳐다봤겠어. 군침 돌아서.”
각인 직후 오메가의 페로몬은 그 어느 때보다 달콤하게 여문다. 실제로 알파를 유혹해 효율적으로 번식하기 위한 진화 심리적 본능이라, 알파라면 누구나 거기에 동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보통의 알파는 이 시기에 제 오메가에게 자신의 알파 페로몬을 유난히 짙게 묻힌다. 다른 알파들은 눈독도 들이지 못하도록.
소희의 경우도 다르지 않았다. 며칠 동안 내내 지겸의 품에서 시달렸던 소희에게서는 소유권을 주장하는 듯 강한 알파 페로몬이 함께 풍겼다. 제정신인 알파라면 소희의 손끝도 건드리지 못했을 거다. 지겸의 추론이 결론에 도달했다. 승현은 그렇기에 오히려 소희를 더욱 노렸던 거다. 왜냐하면.
“너, 각인 오메가 헌터지.”
각인 오메가 헌터. 각인 직후의 오메가를 납치해 알파에게 돈을 뜯어내거나 성범죄를 저지르는 범죄자. 지겸의 말에 소희도 그제야 뉴스에서 봤던 몇 사건이 떠올랐다. 도대체 멀쩡한 직업을 가진 남자가 왜 자신에게 이러는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풀리지 않던 수수께끼도 풀렸다. 베타는 페로몬을 느끼지 못해 아예 알파와 오메가를 구분해낼 수조차 없다. 따라서 각인 오메가 헌터는 주로 우성에 대한 열등감에 휩싸인 열성 알파나 오메가가 범인인 경우가 많았다.
승현의 경우, 직접 위해를 가하는 것보다 평소 열등감을 느꼈던 존재를 자신의 발아래 두는 역전된 상황 자체에서 쾌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간단하다. 얼마든지 맞춰주면 될 일이었다. 소희를 무사히 구해낼 수만 있다면, 저딴 사이코 변태 새끼가 요구하는 게 무엇이든 다 들어줄 수 있었다.
“역시 똑똑해. 맞아. 너네는… 내 다섯 번째 고객이라고나 할까. 구지겸, 자. 봐봐.”
남자가 이죽이며 스마트 포인터의 버튼을 눌렀다. 컴퓨터 스크린이 켜지며 사진이 수십 장 넘게 저장된 폴더가 펼쳐졌다. 승현이 그중 하나를 재생시켰다. 지겸이 오기 전, 그가 억지로 찍은 소희의 동영상이었다.
지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꽉 쥔 주먹 끝이 부들부들 떨렸고, 손가락 마디마디의 뼈가 하얗게 튀어나왔다. 제대로 처치하지 않았던 오른손 상처에서 피가 다시 새어 나와 붕대가 새빨갛게 물들었다. 당장 남자의 목이라도 졸라버리고 싶은데 참는 게 쉽지 않았다. 그런 지겸을 보며 승현의 입매가 꿈틀거렸다. 퍽 잘 참고 있던 지겸에게서 제대로 반응이 나오자 신이 났다.
“죽이지? 역시 얼굴이 예뻐서 그런가, 화면발도 잘 받고. 게다가 몸매가, 키아. 나 좀 감동 받았잖아.”
승현이 소희에게 한 발자국 더 나아갔다.
지겸이 몸을 움찔했다. 남자가 조금이라도 소희와 더 가까워지는 게 싫었다. 지겸의 발은 당장이라도 소희에게 뛰어갈 기세였다.
“어허. 움직이면 안 되지. 잘 들어. 내가 이 버튼을 누르면 게임 끝. 방금 보여준 이 동영상부터 오늘 찍은 사진 전부,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까지 수십 개 포르노 사이트에 업로드될 거야. 그렇게 되기 싫으면….”
승현이 다시 손에 메스를 쥐었다. 허공에서 일부러 빙빙 돌리며 다가가 소희 옆에 바짝 섰다. 소희의 눈동자에 다시 두려움이 차올랐다. 지겸은 그를 어떤 식으로든 소희에게서 떨어뜨려 놓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너. 지금 하는 짓. 그게 뭐든 후회, 하게 될 텐데.”
지겸이 참다 참다 겨우 그 한마디를 천천히 짓씹듯 내뱉었다.
“잠깐, 잠깐. 아직 규칙도 말 안 했는데. 누가 그렇게 멋대로 막 지껄이랬지? 내가 말로만 하니까 상황 파악이 잘 안 되나 봐?”
승현이 메스를 소희의 젖무덤 사이로 가져갔다. 날카로운 칼끝이 자신을 향하자 소희가 놀라서 몸을 굳혔다. 지겸이 이젠 어찌 되든 저놈을 그냥 죽이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하던 찰나였다.
“아흣!”
투둑. 남자가 메스로 소희의 브래지어 앞쪽 이음 선을 끊어버렸다. 하얗고 동그란 젖가슴이 튕겨 나오듯 드러났다. 소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소희야!”
아. 지겸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승현이 일부러 소희의 유두 근처에서 메스를 가지고 놀았다. 겁에 질린 소희의 여린 피부에 소름이 돋았다.
“뽀얗고 예뻐서. 이런 데 메스로 확 그어줘도 재밌을 것 같고. 구지겸, 어때?”
“흑, 흐으….”
그가 소희 가슴 위에 칼날로 긋는 시늉을 하며 물었다.
갈색의 큰 눈동자가 겁에 질려 흐려졌다. 힘들어하는 소희의 모습에 지겸은 제 심장에 저 메스를 박아넣는 게 차라리 낫겠다 싶었다. 그의 하나뿐인 여자가, 제 오메가가 저렇게 힘들어하는데도 당장 구해주지 못한다는 무력감이 지겸을 옥죄었다.
“구지겸, 내가 궁금한 게 있는데. …맛있냐?”
지겸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크큭 웃으면서 승현이 소희의 머리카락을 들어 킁킁 냄새를 맡았다. 소희가 움찔거릴 때마다 지겸이 입 안의 살을 마구 짓씹었다.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다.
“냄새 진짜 죽이네. 무슨 인간이 아니라 과일 같아. 로열 오메가는 좀 다르지? 거기다 형 여자를 따먹은 거 아냐. 기분 째졌냐?”
승현이 메스 끝으로 소희의 목 근처를 겨냥하는 시늉을 했다.
“여긴가. 페로몬이 풍기는 곳. 완전 달큼한데. 나도 한번 깨물어 봐도 되지?”
지겸이 바로 무릎을 꿇었다. 한 치의 주저함도 없었다. 승현의 얼굴에 기묘하고 비릿한 웃음이 차올랐다.
“원하는 걸 말해. 소희에게만 아무 짓도 않는다면, 내가 뭐든 할 테니까.”
남자가 혹여나 그녀에게 뭔가 더한 짓을 할까 두려워진 지겸이 다급히 말했다.
이 모습을 본 소희가 놀라서 지겸을 쳐다봤다.
“돈이라면 당장 원하는 대로 전부 줄 수 있고, 네 다리 사이를 기라면 수십 번, 수백 번도 할 수 있어. 아니면 네 신발이라도… 핥을까? 뭐든 할 테니 제발, 소희에게서 손 떼.”